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제5공화국/사건사고]][[분류:대한민국의 정치 사건사고]][[분류:1987년/사건사고]] [목차] == 개요 == [[통일민주당]]의 창당대회를 조직폭력배들이 방해한 사건.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지시로 안기부가 개입한 대표적인 정치공작 중 하나이다. == 상세 == 1986년 12월 24일 신민당 총재 [[이민우(1915)|이민우]]가 내각제를 전제로 한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지만 이 발언에 김대중과 김영삼은 즉각 반발했다. 그도 그럴듯이 이민우는 비록 당의 총재였지만 어디까지나 양김이 전면에 나서기 힘들어서 내세운 정치 원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민우 구상은 유야무야 흘러갈때 이철승이 87년 월 내각제로의 개혁을 주장하자 당지도부는 이철승을 당기위원회에 제소하게 된다. 그러자 이철승계 의원들의 강력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양김은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회의를 가진 뒤 "신민당 내분은 수습될 수 없으므로 분당이 불가피하다."란 결론을 내고 신민당 탈당과 신당창당에 합의한다. 이때 신민당 현역의원 중 대다수인 73명이 신당 창당에 동참했고 당명은 통일민주당, 총재는 김영삼, 고문에 김대중을 선출한다. 198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는데, 이 기간 동안 통일민주당 사무실 47곳 중 18곳이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불에 타고 잿더미가 되었다. 창당대회 기간이 끝난 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이때 통일민주당 측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당 내의 일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손을 뗐고 언론은 [[보도지침]]에 의해 당내부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태로 사건을 왜곡해서 보도했다.] [[김용남(1950)|김용남]]과 이선준(당시 45세·신민당 청년국 제1부장) 등이 폭력배를 동원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용남에게 창당 방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신민당 총무국 부국장 이용구는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 후 김용남은 1년 6개월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경찰에게 검거됐고, 1990년 3월 5일에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승완 호국청년연합회 의장도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ncd=3693388|구속됐다]]. 검찰은 수사 끝에 배후에 [[이택돈]], [[이택희]]가 있었다고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처리했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재수사를 실시했고, [[장세동]] 안기부장의 후원이 있었단 사실을 알아냈다. 검찰은 장세동을 구속해 전두환의 개입여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지만 장세동은 단독행동이라고 주장해 결국 장세동 본인만 형기를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