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 교수]] [[분류:스위스의 인물]] [[분류:언어학자]] [[분류:1857년 출생]] [[분류:1913년 사망]] [[파일:de_saussure.jpg|width=550]] [목차] == 개요 == >«La linguistique a pour unique et véritable objet la langue envisagée en elle-même et pour elle-même». [br] "언어학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상은 언어인데, 언어는 그 자체로서, 그것만을 위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프랑스어]]식 인명 표기이며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fɛʁdinɑ̃ də sosyʁ\]이다. [[외래어 표기법]]상에서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의 전치사나 관사는 인명이나 지명일 경우 뒷말과 붙여서 '드소쉬르'와 같이 쓰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관용적으로는 '드 소쉬르'로 표기하며, 한국의 언어학계에서는 주로 '소쉬르'라고 지칭한다.] [[1857년]] [[11월 26일]] ~ [[1913년]] [[2월 22일]])는 [[스위스]]의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로 [[구조주의]] [[언어학]]과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이다. 또한 기호학자로서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에도 큰 공을 세웠다. == 생애 == [[스위스]] 서부 [[제네바]]시에서 태어났다. 소쉬르 가문은 제네바시는 물론 스위스 내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명문가로 유명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생물학자이자 탐험가였던 앙리 드 소쉬르(Henri de Saussure, [[1829년]] [[11월 27일]] ~ [[1905년]] [[2월 20일]])와 이름난 백작가문의 딸, 루이즈 엘리자베트 드 푸르탈레스(Louise Elisabeth de Pourtalès, [[1837년]] [[9월 25일]] ~ [[1906년]] [[9월 10일]]) 부부의 9남 3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자연 과학자들을 배출한 유구한 가풍과 전통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며,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로부터 예술적 감수성을 물려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조숙한 천재성은 그가 14세 때 저술한 인도유럽어의 비교 논문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비교역사언어학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역사언어학의 지각 변동을 가져온 장편의 석사 논문 <인도유럽어족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Mémoire sur le système primitif des voyelles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을 출간한다.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파리로 건너가 [[1881년]]부터 10여 년 동안 고등연구실습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에서 강의하면서 [[1891년]]에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1892년]]에 자신의 모교인 제네바 대학으로 돌아가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세 차례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했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5.22, 휴머니스트 참조] [[1913년]]에 스위스 서부, [[보 주]] 뷔플랑르샤토(Vufflens-le-Château)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 일반언어학 강의 == 소쉬르의 가장 유명한 저작으로 남아있는 《일반 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는 소쉬르가 지은 책이 아니다. 소쉬르 자신은 출판에 대해 매우 인색했으며, 실제로 죽을 때까지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샤를 바이(Charles Bally, [[1865년]] [[2월 4일]] ~ [[1947년]] [[4월 10일]]), 알베르 세슈에(Albert Sechehaye, [[1870년]] [[7월 4일]] ~ [[1946년]] [[7월 2일]])가 남아있던 강의 노트를 간추려 출간하였다. == 학문적 업적 == === 공시적언어학 === 소쉬르는 19세기 [[언어학]]이 인간의 목소리가 의미 있는 소리를 창출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연구하는 [[음운론]]과 다양한 문법들의 비교 등과 같은 역사적 언어학, 비교 언어학 등에 관심을 두고 경험적인 현상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언어의 가장 독특한 특징인 전체적 혹은 체계적인 측면을 연구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소쉬르는 이 문제를 부각하기 위해 [[역사]]의 한 시점에서 언어 상태를 정태적으로 포착하는 공시적 언어학을 제창한다. 자세한 건 [[기호학#s-2|해당 문서]]를 참조. === [[랑그와 파롤]] === 해당 문서 참조. === 기호의 자의성 === [[파일:external/player.slideplayer.com/img14.jpg]] 소쉬르는 모든 기호는 겉으로 드러나는 기표의 형식인 기표(記標, 시니피앙signifiant)와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인 기의(記意, 시니피에signifié)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라는 말을 할 때 소리인 [나무]는 시니피앙이 되는 것이고, 그 의미인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다년생 식물’은 시니피에가 되는 것이다.[* 사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다년생 식물' 역시 '나무'라는 기의를 표현하는 언어라는 기호에 불과하다.] 이 둘의 관계는 의미작용(意味作用, 시니피카시옹signification)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라는 ‘기호의 자의성’이다. 즉 우리가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다년생 식물’을 ‘나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우연적이라는 뜻이다. [나무]라고 우리가 말하는 발음과 그것으로 가리키는 식물에는 어떠한 연관점도 없다. 둘째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는 필연성이 없지만 체계 속에서는 필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무’라는 글자를 보거나 [나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다년생 식물’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필연화된 ‘언어’라는 기호 체계 속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쉬르가 언어학자였던 만큼 그의 [[기호학]]은 언어기호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고틀로프 프레게]]의 [[기호학]]이나 [[찰스 샌더스 퍼스|퍼스]]의 [[기호학]]을 참고하면 좋다. 또한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도 자신의 저서와 강연에서 소쉬르의 기호언어학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 여담 == 소쉬르는 출판하거나 기록물로 문서를 남기는 것을 아주 싫어했으며, 실제로 박사논문[* 인도유럽어족의 원시모음 체계에 관하여]을 제외하고는 [[논문]]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강의를 끝마치고 난 뒤에는 강의록을 얄짤없이 '''[[분서|태워버렸다.]]''' 제자들이 강의노트를 모아 출판한 일반언어학 강의에 관한 출판물 역시 생각보다 적은 분량이고, 그나마도 강의노트 뿐만 아니라 수강생들의 필기노트들까지 뭉뚱그려 재구성한 것이다. 과거 [[수능]]에서 [[국어 영역]]이 [[언어 영역]]이라는 이름으로 나올 때에는[* [[2013 수능]]까지] [[비문학]]에 나오던 [[언어학]] 관련 지문에서 종종 보이는 이름이기도 했다.[* [[2014 수능]]부터 언어학 관련 내용이 비문학 부분에 직접 연계되는것이 아닌 문법 파트에 간접적으로 연계되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