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창덕궁)] ---- [include(틀:조선 왕궁의 동궁)] ---- [목차] ||<table width=662> [[파일:동궐도 중희당.jpg|width=100%]] || || 《[[동궐도]]》에 묘사된 중희당 || || [[파일:중희당 현판.jpg|width=100%]] || || 중희당의 [[현판]]. [[정조(조선)|정조]]의 친필이다. || == 소개 == {{{+1 昌德宮 重凞堂}}} [[창덕궁]]의 건물로,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의 정당(正堂)이었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위치는 [[창덕궁 성정각|성정각]]의 동쪽, 지금의 [[창덕궁#s-4.4|창덕궁 후원]]으로 입장하는 곳과 [[창경궁]]으로 가는 함양문 앞의 넓은 길이다.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며 [[정조(조선)|정조]]가 직접 썼다. == 역사 == 1782년([[정조(조선)|정조]] 6년)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이순]]이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늦둥이|꽤 늦은]] 31살에 얻은 굉장히 귀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후궁]] 소생임에도[* [[문효세자|이순]]의 [[어머니|생모]]는 [[의빈 성씨]]이다. [[드라마]] [[이산(드라마)|이산]]에서 [[한지민]]이 맡았던 배역.] 이순을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봉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0611027_003|#]], 다들 이순이 [[태자|세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11018_001|#]] 자연스레 장차 사용할 [[동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창덕궁]]과 [[창경궁]]의 동궁은 [[영조]] 말년과 [[정조(조선)|정조]] 재위 초반을 거쳐 전부 [[화재|불타고]] 재건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땐 [[사도세자]]도 [[임오화변|죽은 이후]]였고 [[정조(조선)|정조]]는 [[황태손|세손]] 시기의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었다. 그리고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래서 새롭게 지은 것이 바로 중희당이다. 이순은 이 곳에서 세자로 책봉받으니 이가 곧 [[문효세자]]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807002_001|#]] 그러나 [[문효세자]]는 책봉 2년 만인 1786년([[정조(조선)|정조]] 10년) 불과 5살[* [[만 나이]]로는 3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도 같은 해 이 곳에서 눈을 감았다. 중희당이 [[동궁]]의 기능을 잃자 정조는 여기서 [[신하]]들을 접견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5022_001|#]] [[정사]]를 펼치는 등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순조]] 때는 여기서 [[부마]]의 [[간택|삼간택]]을 행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404009_001|#]] 그러다 1827년([[순조]] 27년)에 당시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중희당이 [[정당]]으로 사용하였다. 효명세자는 이 곳에서 [[조회]]를 열고 [[정사]]를 보는 등 중희당을 자신의 [[정치]][[공간]]으로 적극 활용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2702009_007|#]] 1849년([[헌종(조선)|헌종]] 15년)에는 헌종이 여기서 [[죽음|승하]]하였다. [[세자]]가 없던 [[철종(조선)|철종]] 시절엔 쓰지 않았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곳에서 [[관례]]를 올린 뒤 [[왕]]으로 즉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012012_001|#]] 이후 [[명성황후]]의 [[간택]][[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03006_001|#]]과 [[왕세자]](훗날의 [[순종(대한제국)|순종]])의 관례도 여기서 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901020_001|#]] 이외에도 다양한 궁중행사들을 열었으며, [[창덕궁]]에서 [[외국]]의 [[외교관]]들을 접견할 때에도 이 곳을 활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1001_002|#]] 그러다 1891년([[고종(대한제국)|고종]] 28년), 고종이 중희당을 옮겨 지으라는 [[명]]을 내렸고,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805003_001|#]] [[경복궁]]으로 이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경복궁]]으로 옮겼다면 [[일제강점기]]에 철거당했을 것이다. [[지못미]].] 이후 지금까지 재건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지었고,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한 뒤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올렸다. [[기단]]도 매우 높았는데 무려 댓돌을 9단이나 쌓았다. 그리고 그 앞에 [[계단]]을 총 3개로 나누어 놓았다. * 《[[동궐도]]》에는 정면 9칸으로 나와있고 측면은 [[복도]]인 칠분서에 가려 [[확인]]이 불가능하나 《동궐도형》에는 정면이 8칸에 측면이 4칸인 총 32칸이며, 툇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방]]들과 [[마루]]는 전부 통 칸으로 되어있다. * 서쪽 끝 방을 [[책]]을 보관하는 서주(書廚)로, 동쪽으로 그 다음 칸은 [[마루]]를 놓고, 그 다음 방은 [[온돌]], 그 다음 4칸은 [[대청]], 그리고 그 다음 2칸은 다시 온돌로 되어있다. 서쪽의 2칸을 제외한 나머지 7칸 앞에 바깥으로 드러난 툇마루를 놓았다. 툇마루에 [[나무]] [[난간]]을 덧대었는데, 동쪽의 3칸과 서쪽에서 3번째 칸은 툇마루 전체에 놓았고, 그 사이의 칸들은 [[건물]]로 출입할 수 있게 가운데를 비워놓았다. 그리고 온돌방의 [[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분홍색]]이 아닌, [[흰색]]이었다. * 마당을 굉장히 넓게 만든 뒤, 그 앞에 [[측우기]]와 [[해시계]], 풍기대[* [[조선시대]]에 바람의 방향을 재기 위해 설치한 받침돌.], 소간의[* [[적도]]를 기준으로 하여 [[천체|우주의 물체들]]을 관측하는 기구인 간의(簡儀)를 천문관측대인 관천대 위에 놓을 수 있도록 보다 작게 만든 기구.] 등 여러 [[천문]], [[기상]] 관측 [[기구]]들을 놓아 [[백성]]들의 [[삶]]에 중요한 [[날씨]]를 살핀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 중희당 본채 서쪽에 소양문이란 [[문|쪽문]]이 놓여있고 소양문의 서쪽엔 구여문이란 [[문]]이 세워져 있었다. == 여담 == * [[정조(조선)|정조]]가 [[정약용|다산 정약용]]에게 [[필통]][* 현재의 작은 [[필통]]을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의 필통 크기가 어떤 지는 [[http://gimoa.kr/web/product/big/gimoa77_9449.jpg|여기]] 들어가서 한 번 보자.] 가득 삼중소주[* 세 번 증류해서 만든 [[소주]]. 그러니까 지금의 소주하고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알콜]][[도수]]가 미친듯이 높았다.]를 가득히 부어서 마시라고 --[[술 강요]]--권한 곳이 바로 여기다. 이 때 정약용은 ‘오늘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고.[[https://jangslifestory.tistory.com/5138|#]] --흔한 직장 상사와의 회식-- --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 [[임오군란]] 당시 [[민겸호]]와 [[김보현]]이 [[궁궐]] 안에 난입한 구식 [[군대]] [[군인]]들을 피해 도망치다 이 곳에서 [[살해]]당했다. == 부속 건물 == ||<table width=662> [[파일:중희당_일대.jpg|width=100%]] || || 창덕궁 공식 홈페이지(팜플렛 삽도)에 나와있는 중희당 터와 부속 건물들인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 === 칠분서 === ||<table width=662> [[파일:창덕궁 칠분서.png|width=100%]] || || 칠분서 사진 || {{{+1 昌德宮 七分序}}} 중희당과 후술할 부속 건물인 삼삼와를 연결하는 [[복도]]이다. 단순 복도임에도 분합문과 [[난간]]을 설치하여 격식을 차렸다.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총 6칸이며, ‘ㄱ’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중희당에서 칠분서로 들어와 동쪽으로 두 칸을 가면 길이 남쪽으로 꺾인다. 거기서 4칸을 더 가면 삼삼와가 나온다. 내부는 전부 [[마루]]이다. [[난간]]은, 위에는 빗살무늬로, 아랫 단은 [[장수]]를 상징하는 덩굴무늬로 [[장식]]했다. [[현재]]도 남아있으나 본채 중희당이 사라진 관계로 뭔가 어색하다.(...) === 삼삼와 === ||<table width=662> [[파일:창덕궁 삼삼와.png|width=100%]] || || 삼삼와 사진 || {{{+1 昌德宮 三三窩}}} 중희당의 부속 [[건물]]로, 과거에는 칠분서를 통해 연결되었다. [[육각형|6각형]] 건물이다. [[이름]]이 특이한데 정확한 뜻은 잘 모른다. 다만 3(三)이 2번 쓰인 것을 보아 6각형 형태를 나타낸 듯 하다. ‘와(窩)’는 직역하면 [[움집]], [[굴]]이란 뜻으로, [[일상]]에서는 주로 [[별장]]이나 [[창고]] 등으로 의미를 확대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용도도 [[서재]]나 서고, 또는 [[휴식]]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그리고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 [[탑]] 모양의 [[장식]] [[기와]]. 주로 6각형, 8각형 형태의 [[건물]](거의 대부분 [[정자]])에 얹는다.]을 얹어 [[장식]]하였다. 문짝은 분합띠살이며 교창은 설치하지 않았다. [[난간]]은, 위에는 평 무늬로, 아랫 단은 [[장수]]를 상징하는 덩굴무늬로 [[장식]]했으며 난간 밑에는 낙양을 설치하여 화려함을 더욱 살렸다. [[건물]] 본체와 [[기단]] 사이의 벽면은, [[벽돌]]을 이용하여 [[거북이]] 등껍질 문양으로 [[장식]]했다. 내부는 한 칸으로, 바닥은 [[마루]]이다. 지금도 남아있다. 다만 《동궐도》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동궐도》에선 석조 기단이 창이 날 정도로 높아 사실상 1층 공간이 있었지만 현재는 단순한 기단으로 낮아진 상태다. === 승화루 === ||<table width=662> [[파일:승화루 뒷뜰.png|width=100%]] || || 승화루 뒤뜰 || {{{+1 昌德宮 承華樓}}} 삼삼와와 연결된 2층 [[누각]]이다. 원래 1층은 [[세자]]가 읽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 2층은 [[독서|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소주합루(小宙合樓)--[[소주]]합루가 아니다--였다가 [[헌종(조선)|헌종]] 때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를 지으면서 승화루로 바뀌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 무언가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부분.]를 잇는다’는 뜻으로, 많은 [[책]]과 [[글]], [[그림]]을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이다.[[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NgM2WAXfXu7qMdIqXUE1DKw6Kn2KK2nuQRjZaJnubiGggsaF0uUhInyQWvaVwcYZ.new-was_servlet_engine1?newsItemId=155687391§ionId=ocp&pageIndex=11&mn=NS_01_09_02&strWhere=&strValue=&sdate=&edate=|#]] 《승화루서목》을 보면 보관하던 [[책]]이 무려 3742권, [[글]]과 [[그림]]들이 665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본 기능을 잃고, [[일본 제국|일제]]가 [[순종(대한제국)|순종]]과 [[왕실]]의 경호--라고 쓰고 감시라고 읽자--를 명목으로 설치한 [[창덕궁]] [[경찰서]]의 [[건물]]로 쓰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2층이므로 총 6칸에 달한다. [[기둥]]은, 1층은 전부 긴 [[화강암|화강석]]으로 되어있으며 2층의 기둥은 [[나무]]를 네모나게 깎아 세웠고 동쪽 측면에 나무 [[계단]]을 놓아 이동이 가능하게 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쇠서를 2개 두었다. 용마루,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다 기와로 쌓았으며 [[치미]]만 올리고 [[잡상]]은 놓지 않았다. 문짝은 분합띠살이며 교창은 설치하지 않았다. 2층의 난간은 결연초 문양으로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1층도 원래는 [[문]]과 [[벽]]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에 다 뜯기고 현재는 외부와 트여있다. 《[[동궐도]]》를 보면 승화루 앞 [[기단]]에는 화려한 괴석들이 3개가 놓여있어 주변을 아름답고 운치있게 하였다. 지금은 기단도 괴석도 다 사라지고 그 앞엔 낮은 [[담]]과 조그만 [[벽돌]] [[문]]만이 자리하고 있다. 승화루 뜰엔 '향천연지(香泉研池)'라는, 큰 [[암석|돌]]을 움푹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이 있다. ‘향기(香)나는 샘(泉)과 벼루(研)같은 연못(池)’이란 뜻으로 맑은 [[정신]]으로 [[학문]]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 유덕당 · 석유실 · 자선재 === ||<table width=662> [[파일:동궐도 유덕당, 석유실, 자선재.png|width=100%]] || || 《[[동궐도]]》에 묘사된 유덕당, 석유실, 자선재.[br]맨 아래 붉은 담장 왼쪽이 석유실, 윗쪽이 유덕당, 그보다 더 윗쪽이 자선재이다. || {{{+1 昌德宮 維德堂 · 昌德宮 錫類室 · 昌德宮 資善齋}}} 유덕당은 중희당의 북쪽에 있던 부속 [[건물]]이다. 유덕당의 서남쪽과 중희당의 서북쪽에 석유실이 있었으며 이 석유실을 통해 두 건물이 연결되었다. 《동궐도형》에 따르면 유덕당은 정면 7칸에 측면 2칸으로, 각 방은 남북축으로 전부 통 칸이었다. 《[[동궐도]]》를 보면, 서쪽에서 2, 3번째 칸은 [[마루]]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고, 4,5,6번째 칸은 [[온돌|온돌방]]으로 되어있으며, 모든 칸 앞에는 [[마루|툇마루]]가 밖으로 통해있고, 그 앞에 [[나무]] [[난간]]을 덧대었다. [[계단]]은 총 2개가 놓여있으며 [[계단]]과 툇마루 사이엔 출입이 가능하게 난간이 설치되어있지 않다. 동쪽 마지막 칸은 가운데에 작은 [[창문|창]]과 [[나무]] [[문|쪽문]]이 설치되어있고 그 주변은 분홍색의 [[벽]]으로 되어있다. 동쪽 측면은 창과 문이 없이 벽과 [[벽돌]]로만 마감했다. 석유실은 동향을 하고 있으며 (동향 기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총 8칸이다. 《[[동궐도]]》에는 전면 모든 칸에 [[마루|툇마루]]가 밖으로 나와 있으나 《동궐도형》에는 유덕당 쪽 2칸 앞에만 그렇게 되어있다. 《동궐도》를 기준으로 보면, 툇마루 안쪽의 모든 공간이 [[온돌|온돌방]]인 것으로 보이나 《동궐도형》에는 구분이 안 되어있다. 자선재는 유덕당의 북쪽에 있는 건물이며 이름 '자선(資善)'은 ‘착한(善) 성품을 기른다(資)’는 뜻이다. 《[[동궐도]]》를 보면, 정면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정면 4칸에 전면에 쪽마루를 놓았다. 《동궐도형》에서는 양선재로 나와있는데 이름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잘못 표기한 것인지는 모른다. 《동궐도형》에서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총 7칸으로 양쪽 가장자리 끝은 [[주방]](혹은 [[창고]]이고)[* '부엌 주(廚)'로 표기되어있는데 의미를 확장해서 창고 등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일단 본 뜻대로 주방으로 쓴다.], 서쪽 주방 동쪽에 [[온돌|온돌방]] 2개가 있고, 동쪽 주방의 서쪽엔 [[방]]이 1개가 있으며 그 사이 2칸은 [[대청]]으로 되어있다. 세 건물 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매체에서의 등장 ==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헐렸기에 당연히 실제 중희당 건물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적은 아예 없었다. 다만 2007년 [[MBC]] [[드라마]] 《[[이산(드라마)|이산]]》을 촬영할 때, [[용인대장금파크]]에 중희당과 그 일대를 재현한 [[동궁]] 세트를 지었다. 자세한 모습은 [[http://www.imbc.com/broad/tv/drama/isan/set/set12/index.html|이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자. 그런데 고증오류가 몇 개 보인다. [[정조(조선)|정조]] 시대 [[사극]] 세트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쓴 '집희(緝熙)'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집희 현판은 실제로는 중희당 건물이 아니라 [[창덕궁 성정각|성정각]]의 부속건물 [[창덕궁 관물헌|관물헌]]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석등]]을 놓았다.[* [[조선]] [[궁궐]]에는 원래 [[잔디]]와 [[석등]]이 '''아예 없었다.''' 지금 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일본 제국|일제]]의 훼손으로 인한 것.] --이런 걸 보고 [[사족]]이라 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version=467, paragraph=4.3.2)] [[분류:창덕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