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97200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창덕궁 희정당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편전)] ---- ||<-5><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bg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width=30%> 814호 ||<|2> ← ||<width=30%> '''815호''' ||<|2> → ||<width=30%> 816호 || || [[창덕궁 선정전]] || '''창덕궁 희정당''' || [[창덕궁 대조전]] || ---- }}}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315288><tablebordercolor=#315288><bgcolor=#fff>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15호}}}]]''' || ||<-2> {{{#fff {{{+1 '''창덕궁 희정당'''}}}[br]{{{-1 昌德宮 熙政堂}}}}}}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덕궁 희정당, 너비=100%, 높이=100%)]}}}|| ||<width=80> '''{{{#fff 소재지}}}''' ||<bgcolor=#fff>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 || || '''{{{#fff 분류}}}''' ||<bgcolor=#fff>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 ||<bgcolor=#fff> 1동 || || '''{{{#fff 지정연도}}}''' ||<bgcolor=#fff>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bgcolor=#fff> [[조선시대]], 1405년 창건, 1920년 중건 || [목차] [clearfix] ---- || [[파일:희정당.png|width=100%]] || || 희정당 사진 || || [youtube(RUpwL7XlTIE)] || [youtube(cP_WLzLaPjI)] || ||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희정당 동영상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희정당 동영상 || ---- == 소개 == {{{+1 昌德宮 熙政堂}}}[* ‘熙政堂’ 으로 많이 쓰는데 [[조선왕조실록]] 및 기타 당대의 기록들을 보면 ‘凞政堂’으로 적혀 있다. 둘 다 똑같은 ‘빛날 희’자에 모양이 비슷하여 동자이체, 즉 다른 모양이지만 같은 글자로 여겨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현재 희정당 현판도 ‘熙’로 되어있으니 '熙政堂'도 맞다.] [[창덕궁]]의 건물이다. '희정(熙政)'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치(政)를 빛낸다(熙)’는 뜻이다. [[인조]] 시기 지제교[* 知製敎. 조선시대 왕이 내리는 교서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직.] 채유후는 희정당 상량문[*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에 ‘희(凞)’는 ‘밝고 넓다’는 의미를 본 딴 것이라 하면서, “[[정사]]를 밝혀 [[백성]]을 접하니 백성이 [[충성|충정]]을 다하고, 정사를 넓혀 백성을 [[구제]]하니 혜택을 입지 않은 백성이 없다는 뜻으로 ‘희정(凞政)’이라 이름했다.”라고 뜻을 풀이했다. == 희정당의 용도 == 희정당의 용도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현재 [[정설]]은 [[왕]]의 침전인 [[대전]]이었다가 [[조선]] 후기 들어 나랏일 보는 편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며 대부분의 [[자료]]들도 그렇게 소개한다. 그러나 처음에도 대전으로 사용했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부분들이 있다. [[건물]]의 [[이름]]부터 그렇다. [[전통]] 건물의 경우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 및 용도에 따라 이름이 정해진다. 높은 위치부터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순으로 나간다. 즉 ‘전(殿)’이 가장 높으며 ‘당(堂)’이 그 다음 [[서열]]이다. 그런데 [[창덕궁]]의 [[대전|중궁전]]으로 알려진 곳은 대조전이다. '''[[왕비]]의 침전이 ‘전(殿)’을 쓰는데 왕비보다 더 높은 [[임금]]의 정식 침전이 ‘당(堂)’이다? 이는 [[하극상|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물론 [[왕]]도 당을 쓸 수는 있다.[* 왕은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그 어떤 것도 쓸 수 있지만, 반대로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왕]]과, [[왕비]], [[대비]]와 [[상왕]]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전(殿)’은 절대 쓸 수 없었다. [[세자]]도 못쓰는...게 원칙이나 [[창경궁 저승전]]과 [[경희궁 승휘전]]의 예를 보듯이 아주 안 쓰지는 않았다.][* 왕이 기거하던 곳으로 전이 아닌 당을 쓴 대표적인 경우는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 내의 장안당이 있다. 단, 명성황후가 머물던 처소는 '당'보다 한단계 낮은 '합'을 쓴 곤녕합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왕비도 그에 맞추어 정식 처소의 이름을 당으로 써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건물]] 양식도 그렇다. 보통 일반적으로 정식 침전의 건물은 출입하는 칸의 [[마루|툇마루]]가 밖으로 나와 [[현관]]처럼 되어있고 [[온돌|온돌방]]이 [[대청]]을 기준으로 좌, 우에 있다. 그러나 희정당의 경우 그렇지 않으며 [[지붕]]에 용마루가 존재하는데 이 역시 메인 침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설은 [[왕]]의 침전의 경우, 용(=왕)이 계신 곳 위에 불경스럽게 또 [[용]]이 누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기에 만들지 않았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국|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고 때문에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덕수궁|경운궁]]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또한 [[연산군]] 때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꿀 당시 [[신하]]들이 반대하면서 ‘여기서 '''정사를 들을 뿐만 아니라''' 글을 닦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란 말을 한 기록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212008_002|#]] 이미 [[조선]] 초에 편전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궁궐지》에도 '[[창덕궁 대조전|대조전]] 남쪽에 있고 '''편전으로 시사를 하는 처소'''”라 적혀있다. 그렇다하여 단순하게 편전 기능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희정당을 ‘협양문내선정전동(協陽門內宣政殿東) '''연침'''접군신지소('''燕寢'''接君臣之所)’, 즉 [[창덕궁 협양문|협양문]] 안 [[창덕궁 선정전|선정전]] 동쪽에 있는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연침'''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연침은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공간으로 주로 침전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일련의 자료들을 종합했을 때, 희정당은 ''''일상생활도 영위했던 편전''''으로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 역사 == 1405년([[태종(조선)|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숭문당(崇文堂)으로 부르다가 1496년([[연산군]] 2년) 12월에 희정당(凞政堂)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인경궁]] 화정당을 옮겨 재건했다. [[순조]]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835년([[헌종(조선)|헌종]] 1년)에 재건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또 다시 불타 사라졌다. 1920년에 복구했는데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 지었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본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 정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협양문)] *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 구조 == === 조선시대 희정당의 모습 === * 1647년([[인조]] 25년)에 만든 《창덕궁수리도감의궤》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이었다. 또 동 · 서 양쪽에 [[온돌|온돌방]]이 6칸, 중앙과 전면에 걸쳐 [[마루]] 9칸으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봉반자와 지반자[* 반자란 천장을 가려서 만든 구조체를 말한다.] 등이 갖춰있었다. 또한 앞 면 한 칸 폭을 긴 [[암석|돌]] 기둥으로 띄워놓고 내부는 마루로 마감했는데 그 뒷부분부터는 [[온돌]] 설치를 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우지 않고 바닥 기초를 쌓아 올린 다음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 정면 출입문을 서쪽의 1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 전부에 두고 그 앞에 [[나무]]로 만든 [[계단]]을 놓아 출입할 수 있게 했다. 1828년 경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동궐도|동궐도(東闕圖)]]》를 보면 동쪽 측면에 가퇴를 설치하여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1833년에 불타고 다시 지은 희정당의 모습은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평면이 정면 5칸, 측면 3칸, 전체 15칸으로 규모와 겉 모습은 이전과 같다. 하지만 내부는 앞면 5칸에 [[마루]]가 깔리고 뒷면 가운데 3칸의 툇마루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방]]으로 적혀있어 [[인조]] 때 지었던 희정당과 내부가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 [[파일:동궐도 희정당.png|width=100%]] || || [[동궐도]]의 희정당. 왼쪽이 [[동아대학교]] 소장본, 오른쪽이 [[고려대학교]] 소장본이다.[br][[아궁이]]와 선례문 및 기타 협문, 그리고 바닥면과 가퇴를 받치는 석축 등 세세한 부분에서 [[묘사]]의 차이가 있다. || * 위 그림에서 보듯 [[건물]] 동편에 사각형 모양의 [[연못]] 하월지(荷月池)를 만들어 주변을 한껏 운치있게 했다. * [[대한제국]] [[순종(대한제국)|순종]] 시기 혹은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앞면 돌 기둥들 사이를 [[전통]] [[벽돌]] 장식으로 메꾸었고 그 한가운데엔 무늬로 형상화된 [[한자]]를 새겼다. 출입문에 있던 나무 계단도 전부 없어지고 대신 중간의 1칸만 출입이 가능하게 한 뒤 돌 계단으로 변형했다. 바뀐 시기가 [[순조]] 이후 재건할 때인지, 아니면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에서 머물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순종 시기에 바꾼 게 확실한 것은 희정당 앞에 있던 수많은 전각들을 없애고 정문의 모습을 솟을대문 세 칸으로 개조한 것이다. || [[파일:순종이 살던 당시 창덕궁 희정당.png|width=100%]] || [[파일:화재 이전 창덕궁.png|width=100%]] || ||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살던 당시 희정당.[br]1907년에서 1917년 이전의 모습으로 보인다. || [[일제강점기]] 1917년 이전 [[창덕궁]] 내전 일곽 촬영사진. 정면에 보이는 솟을대문 뒤에 바로 보이는 지붕이 희정당이다. || === 1920년 이후 재건한 희정당의 모습 === * 앞서 말한 것처럼 1917년 이후 희정당이 불타고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다 다시 지으면서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우선 [[누]][[마루]]가 완전히 사라지고 긴 [[암석|돌]]들로 쌓은 5단짜리 기단 위에 [[건물]]을 올렸다. 또한 아담했던 15칸 짜리 [[건물]]이 정면 11칸, 측면 5칸, 총 55칸의 거대한 건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희정당 옆에 있던 연못 하월지도 없앴다. 그렇다고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모습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다. ‘골격은 [[조선|조선식]]으로 하되 나머지는 [[서양|서양식]]을 참조’하자는 [[조선총독부]]의 기본 방침에 따라 이건되면서 크게 변했다. 우선 용마루가 없던 강녕전 건물에 용마루를, 그것도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고 정면 가운데 3칸의 툇간은 원래 밖으로 드러나 있던 것을 변형시켜 전면에 문짝을 새로 달았다. 그리고 동남쪽 측면에 있던, 원래 연생전과 통하기 위해 [[복도]]와 이어졌던 문짝도 창호문에서 [[나무]] 판으로 바꾸어 달았다. 또한 문에 붙은 창호지를 없애고 대신 [[유리]]를 덧대었다. ||<table width=662>[[파일:희정당 정면.png|width=100%]] || || 희정당 본채 정면 || * 동, 서, 남 행각과 [[건물]]을 하나로 연결했으며 남쪽 행각에 [[서양]]에서 쓰던 [[현관|돌출현관]]을 두 개를 만들었다. 그 중 희정당 뜰로 연결되는 출입문 현관에 포치(porch)[* [[건물]]의 입구에 [[지붕]]을 갖추어 차를 댈 수 있게 한 곳.]를 두어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낙양각과 [[조선]] [[왕실]](당시 [[왕공족|이왕가]])의 상징 [[이화문|오얏꽃]] 문양을 달았는데 포치 하단의 돌기둥은 [[일본|일본식]]으로 만들었다. ||<table width=662>[[파일:희정당 현관.png|width=100%]] || || 희정당 현관 || * 내부 역시 상당히 변하여 원래 [[마루|대청]]였던 곳을 응접실로 개조했고, 서쪽의 [[온돌|온돌방]]을 접견실, 회의실로 만들었다. 접견실, 회의실 바닥은 전부 쪽마루로 바꾼 뒤 [[카페트]]를 깔았다.[* 응접실은 원래 [[마루|대청]]이었으므로 따로 개조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 두었다. 물론 여기도 [[카페트]]를 깔았다.] [[서양|서양식]] [[가구]]도 배치하고 천장에 [[샹들리에]]까지 설치했으며 이 밖에도 행각에 [[욕실]], [[화장실]], [[이발소|이발실]]까지 설치하여 최대한 [[서구]]적인 느낌을 주었다. 2020년대 현재는 카페트를 치웠다. || [youtube(VgNUEq8GJpk)] || ||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희정당 내부 동영상. 360도 VR로 볼 수 있다. || ==== 벽화 ==== ---- ||<-5><tablebordercolor=#0047a0><bgcolor=#0047a0><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장.svg|width=26]]]]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ff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width=30%> 239호 ||<|2> ← ||<width=30%> '''240호''' ||<|2> → ||<width=30%> 241호 || || 구 목포사범학교 본관 ||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 ||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 ---- ||<-5><tablebordercolor=#0047a0><bgcolor=#0047a0><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장.svg|width=26]]]]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ff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width=30%> 240호 ||<|2> ← ||<width=30%> '''240호''' ||<|2> → ||<width=30%> 241호 || ||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 ||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 [[창덕궁 대조전#s-4.2.1|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 ---- || [[파일:희정당 벽화.jpg|width=100%]] || || 위는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아래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이다. || 응접실 양쪽 벽 문과 천정 사이 벽에 폭 8.85m, 높이 1.8m 크기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동쪽의 그림은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서쪽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이다. 희정당이 완공된 1920년 [[가을]]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의 명으로 당대 유명한 [[화가]] [[김규진|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이 그렸다. 원래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는 작업을 담당할 [[화가]]로 [[일본인]]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내전[*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창덕궁 경훈각|경훈각]].]의 그림만큼은 무조건 [[조선인]] 화가에게 맡기겠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1911년]]에 창설된 서화미술회[* 형식상이라지만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총무는 소호 김응원.]와 서화연구회 소속 조선인 화가들이 각각 대조전과 경훈각의 벽화 4폭,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아 그렸다. 그런데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은 서화연구회 소속 화가 김규진이 윤필료[* 제작비. 화가 한 사람당 1,500원 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건가?~~]를 챙길 속셈으로 '''희정당 벽화 작업을 독차지했다'''는 의심을 샀고, [[김은호]]는 "윤필료를 500원밖에 받지 못했다"며 '''제작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후에 어찌어찌 사태가 수습돼서 서화미술회에서 중진화가 강필주와 [[고희동]] 대신 강습소 출신의 당시로써는 신진 화가였던 [[이상범]]과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오일영 등 5명 그리고 해강 김규진까지 총 6명에게 벽화를 맡기기로 결론이 났다. 김규진은 이미 1919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구룡폭포 오른쪽 암벽에 폭 3.6m에 길이 19m 되는 '미륵불'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매일신보]]에 금강산 스케치를 연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금강산을 방문했다고 한다. == 여담 == * 2005년 7월 24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민태자(영친왕)]]의 아들 [[이구(1931)|이구]]의 [[장례식|영결식]]을 이 곳에서 치뤘다. 그래서 희정당은 [[조선|조선왕조]]의 왕실 예법으로 거행한 마지막 '진짜 장례식'을 치른 장소가 되었다. * 희정당 남쪽 현관으로는 드나들지 못하고 내부 역시 출입할 수 없다. 다만, 특별관람을 실시할 때에 한해서는 들어갈 수 있다. 2018년 시범개방에 이어 2019년에 내부 특별관람을 실시하여 제한적으로나마 일반에 개방했다.[* 남쪽 현관 출입은 개방에서 제외.] 만 13세 이상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상반기엔 4월 3일부터 5월 25일까지, 하반기는 9월 4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매주 수 · 토요일 오전 10시 30분과 오후 2시에 진행했다. 예약은 29일 오후 2시부터 가능했고 1회 정원은 10명, 관람료는 1만 원이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328/94773055/1|#]] * 현재 희정당을 두고 [[조선시대]] 모습이 아닌 것에 아쉬워하며 《[[동궐도]]》에 나온대로 [[복원]]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비록 [[일제강점기]]였다해도 엄연히 [[순종(대한제국)|순종]]과 [[순정효황후]] 등 [[황실]] 사람들이 실제로 머물던 곳이었으니 그대로 냅두자는 의견도 만만찮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version=445, paragraph=4.3.1)] [[분류:창덕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