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채영(蔡永) || || 이명 ||채영(蔡英) || || 생몰 ||[[1881년]] ~ [[1926년]] || || [[출생지]] ||[[경성부]] || || 사망지 ||[[러시아]] 포그라니치나야역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채영은 1881년생이며 경성부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13 용정 독립만세시위 후 결성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총부(總部)에 배속되어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비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9월 만주 훈춘(琿春)에서 홍범도(洪範圖)·이용(李鏞)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 산하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국내 진공 계획을 세웠다. 또한 1920년 초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강국모(姜國模)·한희진(韓熙鎭) 등과 함께 대한국민혈성단(大韓國民血誠團)을 조직하고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3월 연길현 하마탕에서 북간도 동부와 훈춘, 러시아의 각 독립단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자 [[홍범도]], [[구춘선]], [[이범윤]], [[황병길]] 등과 함께 참석하여 각 독립단의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1921년, 채영은 러시아의 원조하에 한인 연합 부대인 고려혁명군단(高麗革命軍團)에 참여하여 고려혁명군사관학교(高麗革命軍士官學校)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해 6월 [[자유시 참변]]이 발생할 당시에는 혈성단을 이끌고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참여하여 참모부원으로 러시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후 만주로 피신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고 1924년 상하이에서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러시아 우수리스크 연변의 이만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1926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인 포그라니치나야 역에서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채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881년 출생]][[분류:192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