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29176e><#29176e> '''{{{#ffd800 역임 지위}}}''' || ||<bgcolor=#fff,#1f2023>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 [include(틀:아관파천)]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7B68EE>'''[[누동궁#s-4|{{{#FAFAD2 누동궁의 역대 종주}}}]]''' || ||<width=30%><rowbgcolor=#fff,#191919> 2대[br][[영평군 이경응]] || → ||<width=30%><bgcolor=#7B68EE> '''{{{#FAFAD2 3대[br]청안군 이재순}}}''' || → ||<width=30%> 4대[br][[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 애초에 청안군 이재순의 뒤는 [[풍선군]]이 이을 예정이었으나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 풍선군의 양아들인 이해승이 물려받았다.] ||}}} || ---- ||<-2> {{{#!wiki style="margin:-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7054c, #29176e 20%, #29176e 80%, #07054c)" '''[[궁내부|{{{#ffde09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29176e><tablebgcolor=#29176e><colcolor=#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 누동궁 2대 사손[br]{{{+1 청안군 이재순}}}[br]淸安君 李載純'''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00b528105.png|width=100%]]}}} || ||<width=20%> '''군호''' ||<colbgcolor=#fff><(> 청안군(淸安君) || || '''이름''' ||<(> 이순달(李順達) → [[이재순]](李載純) || || '''자''' ||<(> 덕일(德一) || || '''시호''' ||<(> 문충(文忠) || || '''출생''' ||<(> [[1851년]] [[10월 24일]] || || '''사망''' ||<(> [[1904년]] [[3월 2일]] (향년 52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관료이다. [[사도세자]]의 3남[* 서장남] [[은언군]]의 양[[증손|증손자]], [[전계대원군]]의 양[[손자]], [[영평군(1828)|영평군 이경응]]의 [[양자(가족)|양자]], 조선 25대 임금 [[철종(조선)|철종]]의 양[[조카]]이다. 전계대원군의 [[종가|종가(宗家)]]인 [[누동궁]]의 2대 봉사손이자 3대 종주이다.[* 위 틀에 나와있는 대수(代數)와 차이가 나는데 [[누동궁]]의 종주 자체는 [[전계대원군]]부터고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은 [[영평군(1828)|영평군 이경응]]부터다. 그래서 1대 씩 차이가 난다.] == 초기 생애와 가계 == 1851년([[철종(조선)|철종]] 2년) 10월 24일,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인 음직 부사 이휘응(李徽應)[* 후일 판서로 추증받았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창군|경창군 이주]] - 창흥군 이수 - 고평부정 이철(생부는 경창군의 장남 창원군) - 연은군 이부 - 이기빈 - 이경 - 이유일 - 이명초 - 이도극 - 이휘응 - '''청안군 이재순'''.] [[조선]] [[왕실]] 직계와는 200년 ~ 300년 전에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원래는 단순히 [[왕실]]의 후손이었을 뿐, [[왕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철종(조선)|철종]]의 형인 [[영평군(1828)|영평군]]이 병이 있어 더 이상 자녀를 못낳았기 때문에[* [[부인]]을 둘을 두었지만 첫 부인은 후손없이 요절. 두 번째 부인도 [[딸]] 하나만 두었고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했다.] 1864년([[고종(대한제국)|고종]] 1년) 9월에 영평군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했고 이름도 이재순으로 [[개명|고쳤다.]][* 《고종실록》 1권, 고종 1년 9월 21일 기미 3번째 기사를 보면 '1864년 청 동치(同治) 3년 종친부에서 영평군의 뒤를 잇는 사람으로 이순달을 정했다고 보고하다 : 종친부(宗親府)에서 아뢰기를, "영평군(永平君)의 계후(繼后)에 대한 일로 유지(有旨)를 받들어 여러 파(派)를 상세히 조사한 다음 선조(宣祖)의 아홉째 왕자(王子)인 경창군(慶昌君)의 9대손 이신휘(李愼徽)[* 1868년(고종 5년) [[흥선 대원군]]의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휘응(李徽應)으로 개명했다.]의 아들인 이순달(李順達)로 돈정(敦定)했습니다. 예사(禮斜) 등의 절차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했다.' 라고 적혀있다.] == 양자 입적 이후 ==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68년([[고종(대한제국)|고종]] 5년)에 [[왕족]]에게 실시하는 특별 [[과거 제도|과거]]인 종친정시문과(宗親庭試文科) 을과로 급제하여 같은 해 4월 11일 [[홍문관]] 부교리[* 弘文館副校理, [[조선시대]] 홍문관에 두었던 종5품 관직.]를 거쳐 헌납(獻納)을 지냈다. 그리고 이후 부사과(副司果)[*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종6품 서반 무관직.]와 교리(校理)를 지낸 뒤 종친부정(宗親府正)을 역임했다. 그 뒤로도 고위직을 많이 맡았다. 집의(執義)를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 부호군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총장 급. 단 성균관의 당시 위상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급이었다.]을 역임했다. [[갑신정변]] 당시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받았다. 그 외에도 종정경(宗正卿), 이조참판(吏曹參判), 그리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대통령 비서실장]] 급.], 한성부 판윤[*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급.], 예조[* 지금의 [[대한민국 교육부]],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급]와 형조판서[* 지금의 [[법무부장관]] 급]을 맡았다. 1895년(고종 32년) 5월에는 시종원경 겸 시종장(侍從院卿兼侍從長)[* 임금을 호위하는 직책이다. 지금의 [[대통령경호실장|대통령 경호실장]] 급.]으로 제수받았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한 역사적 사건과 엮인다. [[이범진]], [[이완용]] 등과 함께 친일 정권을 타도하고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경복궁]] 밖으로 옮기려다 실패한 사건, '''[[춘생문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대부분의 가담자들과 함께 체포당했다. [[태형]] 100대, [[징역]] 3년의 형을 받았으나 [[왕족|종친]]이었던 까닭으로 3년의 징역을 면제받고 3년 간 향리방축[* 鄕里放逐.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 [[유배]]보다는 가볍다.]되는 벌을 받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잃으면서 [[사면]]받았다. 이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을 거쳐,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과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등을 역임했다. 1899년([[광무]] 3년) 5월에는 육군 부장(副將)[* 정2품 지금의 참모총장 급.]이 되고 표훈원 의정관(兼任表勳院議政官)[* 표훈원은 포장 · 외국훈장의 수령, 패용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다.]을 거쳐 군부대신 대리를 맡았다. 그리고 그 해에 법적 [[고조#s-2|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이에 황제의 4대손은 황족으로 대우한다는 예법에 따라 청안군(淸安君) 군호를 받았다.[* 군호는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에서 유래했다.] == 사망 == 1904년([[광무]] 8년) 3월 2일 오전 1시에, 오랜 [[질병|병고]] 끝에 향년 52세로[* [[세는나이]] 54세.] [[죽음|별세]]했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 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 47-1번지 [[북한산]]의 지산 이말산에 처음 묻혔다가 1980년 경에 [[전계대원군]]과 [[회평군]]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현재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로 [[이장#s-2|이장]]되었다. == 여담 == * 아마 '''한국인 최초로 [[동영상]]을 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1899년([[광무]] 3년)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가 들여왔다는 것이 정설인데, 이 때 휴대용 촬영기와 [[영사기]]를 이용해 찍은 [[한성부|서울]]의 모습을 제일 처음 보았기 때문.[* 이 때는 동영상과 영화를 활동사진으로 불렀다.] 이 새로운 문물에 감탄한 청안군은 [[황제]]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동영상의 존재를 소개했다. * 1898년(광무 2년) 당시 [[러시아 제국|러시아]] 공사였던 마튜닌은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김홍륙#s-2.2|김홍륙 독차 사건]]의 [[배후]]로 청안군을 지목했다. 단, 그가 배후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1015021001|#]] * 한국 최초의 근대적 [[담배]] 제조 회사인 [[주식회사]] '향연합자회사(香煙合資會社)'를 세웠으며, [[사장]] 재직 시절 만든 [[궐련]]을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에게 바친 적이 있다. * [[덩치]]가 커서, [[외국인]]들은 그를 'Fat Prince', 즉, '뚱보 공(公)'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 특이하게도 상당히 심한 [[고양이]] [[공포증]]이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 체류했던 미국인 외교관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1874~1946)가 쓴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 관련 일화가 나와있다. > [[고종(대한제국)|황제]]의 [[삼촌]][* 저 당시는 [[고종(대한제국)|고종]] 재위기라 저기서 말하는 [[황제]]는 고종인데, 후술하겠지만 고종과 청안군은 [[족보]] 상 [[8촌]] '''[[형제]]''' 관계로, [[삼촌]]이라 쓴 것은 [[오류]]이다.] '뚱보 공'이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며 '이 [[어린이]]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당황한 [[내시]]들과 손에 [[고양이]]를 품은 아기([[영친왕]])가 뛰어 들어왔다. 나는, 고양이가 그를 불행하게 만든다며 고양이를 너무도 싫어하는 뚱보 공의 [[약점]]을 알게 되었다. [[공사관]]의 [[만찬]]에서도 비록 그가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느끼고 있던 [[커튼]] 뒤에 숨어 있는 고양이 때문에 다시 그가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오해 === ||<table width=550>[[파일:46580b3b35893.jpg|width=100%]] || 한 때 청안군의 [[사진]]이 [[흥선대원군]]의 서장자인 [[완은군|완은군 이재선]]의 사진으로 잘못 알려졌다. 아마 당시 [[외국인]]들이 청안군의 이름 이재순의 '''순'''을 ''''Sun''''과 ''''Soon''''을 혼동해서 표기했고 이 와중에 ''''Sun''''을 ''''순''''이 아닌 ''''선''''으로 잘못 읽어 이런 오해가 빚어진 것 같다. ||<table width=1000>[[파일:46580b50029ea.jpg|width=100%]] || [[파일:46580b66279d5.jpg|width=100%]] || 하지만 다른 사진들을 보면 확실하게 ''''Soon''''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맨 윗 사진 설명문에는 1890년에 촬영했다고 나와있는데 [[완은군|완은군 이재선]]은 1881년(고종 18년)에 안기영의 난으로 [[사사#s-2|사사]]당했기에 사진을 찍을래야 찍을 수 없다. 그리고 밑에서 첫 번째 사진에 해당 인물에 대한 설명이 'Cousin of King' 으로 나와있다. 그래서 더더욱 [[완은군|이재선]]은 저 사진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비록 [[이복형제]]라 해도 엄연히 [[흥선대원군|아버지]]가 같은 형제를 'Cousin' 으로 쓰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 'Cousin'은 단순히 [[사촌|4촌]] 뿐 아니라 다른 [[방계]] 혈족의 [[형제]] 뻘을 이르는 단어로도 쓰이며 [[족보]] 상 [[고종(대한제국)|고종]]과 [[8촌]]인 청안군 이재순은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저 사진들의 인물은 청안군 이재순이다.[* 오른쪽 [[사진]] 설명을 보면 이재순이 [[손자]]들과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이재순은 친손자가 없는데 어떻게 '손자들'과 찍었을까? 여기에 나오는 손자들은 양손자인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과 그의 친생가 형제이다.] == 매체에서 == * [[문피아]]에서 연재 중인 [[대체역사물]] [[웹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중국 대륙]] 내에 있는 번국 [[월나라]] [[왕]]에 임명된 것으로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중원#s-5|항목 참조]]. == 후손 == '''[[입양]] 릴레이''' [[영평군(1828)|양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친자식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소현세자]]의 8대손 이재철의 [[아들]] [[풍선군|이한용(李漢鎔)]][* 1907년 풍선군(豊善君)으로 추증. 청안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는 23촌이다.]을 입양했지만 1890년 16세로 사망했다. 요절했기에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풍선군의 양자로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해승을 데려와 입적시켰다.[* 1908년 청풍군(淸豊君)으로 책봉. 근데 눈여겨 볼 건 이미 이 전에 이해승의 직계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입양이 되었단 점이다. 실제 혈통 상으로는 무려 '''[[월산대군]]의 후손'''. 그래서 청안군과는 실제 혈통 상으로 '''32촌''', 풍선군과는 '''33촌'''이다. ] 그래서 [[영평군(1828)|영평군]] - [[청안군(1851)|청안군]] - [[풍선군]] - [[청풍군(1890)|청풍군]]까지는 전부 [[입양]] 관계인 셈.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의 자녀들부터는 진짜 친자식들이다.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지만 아들 둘은 [[8.15 해방|해방]] 전에 [[참척|자신보다 먼저 죽었고]] 그 자신도 1950년 [[6.25 전쟁]] 때 [[실종|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장손이 바로 그랜드힐튼 서울의 이우영 명예 회장. 즉 청안군의 후손이 현재 그랜드힐튼 서울 오너 일가이다.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누동궁 종주]][[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조선의 반란자]][[분류:사면된 인물]][[분류:1851년 출생]][[분류:1904년 사망]][[분류:온건개화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