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중앙아시아사]] [[분류:인도유럽어족]] [[분류:중앙아시아의 민족]] [include(틀:인도유럽계 민족)] ||<-2> 언어별 명칭 || || [[영어]] ||Tocharians || || [[그리스어]] || Τόχαροι || || [[라틴어]] || Tocari || [[파일:QizilDonors.jpg]] [목차] == 개요 == || [YouTube(OB8eeVd7R_M)] || 기원전 2000년경부터 9세기경까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에 거주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으로, [[인도유럽어족]] 계열 언어를 쓰는 민족들 중에서는 가장 동쪽에 거주한 민족이다.[* 흉노 연맹의 스키타이계 [[유목|유목민]] 구성원 제외. 백인종 중에서 가장 동쪽에 살았던 민족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처음 [[중국/역사|중국사]]에 나타나서 [[위진남북조]] 시기의 왕조들 중 하나인 [[후조]]를 건설했던 [[갈족]](羯)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갈족에 대해서는 [[케트족|예니세이어족]] 계통이라는 설과 [[코카소이드]]계는 맞는데 [[중국]] 진출 당시에 이미 [[튀르크]]계에 동화된 이들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제일 동쪽에 살고 있는 인도유럽계 민족은 [[극동 연방관구|연해주, 하바롭스크, 사할린, 캄차카, 추코트카 등과 같은 극동 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이다.] 신장 지역의 [[타림 분지]] 일대의 선주민으로 그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소하공주]] 미라 등으로 미루어보아 꽤 오랜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명인 '토하라'는 [[알란|알란족]]의 언어로 '무사'를 뜻하는 토하르(tokhar)에서 유래한 말로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 측의 기록에서 [[고대 그리스어]]로 '토카로이'라고 불린 것이 다시 [[고대 로마|로마인]]들에 의해 [[라틴어]]로 '토카리'라고 번역되면서 그대로 민족명으로 굳어졌다. 토하라인은 달리, 토하리인, 토카리아인으로 불린다. == 역사 == === 기원 === [[파일:Centum_Satem_map.png]] 파란색 부분은 켄툼어군(Centum) 사용지역, 빨간색 부분은 사템어군(Satem) 사용지역 토하라인의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 중에서는 [[인도유럽조어]]를 쓰던 공통 조상에서 직접 갈라져 나온 부류로 추정되며, [[켈트|켈트족]][* 오늘날의 [[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인]], [[브르타뉴|브르타뉴인]]이 여기에 속한다.]과 [[라틴|라틴족]][*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이탈리아인]] 등이 [[라틴|라틴족]]에 속한다.]과는 공통의 조상을 가진다고 보여진다. 이런 추측은 [[인도유럽어족]]이 [[아르메니아]]에서 기원했다는 [[아르메니아 가설]] 및 [[러시아]]의 [[쿠르간]]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쿠르간 가설]]과도 연결되어 현재 주류 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기원전 3500년경에 처음 발생하여 기원전 2000년경까지 [[타림 분지]] 북부와 [[시베리아]] 일대에 걸쳐 존속한 [[아파나세보 문화]]가 토하라인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실제로 기원전 2000년경의 [[타림 분지]]의 선사 유적지에서 [[타림 미라]]라고 불리는 미라 한 구가 [[하플로그룹]] 조사 결과, 토하라인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명났다. === 초기 역사 === 기원이야 아무튼간에 토하라인은 기원전 2000년경에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간쑤성 서부 일대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했고, 이곳의 선주민이 되었다. 당시 신장 지역의 동쪽에 있는 황허 지역에서는 [[상나라]]가 건국되었고, 토하라인들은 [[강족]]을 통해 상나라와 상당한 수준의 교류를 했다. 그 증거로 당시 [[갑골 문자]]에 기록된 글자인 蜜(꿀 밀)[* 당시의 [[상고한어]]로는 mjit이라고 발음했는데, 이는 고대 토하라어 ḿətə의 차용어다. 그래서 [[벌꿀술]]을 뜻하는 영단어 미드(mead)와 꿀 밀은 어원이 같다.], 城(성 성), 里(마을 리) 등의 몇몇 [[한자]]와 당시의 마차 유물, [[소하공주]] 미라의 존재[* [[소하공주]] 미라의 [[하플로그룹]]을 [[중국]] 연구진들이 분석한 결과, [[코카소이드]]계임이 밝혀졌다.] 등이 그 예다. [[중국인]]들이 역사상 최초로 조우한 기마 민족이지만, 본격적으로 최초로 조우한 기마 유목민은 아니다. 이 시기의 토하라인은 말과 양을 사육하고 [[고대 전차]]를 도입시킨 민족이었을 뿐, 말을 타며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중국사]]에 최초로 등장한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리는 이들로[* [[진시황]]이 이들이 [[진(통일왕조)|진나라]]를 멸망케 할 족속이라고 여겨 [[만리장성]]을 쌓게 했으나, 정작 진나라를 멸망시킨 호(胡)의 정체는 자기 아들 [[호해]](胡亥)였다는 얘기는 매우 유명하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이후에 등장하는 [[동호]][* 이들의 후신이 바로 [[선비족]]과 [[오환|오환족]]이다.]의 전신격의 민족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측의 기록에서 토하라인은 [[차사국]], [[고차국]], [[누란]][*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로 유명한 나라다.] 등의 국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언급된다.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전한]] 대의 기록에 나오는 [[서역]]의 유목민들인 [[오손]]과 [[월지]]가 이들과 동계라는 설도 있다. 다만, 주류 학계는 월지는 몰라도 오손은 토하라계가 아닌 [[인도이란어파]] 계열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토하라계나 [[인도이란어파]] 계열이나 둘 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촌수가 먼 편이다.] 당시 [[한무제]]는 [[흉노]]에 대한 견제와 더불어 부유한 서역과의 무역을 목표로 [[장건]]을 파견하여 토하라계 제국(諸國)과 기타 국가들을 탐험하게 했고, 그 이후인 [[후한]] 시대에는 [[반초]]를 통해 이들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였다.[* 참고로 [[반초]]의 부하이던 [[감영]]이라는 사람이 [[중국인]]으로서는 물론 [[동아시아인]]으로서로도 최초로 [[유럽]]까지 갔다오는데 성공했다. 비록 [[후한]]과 [[고대 로마|로마 제국]] 간의 무역이 성사되는 것을 방해하려던 [[파르티아]]의 훼방으로 인해 로마 영토까지 들어가는 것은 좌절됐으나, 감영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 일반화되어있던 양자세습제도와 공동황제제도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고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비록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중앙아시아 문명과 [[동북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성립되며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 개척된 실크로드를 통해 동북아시아에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했다. === 박트리아 이주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쿠샨 왕조)] === 불교 전래 이후 === [[파일:Tarimbecken_3._Jahrhundert.png]]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고 기원전 1세기경에 토하라인들의 [[쿠샨 왕조]]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하면서 신장 지역에 남아있던 토하라인들의 점차 불교로 개종하게 된다. 이는 토하라인들의 역사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놓는다. 토하라인들에게 전파된 [[불교]]가 서기 1세기경부터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당시 중국 [[후한]] 왕조의 수도인 [[뤄양|낙양]]에 동북아시아 최초의 [[절(불교)|절]]인 [[백마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동북아시아 불교 교리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쿠마라지바]][* 우리나라에는 구마라습이라고 알려졌다. 이 사람이 번역한 [[불경]]들이 오늘날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이 사용하는 불경의 표준이 되었다.]는 토하라계 도시 국가인 [[쿠처]]의 유력자 출신 어머니와 [[카슈미르]]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서기 2세기에는 본격적으로 [[인도인]] 승려와 [[파르티아|파르티아인]], 토하라인 승려들이 대거 중국으로 건너가서 불교의 전파에 힘썼고, 이미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면 난세에 대한 한족 지식인의 염세주의와 유목민 정복 왕조의 진흥 정책[* 유교를 비롯한 중국 전통 사상은 화이관, 중화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유목민 정복 세력들은 유교 대신에 이민족과 한족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불교를 통해 민족 화합을 추구했던 것]으로 [[불교]]가 확고하게 주류 종교로 자리잡는다[* 다만 초창기 시기에 삽질이 좀 있었다.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후한]] 말의 [[불교]] 신자였던 [[착융]]이 서주자사였던 [[도겸(삼국지)|도겸]]의 비호 아래 불교를 앞세워서 온갖 비리를 저질렀는데, [[조조]]가 자기 아버지 [[조숭]]이 도겸의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에 빡쳐서 [[서주대학살]]을 일으키는 등으로 도겸의 세력을 쳐부숴버리자, 그대로 양주자사인 [[유요]]에게로 달아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막 [[원술]]의 산하에서 독립한 [[손책]]이 유요의 세력을 공격하였고, 이를 두려워한 그는 유요를 배신하려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유요]]의 군대가 금방 [[착융]]의 본거지로 쳐들어왔고, 이에 호응하여 봉기한 백성들의 손에 그대로 끔살당하고 말았다(...). 하도 착융이 부정축재 등으로 [[불교]]의 이미지를 망쳐놓은 지라서, [[손책]]의 동생인 [[손권]]이 훗날에 [[오(삼국시대)|오나라]] 황제로 등극하고 불교 진흥 정책을 실시하기까지 [[중국]]에서의 불교 전파는 한동안 지지부진했다.]. 이로써 토하라인들과 [[소그드인]], [[중국인]]들간에는 불교라는 공통점이 생기면서 더욱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유목 왕조들이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 통제에 나서면서 토하라계 국가들의 전성기가 하나둘씩 끝나버렸다.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 [[후량]]이 타림 분지 일대를 침략하면서, 상술한 [[쿠마라지바]] 역시 [[후량]]의 건국자인 [[여광]]에게 모국인 [[쿠차]]가 멸망하면서 온갖 굴욕을 당해야했다. 여광은 이미 출가해서 [[승려]]가 된 쿠마라지바에게 모욕을 주고자, 인질로 붙잡은 쿠마라지바의 친척인 쿠차 공주와의 결혼을 강요하는 등으로 엄청나게 괴롭혔다. 사족으로, 이렇게나 악랄한 성격이었던 [[여광]]은 그 후손들이 자신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라도 한건지, 본인이 세운 [[후량]]이 자기가 죽은 후에 곧장 [[국가 막장 테크]]를 타면서 후량의 황족들은 [[쿠마라지바]] 이상으로 불우한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토하라인들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교역에 힘쓰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데 성공한다. [[전한]]에서 기록을 남길 당시 본래 26~36개에 불과하던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의 도시 국가들이 인도로부터 관개 농업 기술의 도입과 동서 무역 증진으로 인구 부양책이 증가한 덕분에 2배 가까이 되는 55개국으로 증가하였다. 신장 지역 도시 국가들이 중화권에 편입된 데는 같은 토하라계 국가이던 [[사차국]]과 북쪽의 [[흉노]] 때문인 것도 있었다. 이 두 강대국들이 요구하는 조공품의 양이 엄청나서 짓눌릴 지경이던 서역의 도시 국가들이 [[원교근공]] 논리에 따라 [[한나라]]에게로 붙은 것이 서역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한나라]]도 이들로부터 [[조공]]을 받았지만, 한나라를 포함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말로만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조공한다고 말하고는 실제로는 무역을 했기 때문에]] 중국이 형식적으로 왕초 노릇하면서 자국을 명목상의 신하국으로 삼았다고 해서 딱히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외교 정책은 중국의 여러 왕조들의 기본 정책이자,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의 표준이 되어서 [[한국]]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고구려]]나, 한동안 [[몽골]] 초원을 제패한 [[돌궐]]은 물론, 심지어 [[아편전쟁]] 이전의 [[대영제국]] 조차도 무역권을 따내려고 일부러 [[중국]]에 칭신했다.]. 이렇게 중국의 정세에 따라 토하라계 국가들과 중국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서역의 도시 국가들은 크게 번영하였다. 하지만, 8세기경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 마니교의 전파와 멸망 === [[파일:22BE4DA0-1E19-4505-8CDA-34CB1F802878.jpg]] 당시에 [[토번]][* 오늘날의 [[티베트]].]이 [[중앙아시아]]를 침공하면서 [[당나라]]의 지배를 받던 토하라인들은 그대로 토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탈라스 전투]] 이후로 토번 역시 [[우마이야 왕조]]의 뒤를 이어 성립된 [[압바스 왕조]]의 침공으로 대차게 타격을 입으면서 토하라인들의 영역은 [[마니교]]를 믿던 [[위구르족]]이 세운 [[위구르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 역시 [[키르기스족]][* 당시 키르기스인들은 오늘날의 [[하카스인]]과 흡사했다.]에게 멸망하였고, 키르기즈인들에게서 도망친 위구르족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을 정복한 뒤에 그대로 정착하였다.[* 신장 지역이 아닌 [[간쑤성]] 일대에 정착한 위구르인들은 [[유고족]]이 되었다.] 이 당시 위구르의 국교는 [[마니교]]였기에 신장 지역에 마니교가 뿌리내리고 마니교로 개종하는 토하라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토하라인의 [[튀르크]]화가 시작되었고, [[위구르어]]가 [[링구아 프랑카|널리 퍼지고 중요해지면서]] 토하리인의 도시 국가들은 토하리어가 어닌 [[위구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카라한 왕조]]의 서타림분지 영토화로 타림분지의 투르크화가 완료되었다. [[호탄]]을 위시한 타림 분지 서부의 [[샤카족]]은 카를루크인에 급속히 동화되었다. 9세기경에는 토하라어로 된 기록이 더이상 등장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위구르|위구르족]]에게 동화되어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 언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토하라어)] == 문화 == 비록 위에서 언급했듯이, [[동북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기마 [[유목|유목민족]]은 아니었으나, 동북아시아사 최초의 기마민족이었다. 토하라인은 [[중국]]에 [[말(동물)|말]]과 [[마차]], 각종 [[청동기]] 문물을 비롯하여 [[양(동물)]]과 [[밀]]을 처음 소개한 이들이었고, 이들과의 접촉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전쟁에 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됐다[* 다만, 이 시기의 [[말(동물)|말]]은 중무장한 사람이 올라타면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할 만큼 근력이 약했다. 그래서 당시에 전쟁에 말을 동원한 문명은 예외없이 [[전차]]를 이용했다. 당장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일리아스]]에서도 [[헥토르]]나, [[아킬레우스]]같은 수많은 영웅들이 허구헌 날 전차타고 싸우러나가는 것으로 나오는 걸 보면 쉽다. 하지만, 기원전 9세기경부터 [[말(동물)|말]]이 직접 무장 군인의 몸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품종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전차는 그대로 도태되고 말았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기원전 3세기경에나 처음 유목민과 조우했을 만큼, 말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전차가 필요없을 정도로 품종개량한 말도 도입하지 못한 상황이라서, [[진(통일왕조)|진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기 직전에나, 전차가 조금씩 도태되기 시작했다. 당장, [[사기]]의 기록에도 기원전 7세기의 사람인 [[공자]]가 [[전차]]를 잘 몰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증거가 바로 乘(탈 승)이다. 이 글자는 [[상고한어]] 때의 [[갑골 문자]]들 중에도 있었던 글자인데, [[중국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언어학자]]들은 이 글자가 [[토하라어]]로 탈것을 뜻하는 'klenhe'나, '타다, 여행하다'라는 뜻의 'hlänk'를 차용한 어휘라고 보고 있다. 그 이외에도 軌(수레바퀴 궤), 壁(벽 벽), 城(성 성), 里(마을 리) 등의 탈것의 부품이나, 건축과 관련된 용어에 대한 한자들 모두 갑골 문자에서도 확인이 된다는 점에서 모두 토하라어에서 차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와 고대 전차를 도입한 [[중국인]]들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타이카다이어족]], [[몽몐어족]]에 속하는 이웃한 여러 부족들을 정복, 흡수하며 동화시켰는데, 이는 오늘날의 한족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티베트어족]]에게 밀려난 타이카다이어족 민족과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민족들은 오늘날 [[태국인]]과 [[베트남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래서 토하라인들은 이미 [[상나라]] 시대부터 [[중국]]을 비롯 여러 중국티베트어족 민족들과 꾸준한 교류를 했고, 또, 북쪽으로는 [[흉노]], 서쪽으로는 [[오손]], [[월지]] 등과 교류하면서 막대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한편, 동서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동서양 간의 문물 교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는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토하라인 자신들은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뉜 채로, 단 한 번도 단일 토하라 국가를 세운 적이 없었으므로, 예로부터 [[중국]], [[흉노]], [[위구르 제국|위구르]] 등에 계속 시달리다가 [[위구르|끝내 완전히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이는 토하라인들이 정착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이 너무나도 척박한 곳이었던 탓이 컸다. 당장 이곳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더이상 말할 것도 없다]].] 토하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토하라어]]를 표기하기 위한 누란에 정착한 [[인도인]] 이주민들로부터 [[카로슈티 문자]]를 받아들여 사용하기도 했다. 이 문자는 기원전 4세기에 처음 만들어져서 근 800년을 사용하다가 서기 3세기경에 사용이 중단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들어온 [[브라흐미 문자]]도 사용되었지만, 역시 서기 3세기경에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후에는 [[소그드 문자]]에 기반한 [[마니교]] 문자로 대체되었다. 이들이 믿던 종교는 [[불교]]와 [[마니교]]이며, 이 두 종교가 전래되기 전의 고대 토하라인의 신화는 현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 흔적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닌데,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몇몇 [[여신]]들은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섬기던 [[태양신]], [[새벽]]의 여신인 [[https://en.wikipedia.org/wiki/H₂éwsōs|h₂éwsōs]][*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의 기원이 되는 신으로 추정된다.]와 유사하며 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영향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도 토하라어 B에는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섬기던 태양의 여신 swāñco에서 파생된 명사가 있었으며, 토하라어 A에는 고대 튀르크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Gun Ana[* [[터키어]]: Gün Ana, [[키르기스어]]: Күн Эне, [[카자흐어]]: Күн Ана, [[헝가리어]]: Nap Anya, [[사하어]]: Күн Ий̃э, [[카라차이-발카르어]]: Кюн Ана, [[오스만어]]: گون آن][* [[카자흐]]-[[키르기스]] 신화에서는 여신으로 나오며, 생명과 다산, 따뜻함과 건강의 여신으로 가장 강력한 신들 중 하나이다. 불행한 사람들, 특히 [[고아]]들의 [[후견인]]이라고 한다. [[터키어]]에서 태양, 날을 의미하는 Gün하고 관계가 있다.]와 언어적으로 연결된 [[외래어]] koṃ[* 태양 혹은 날이란 뜻으로 토하라어 B로는 kauṃ.]이란 단어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경에 [[불교]]가 [[인도]]에서 발흥한 뒤, [[중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전래되면서 토하라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8세기경에 [[위구르|위구르족]]의 침공 이후로는 [[마니교]] 역시 받아들인 바 있다. 현재 적지 않은 수의 토하라인들의 [[프레스코|프레스코화]]가 남아있기는 하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에 [[이슬람|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무슬림]]들이 이 프레스코화에 대한 [[반달리즘]]을 벌여서 상당수가 제대로 판독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 관련 문서 == * [[누란의 미녀]] * [[소하공주]] * [[인도유럽어족]] * [[아르메니아 가설]] * [[상고한어]][* 원시 [[토하라어]]로부터 전차와 그 부속 등에 관한 단어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 [[쿠샨 왕조]] * [[토하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