[include(틀:다른 뜻1, other1=18세기에 존재하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rd1=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include(틀:네덜란드 17주)] ||<table align=right><table width=400><-6> '''{{{+2 합스부르크 네덜란드}}}'''[br]'''Habsburgse Nederlanden[br]Pays-Bas des Habsbourg'''[br]'''1482년~1555년''' || ||<-3> [[파일:2000px-Flag_of_Cross_of_Burgundy.png|width=100%]] ||<-3><width=5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67px-Coat_of_Arms_of_Philip_IV_of_Burgundy.svg.png|width=100%]] || ||<-3> 국기 ||<-3> 국장 || ||<-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Spanish_Netherlands.svg.png|width=100%]][br]1482 ~ 1581년 || ||<-2><width=25%> 위치 ||<-4>[[베네룩스]] || ||<-2> [[수도(행정구역)|수도]] ||<-4>[[브뤼셀]] || ||<-2> 정치체제 ||<-4>[[군주정]] || ||<-2> [[언어]] ||<-4>[[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당시 프랑스어 사용지역에서는 주로 프랑스어와 가까운 [[http://connaitrelawallonie.wallonie.be/sites/wallonie/files/pages/la_langue_et_la_litterature_wal.pdf|지방어]]를 주로 썼다.] 등 || ||<-2> 성립 이전 ||<-4>[[파일:부르고뉴의 십자가(나뭇가지형)-1.png|width=20]][[부르고뉴 공국|부르고뉴령 네덜란드]] || ||<-2> 성립 이후 ||<-4>[[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width=20]][[네덜란드 공화국]][br][[파일:2000px-Flag_of_Cross_of_Burgundy.png|width=20]][[스페인령 네덜란드]] || [목차] == 개요 == [[네덜란드어]]: De Habsburgse Nederlanden [[프랑스어]]: Les Pays-Bas des Habsbourg [[영어]]: Habsburg Netherlands [[1482년]]부터 [[1581년]]까지 [[저지대 국가]]에 존속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였다. [clearfix] == 역사 == [include(틀:벨기에의 역사)] [include(틀:네덜란드의 역사)] [include(틀:룩셈부르크의 역사)] 카럴 더 스타우터(Karel de Stoute)[* 네덜란드 명칭, 용맹한 성격 탓에 용담공 샤를(Charles Ier le Téméraire)이라고 알려졌다. [[부르고뉴 공국]]의 마지막 공작이다. 형식상 종주국인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부르고뉴의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으로부터 로타링기아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받기 직전까지 갔다가 실패로 돌아갔고 영지였던 저지대와 부르고뉴 본토를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에 있던 로렌에 위치한 낭시를 공략하다가 [[스위스 용병]]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의 유일한 후계자 마리아 반 부르혼디어(Maria van Bourgondië)[* 이쪽은 부귀공 마리(Marie de Bourgogne)로도 알려졌다. 샤를이 전사한 직후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프랑스가 침공해오면서 겐트 성에 유폐되어 버린 신세가 되었고 이를 막시밀리안 1세가 구출한 후 마리와 결혼하였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고 거기서 승리를 거두어 마리는 부르고뉴 본토를 잃는 대신 저지대 지역의 상속을 인정받았다. 막시밀리안과의 사이에선 장남 [[펠리페 1세|필립]]과 장녀 [[마르가레테 황녀|마르게리타]]의 1남 1녀를 두었다.]가 [[1482년]]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한 후, 마리아의 남편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는 당시 15세의 소년이었던 장남 [[펠리페 1세|필립]][*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필립이라고 불렸다.]에게 저지대 지역의 통치권을 물려주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어린 필립을 대신하여 그동안 섭정을 맡아 네덜란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본래 영지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하자 더 이상 섭정을 할 수 없었기에 통치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필립은 네덜란드를 부르고뉴 식으로 통치하려고 하였고, [[1477년]]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의회와 맺은 '위대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지대에서 나고 자란 필립은 자신의 영지를 잘 이해하였고 훌륭한 통치를 하였다. 그러므로 저지대의 주민들 역시 그를 지지하였다. 필립은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의 중매로 [[1496년]]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왕 [[페르난도 2세]]의 차녀 [[후아나(카스티야)|후아나]]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로써 스페인과 저지대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1504년]] 장모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후아나가 친정어머니의 영토를 물려받게 되었다.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카스티야)|후아나]]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카스티야까지 섭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에 카스티야 귀족들은 필립을 카스티야의 왕 펠리페 1세로 추대하였다. 펠리페 1세는 즉위 2년 후인 1506년 카스티야에 도착하였으나 얼마 안 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필립이 가지고 있던 카스티야 국왕과 저지대 공작이라는 자리는 장남 [[카를 5세|카를]]이 계승하였다. 당시 카를 5세는 겨우 6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였으므로 [[펠리페 1세][의 여동생 [[마르가레테 황녀|마르게리타]](Margaretha van Oostenrijk, 1480~1530)가 섭정을 맡았다. [[1515년]] 카를 5세가 성년이 되자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돌려 받았고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1516년]] 사망하자 아라곤의 왕위까지 물려받으면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번째 왕이 되었다. [[1519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 대공국까지 상속받았으며 경쟁자였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따돌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가 물려받은 저지대 지역, 즉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마르가라테 황녀|마르게리타]]의 섭정 이후 [[1531년]]부터 [[카를 5세]]의 여동생 마리아(Maria van Hongarije)[* 1505~1558. [[헝가리어]]로는 합스부르크 마리어(Habsburg Mária).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러요시 2세와 결혼하였으나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가 전사하면서 둘째 오빠 [[페르디난트 1세|페르디난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섭정 직을 지냈다.]가 통치하게 되었다. 카를 5세는 동년 [[브뤼셀]]에 중앙 행정부를 설치하여 마리아의 통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중앙 행정부는 크게 국가 위원회(Raad can State), 비밀 위원회(De Geheime Raad), 재정 위원회(De Raad van Financiën)으로 구성되었다. 국가 위원회는 정치 현안들에 대한 자문을, 비밀 위원회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 수행에 필요한 법 제정을, 마지막으로 재정 위원회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재정 사안을 담당하였다. 본 위원회는 각각 3명의 귀족, 법률, 재정 전문가로 구성되었으며, 세금 규모를 작성, 징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또한 각 지역에는 지역 의회가 있었으며, 군주를 대리하는 총독이 있었다. 한편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확장에 나서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투르네,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헬러, 흐로닝언 등을 자신의 영지의 일부로 편입하였다. 최종적으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는 17개의 작위와 그 영지, 총 17개 주가 속하게 되었다. [[1548년]]년에는 네덜란드 지역을 제국 내 자치 지역으로 설정하고, [[1549년]] 황제 조칙(De Pragmatieke Sanctie, 1549)을 공표하여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속하는17개의 작위를 사실상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어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모든 권리를 상속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555년]] 카를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펠리페 2세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지배하게 되었다. 보통 이 시점부터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불리게 된다. |||||||| [[파일:부르고뉴령 네덜란드(1477).png]] ||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17개 주의 구성''' || || 번호 || 지역 명칭 [br] 볼드체는 해당 지역이 속하는 언어권을 가리킨다 || 명목상 작위 || 비고 || || 1 || 프랑스어: '''아르투아(Artois)''' [br] 네덜란드어: 아르테시어(Artesië) || 백작령 || [* 릴/레이설(Lille/Rijsel), 두에/도바이(Douai/Dowaai), 오르시(Orchies/Oorschie) 성백령과 투르네투르네시/도르니크도르니크세(Tour et le Tournaisis/Doornik en het Doornikse) 영주령 포함.] || || 2 || 프랑스어: 플랑드르(Flandre) [br] 네덜란드어: '''[[플란데런 백국|플란데런]](Vlaanderen)''' || 백작령 || || || 3 || 프랑스어: 말린(Malines) [br] 네덜란드어: '''메헐런(Mechelen)''' || 영주령 || || || 4 || 프랑스어: '''나뮈르(Namur)''' [br] 네덜란드어: 나먼(Namen) || 백작령 || || || 5 || 프랑스어: '''에노(Hainaut)''' [br] 네덜란드어: 헤너고번(Henegouwen) || 백작령 || || || 6 || 프랑스어: 젤랑드(Zélande) [br] 네덜란드어: '''제일란트(Zeeland)''' || 백작령 || || || 7 || 프랑스어: 올랑드(Hollande) [br] 네덜란드어: '''홀란트(Holland)''' || 백작령 || || || 8 || 프랑스어: 브라방(Brabant) [br] 네덜란드어: '''[[브라반트 공국|브라반트]](Brabant)''' || 공국 || || || 9 || 프랑스어: 랭부르(Limbourg) [br] 네덜란드어: '''[[림뷔르흐 공국|림뷔르흐]](Limburg)''' || 공국 || || || 10 || 프랑스어: '''[[룩셈부르크 공국|뤽상부르]](Luxembourg)''' [br] 네덜란드어: 뤽셈뷔르흐(Luxemburg) || 공국 || [* 프랑스어권으로 분류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어권이다. 독일어 이름은 '''룩셈부르크(Luxemburg)'''.] || || 11 || 프랑스어: 위트르슈(Utrecht) [br] 네덜란드어: '''위트레흐트(Utrecht)''' || 주교령 || [* 후에 영주령으로 전환된다.] || || 12 || 프랑스어: 프리즈(Frise) [br] 네덜란드어: '''프리슬란트(Friesland)''' || 영주령 || || || 13 || 프랑스어: 겔드르(Gueldre) [br] 네덜란드어: '''헬러(Gelre)''' || 공국 || || || 14 || 프랑스어: 그로냉그(Groningue) [br] 네덜란드어: '''흐로닝언(Groningen)''' || 영주령 || || || 15 || 프랑스어: 드렝트, 랭엥, 웨드, 웨스테르올드(Drenthe, Lingen, Wedde, Westerwolde), [br] 네덜란드어: '''드렌터, 링언, 베더, 베스터르볼더(Drenthe, Lingen, Wedde, Westerwolde)''' || 영주령 || [* 4개 백작령을 일괄적으로 1개 주로 취급한다.] || || 16 || 프랑스어: 오베르슬(Overijssel) [br] 네덜란드어: '''오버레이설(Overijssel)''' || 영주령 || || || 17 || 프랑스어: 쥐픈(Zutphen) [br] 네덜란드어: '''쥐트펀(Zutphen)''' || 백작령 ||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 중앙 정부 간에 갈등은 항상 일어났는데, 주로 세금과 종교 문제에서 나타났다. 특히 당시 유럽은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네덜란드 지역도 이에 예외가 아니였다. [[루터교회]]의 확산은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 큰 위협이었다. 카를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Bloedplakkaat)을 공표하여 루터회 교인들은 누구나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루터회뿐만 아니라 [[칼뱅]]파 역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었고, 카를 5세는 루터회와 마찬가지로 칼뱅파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조치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각 군주들이 개신교의 편에 서면서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를 5세는 종교 화해[* 그러나 이 종교화해는 [[가톨릭]]과 [[루터교회]] 만이 해당되는 것으로 네덜란드 개신교의 다수를 차지하던 [[칼뱅]]교는 해당되지 않았다. 따라서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여전히 가혹한 종교 탄압이 자행되었다.- 미술사와 근현대사, 36p]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카를 5세에게 있어 엄청난 정치적 타격이었고, 결국 동년 제위에서 퇴위하여 펠리페 2세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할 수 밖에 없었다. 펠리페 2세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1559년]] [[스페인]]으로 떠났다. 자연스럽게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의 이복 누이인 마르게리타(Margaretha van Parma)가 통치하게 되었다. 마르게리타는 카를 5세 때 설치된 기구인 국가 위원회의 자문을 받으며 통치하게 되는데, 특히 이 위원회 위원들 중 앙투안 페레노 드 그랑벨(Antoine Perrenot de Granvelle)은 펠리페 2세의 최측근이었다. [[1559년]] 그는 교회조직이 개편되면서 메헬렌의 [[대주교]]가 되고 그 해 스페인 네덜란드의 재상이 되었다. 펠리페 2세의 비호 아래 평민 출신인 그가 국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자 다른 귀족 출신 자문 위원들의 불만과 우려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1559년]] 그랑벨에 의해 발효된 '교회 재조직령'은 네덜란드 토호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하지 않는 규정이었고 이에 귀족들이 폭발하여 그랑벨을 사퇴시키고자 동맹을 맺어 펠리페 2세에게 청원하였다. 펠리페 2세는 처음에 이를 용인하지 않았으나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진출과 이복 누이 마르게리타의 청원에 의해 [[1564년]] 마침내 그랑벨을 퇴진시켰다. 그랑벨의 뒤를 이어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대귀족들이었다. 이 대귀족들은 [[빌럼 판오라녀]](Willem van Oranje), [[라모랄 반 기베르|라모랄 에흐몬트]](Lamoraal Egmont), 필립스 판 호른(Filips van Horn)이었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악화되고 종교분쟁이 격화되자 펠리페 2세는 [[1565년]] 10월, 마르게리타에게 이교도들은 더욱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빌럼 등 소수 대귀족들은 칼뱅교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왕에게 요구했고, 종교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하위귀족들도 이에 동참하여 뢰이크(Luik)에서 '합의(Compromis)'라는 연합을 결성한다. [[1566년]] 4월, '합의'연합을 구성한 하급귀족들은 마르게리타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청원서에는 종교 재판 시 이단에 대한 관용과 의회를 매개로 자신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쓰여졌다. 이 때 그들은 '거지들(geuze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일단 마르게리타는 이 청원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만연했던 [[가톨릭]]의 부패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불안이 [[1566년]] [[8월 10일]] 성상파괴 운동으로 폭발하였다. 네덜란드의 관리, 귀족, 시민, 빈민층 모두가 동참하여 벌어진 이 운동은 삽시간에 네덜란드 잔역을 휩쓸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연이어 성상파괴 소동이 벌어졌다. 마르게리타는 스페인 본국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성상파괴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567년]] [[3월 13일]] 마르게리타는 모든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왕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서약을 명령하였다. 에흐몬트와 호른은 서약했으나 [[빌럼]]은 거부하고 독일로 망명하였다. 펠리페 2세는 이러한 사건들을 더욱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1567년]] [[8월 22일]] 마르게리타 대신 알바(Alba) 공([[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을 임명하였다. 그는 폭동 재판소(De Raad van Beroerten)를 설치하고 칼뱅교의 무장봉기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약 8000명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탄압에 항의한 에흐몬트와 호른도 포함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 참고 문헌 == * 김영중, 장붕익 공저, <네덜란드史 (세계각국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4, 88~95쪽 * 송미숙, <미술사와 근현대사>,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36~37쪽 == 관련 문서 == * [[네덜란드/역사]] * [[카를 5세]] * [[종교 개혁]] * [[신성로마제국]] [[분류:네덜란드의 역사]][[분류:벨기에의 역사]][[분류:압스부르고 가문]][[분류:합스부르크 가문]][[분류:16세기 멸망]][[분류:신성 로마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