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로마 황제]] [[분류:612년 출생]] [[분류:641년 사망]] [include(틀:역대 로마 황제)] ||||<tablealign=center> [[파일:440px-Solidus-Heraclius-sb0764.jpg]] || |||| [[이라클리오스]], '''콘스탄티노스 3세''' 그리고 [[이라클로나스]]가 찍혀있는 솔리두스 [[금화]]. || || '''제호''' ||콘스탄티노스 3세(Κωνσταντίνος Γ', 그리스어/Constantine III, 영어) || || '''휘''' ||헤라클리우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br](Heraclius Novus Constantinus Augustus, 라틴어) || || '''생몰 년도''' ||[[612년]] [[5월 3일]] ~ [[641년]] [[5월 25일]] || || '''재위 기간''' ||641년 [[2월 11일]] ~ 641년 5월 25일 || [목차] == 개요 == 콘스탄티노스 3세는 641년 중 채 100일 남짓 동안 재위했던 황제였다. 그는 헤라클리오스(이라클리오스)와 그의 첫 부인 에우도키아의 적자였다. (다만 첫째 아들은 사생아 요안니스) 콘스탄티노스의 이름은 태어날 때 헤라클리오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로 지어졌고, 이후 쭉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 [* 이후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약어로도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대 역사서에 표준이 되었다. 수도의 창건자이고, 11세까지 쓰였으니까. 참고로 그 다음 많이 채택된 황제명은 요안니스와 미하일로, 둘 다 8세까지 쓰였다.] 공식적인 제국의 명명법의 관점으로는 그의 아들 콘스탄스 2세가 더 '콘스탄티노스' 3세로 어울릴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콘스탄티노스는 원래 이름이 '이라클라오스(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노스'였기에 원래대로라면 아버지와 똑같이 '이라클리오스', 즉 '''이라클리오스 2세'''를 황제명으로 삼아야 했으나,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그 전에 활약이야[* 그래서 땅하고 [[성십자가]]를 찾고 딱 타이밍 좋게(...) 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If론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큰 땅을 잃은 [[존 왕|실지(失地)황제]]'''로 황제 커리어를 마감하고 죽었기에 이라클리오스라는 이름을 차마 쓸 수가 없어 버리고 그 뒷이름인 콘스탄티노스로 황제명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생애 == 콘스탄티노스는 613년 1월 22일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촌 니케타스(Nicetas)의 딸, 즉 6촌 누이와 약혼했다. 사실 이 부부는 족보상으로 [[근친상간]]에 속했지만... 아빠도 근친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충 넘어갔다. 거기에 아버지 이라클리오스가 조카 마르티나랑 결혼하면서 온갖 비난을 탱킹한 점도 있다. ~~그야 같은 근친이라도 [[조카]]-[[삼촌]](말 그대로 3촌관계) vs [[육촌]]의 차이도 크니까 ~~ 콘스탄티노스와 그레고리아는 629년, 또는 630년에 결혼을 했으며 그해에 첫 아들 콘스탄스, (이후 콘스탄스 2세)를 낳는다. 둘째역시 아들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테오도시우스였다. 콘스탄티노스 부부는 이후 딸도 한명 낳는데, 이 딸, 마얀(Manyanh)은 이후 사산왕조의 마지막 황제가된 야즈네게르드 3세와 결혼한다. 641년 아버지가 죽자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로 즉위한다. 콘스탄티노스는 단독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하고[* 공동통치가 아버지의 유지였다. ~~[[콩가루 집안]]을 조장하는 아버지, 할 만큼 했지만 아랍한테 어이 없게 찾은 땅 다 뺏기고 한을 품어서 '''다 망해버려라'''하고 삐뚤어지셨나(...)~~] 아버지 이라클리오스의 두번째 부인이자 본인의 사촌인 마르티나의 아들(...) 이라클로나스와 공동통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위기간이 짧은 왕들#s-2.1|세 달 만에]] [[결핵]][*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독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다. 실제로도 세 달 전에 먼저 죽은 아버지 입장에서, 저렇게 금방 따라 죽을 것 같았으면 아예 황제 자리를 맡기지 않았을 법 하다.]으로 [[요절/목록#s-2.3|29세]]로 [[요절]]하였다. 제위[* 공동 황제를 맡고 있었다고 했지만, 좁은 의미의 제위는 당연히 선임 황제, 즉 정제(正帝 : Augustus)위를 의미한다.]는 후임 황제인 [[이라클로나스]] ~~위의 근친의 결과물, [[개족보|이복동생 겸 5촌조카]](...)~~가 이어받았지만, 원래 근친혼으로 시민들과 종교계로부터 인기가 없는 모자라 그런지 몇 달 못 버티고 이 콘스탄티노스의 아들인 [[콘스탄스 2세|또 다른 콘스탄티노스]]에게 공동황제를 허용한 후 결국 뺏겼다. 여기에다가 그는 코가 잘렸고 어머니 마르티나는 혀가 잘린 후 사이좋게(...) [[로도스 섬]]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이런 일련의 절차에는 언뜻 유명무실해 보이던 콘스탄티노플 [[원로원]] 의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하튼 여기에는 콘스탄티노스의 복안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 몇 달 안 되는 사이에 자기 쪽 측근인 발렌티누스를 동부군 사령관으로 심었고 그가 그 해 9월 ~~[[고대 로마|조상님들의]] [[네 황제의 해]]라는 [[반어법|좋은 전통]]을 [[이라클리오스 왕조|저희 집안 내에서]] [[콩가루 집안|구현해 보았습니다!]]~~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복위를 이끌었다. 하지만 발렌티누스는 딸을 새 황제에게 시집보내고 실권자가 된 후 야심을 품어 2년 뒤 공동황제위[*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의하면] 혹은 제위 자체(즉 찬탈)[* 영어 위키백과에 의할 경우 : [[https://en.wikipedia.org/wiki/Valentinus_(usurper)|Valentinus_'''(usurper)(찬탈자)''']]]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다가 성난 수도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