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위치한 [[칠중성]](七重城)에서 [[고구려]]와 [[신라]] 간에 있었던 전투. 칠중성은 본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때 신라에 편입되었다.[* 인근 [[감악산]]에 있는 [[감악산비]] 비석은 문장이 풍화로 소실돼 확실하진 않지만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 때 북한산과 함께 중부지방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여겨 왕이 행차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다만 [[진평왕]] 시대의 순수비라는 설도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2964452|#]]] [[임진강]] 중류의 남쪽 강가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어서 고구려가 남쪽으로 쳐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고 신라 입장에서는 핵심 방어선 중 하나였다. 이 칠중성 산성에 국한된 전투는 아니었지만 훗날 [[나당전쟁]]의 [[매소성 전투]], 그리고 [[6.25 전쟁]]의 [[고랑포 전투]]와 [[설마리 전투]]도 이 곳 근처에서 벌어졌을 정도로 시대를 넘나드는 남북의 군사요충지가 파주 칠중성이었다. == 제1차 칠중성 전투(638년) == ||<-3><tablewidth=350><tablealign=right><#C0C0FF><:> {{{+1 '''칠중성 전투[br]七重城 戰鬪'''}}} || ||<:><#C0C0FF> '''시기''' ||<-2>[[638년]] 10월 ~ 638년 11월 || ||<:><#C0C0FF> '''장소''' ||<-2>[[경기도]] [[파주시]] 칠중성 || ||<:><#C0C0FF> '''원인''' ||<-2>[[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고구려]]가 되찾기 위함 || ||<:><width=10%><#C0C0FF> '''교전국''' ||<width=20%>{{{+1 고구려}}} ||<width=20%>{{{+1 신라}}} || ||<:><#C0C0FF> '''지휘관''' ||<^|1>지휘관 미상 ||'''[[알천|알천(閼川)]]''' || ||<#C0C0FF><:>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 ||<#C0C0FF><:> '''피해''' ||다수 사상(殺虜甚衆) ||피해 규모 불명 || ||<:><#C0C0FF> '''결과''' ||<-2>고구려의 한강 유역 수복 실패. || 638년 음력 10월 겨울, 고구려 군대가 신라의 칠중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6세기에 한강 유역을 잃은 뒤에도 [[온달]] 장군이나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한강 유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등 한강 유역 수복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칠중성의 신라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고, [[선덕여왕]]은 [[대장군]] [[알천]]에게 명해 동요한 백성을 안정시키게 했다.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대와 맞붙어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clearfix] == 제2차 칠중성 전투(660년) == ||<-3><tablewidth=350><tablealign=right><#C0C0FF><:> {{{+1 '''칠중성 전투[br]七重城 戰鬪'''}}} || ||<:><#C0C0FF> '''시기''' ||<-2>[[660년]] 10월 ~ 11월 || ||<:><#C0C0FF> '''장소''' ||<-2>[[경기도]] [[파주시]] 칠중성 || ||<:><#C0C0FF> '''원인''' ||<-2>[[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고구려]]의 보복([[백제부흥운동]] 지원, 신라 견제) || ||<:><width=10%><#C0C0FF> '''교전국''' ||<width=20%>{{{+1 고구려, 말갈}}} ||<width=20%>{{{+1 신라}}} || ||<:><#C0C0FF> '''지휘관''' ||<^|1>지휘관 미상 ||'''필부(匹夫)'''[[전사|†]][br]'''비삽(比歃)'''[[배신|←]][br]본숙(本宿)[[전사|†]][br]모지(謀支)[[전사|†]][br]미제(美齊)[[전사|†]] || ||<#C0C0FF><:>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 ||<#C0C0FF><:>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절반 이상이 죽고 부상 || ||<:><#C0C0FF> '''결과''' ||<-2>고구려의 승리. [[북한산성 전투]]로 이어진다. ||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동맹]]에 대항해 [[백제]]와 고구려는 [[여제동맹]] 관계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여제동맹이 실질적인 동맹관계가 과연 맞는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660년 8월 백제의 멸망은 나당연합군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고 고구려의 안보에도 나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직후 옛 백제 땅에서는 [[귀실복신]] 등이 일어나 [[백제부흥운동]]이 진행되었고, 고구려는 백제 멸망의 보복으로 신라 북측을 공격해 백제 전선에 있던 신라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나아가 과거 신라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까지 조금씩 되찾으려 했다. 660년 10월 고구려군이 칠중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칠중성 성주는 [[필부]](匹夫)였는데, [[태종 무열왕]]이 충성스럽고 용맹한 인재로서 [[백제]], [[고구려]], [[말갈]]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 유능한 인재를 수소문해 직접 앉힌 뛰어난 장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에 맞서 필부는 약 20일 간 수성전을 펼쳤다.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사기가 높아 함락시킬 수 없겠다며 포위를 풀고 철군하려 했는데, 고구려와 내통한 대나마(大奈麻) [[비삽]](比歃)이 몰래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칠중성]] 안의 식량이 떨어졌고 힘이 다했으니 다시 공격한다면 항복할 것이라고 알렸다. 고구려군이 이에 다시 칠중성을 공격했고, 필부는 전말을 눈치채고 비삽의 목을 베어 성 밖에 던졌다.이에 성 내 군사에게 고하기를, >“충신과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굽히지 않는다. 힘써 노력하라! 성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있다.” 이에 병든 사람까지 모두 일어나 성에 올라 싸웠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바람을 타고 [[화공]]을 하며 공격해 왔고, 병사의 기세가 피로하고 지쳐서 죽고 부상당한 자가 절반이 넘었다. 필부 등은 상처로 피가 흘러 뒤꿈치를 적실 정도까지 활을 쏘며 싸우다 죽었고 무열왕은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필부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했다. == 제3차 칠중성 전투(673년) == [[고구려부흥운동]]군과 [[당나라]]의 전투. [[이근행]]의 당군이 고구려부흥군을 격파했다. 남은 고구려인들은 신라로 망명해 9서당에 흡수되어 당나라와 싸웠다. == 제4차 칠중성 전투(675년) == [[나당전쟁]] 당시 신라군과 당, [[거란]], [[말갈]] 연합군의 전투. 칠중성을 포위했는데 신라군은 지방 장관인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당군을 격퇴했다. == 제5차 칠중성 전투?(1951년) == [[설마리 전투]] 항목 참조 == 관련 문서 == * [[삼국통일전쟁]] [[분류:공성전]][[분류:삼국통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