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972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창덕궁 대조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내정전)]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내정전)] ---- ||<-5><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bg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width=30%> 815호 ||<|2> ← ||<width=30%> '''816호''' ||<|2> → ||<width=30%> 817호 || || [[창덕궁 희정당]] || '''창덕궁 대조전''' || [[창덕궁 선원전]] || ---- }}}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315288><tablebordercolor=#315288><bgcolor=#fff>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16호}}}]]''' || ||<-2> {{{#fff {{{+1 '''창덕궁 대조전'''}}}[br]{{{-1 昌德宮 大造殿}}}}}}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덕궁 대조전, 너비=100%, 높이=100%)]}}}|| ||<width=80> '''{{{#fff 소재지}}}''' ||<bgcolor=#fff>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 || || '''{{{#fff 분류}}}''' ||<bgcolor=#fff>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 ||<bgcolor=#fff> 1동 || || '''{{{#fff 지정연도}}}''' ||<bgcolor=#fff>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bgcolor=#fff> [[조선시대]], 1405년 창건, 1920년 중건 || [목차] [clearfix] ||<tablewidth=800> [[파일:창덕궁 대조전1.png|width=100%]] || || 대조전 사진 || == 개요 == {{{+1 昌德宮 大造殿}}} [[창덕궁]]의 침전이다. [[편전]]인 [[창덕궁 희정당|희정당]]의 북쪽에 있다. [[건물]] 동쪽으로 흥복헌, 서쪽으로 융경헌이 바로 붙어 있고, 서북쪽엔 [[경훈각]]이 [[복도]]로 이어져 있다. [[현판]]은 [[순조]]의 친필이다. == 대조전의 용도 == 흔히 [[창덕궁 희정당|희정당]]을 [[왕]]의 침전, 대조전을 [[왕비]]의 처소로'''만''' 생각하는데, 이는 오류이다. '''일단 희정당은 정식 침전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창덕궁 희정당#s-3|희정당의 용도]]를 참조. 물론 대조전에서 [[왕비]]가 살았던 것은 맞다. 《궁궐지(宮闕志)》에서도 대조전을 '대내곤전정당(大內坤殿正堂)'이라 소개하고 있고.[* ‘곤(坤)’은 [[땅]]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여성]]을 상징했다. 그래서 곤전은 [[중전|중궁전]]을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비만 머문 것이 아닌, '''[[왕]]도 같이 거주했던 것으로 봐야한다.''' 근거는 많다. 아래 설명하겠지만 대조전의 옛 [[이름]]은 양의전(兩儀殿)인데, 양의전을 [[정전|정전(正殿)]]이라 일컬은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정전은 으뜸가는 [[전각]]을 말하며 이는 당연히 [[임금]]이 주로 머무는 [[집]]을 뜻한다. 또한 5명의 [[왕]][* [[성종(조선)|성종]], [[인조]], [[효종(조선)|효종]], [[철종(조선)|철종]],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이 곳에서 [[사망|승하]]했으며, [[순조]]는 대조전을 '''[[대전#s-4|대전(大殿)]]의 침전, 즉 임금이 머무는 침전'''이라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208010_001|#]]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동 침실과 서 침실의 이름을 각각 따로 지은 것도 근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같이 살지 않는데 굳이 한 [[건물]]의 [[방]] [[이름]]을 구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공용 침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 역사 == 1405년([[태종(조선)|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1461년([[세조(조선)|세조]] 7년) 12월에 이름을 양의전(兩儀殿)으로 짓고, 동 침실을 여일전(麗日殿), 서 침실을 정월전(淨月殿)으로 정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712019_003|#]] 이후 1467년(세조 13년) 5월 경에 [[건물]] 전체의 [[이름]]을 대조전(大造殿)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인경궁]] 경수전(慶壽殿)을 옮겨 재건했다. 이후 [[순조]] 때 소실된 것을 1835년([[헌종(조선)|헌종]] 1년)에 다시 지었다. ||<tablewidth=800>[[파일:대조전 화재 직후.png|width=100%]]|| || 1917년 화재 직후 대조전의 잔해 ||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또 불에 탔고, 1920년에 복구했다. 참고로 이 때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 지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시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1926년 4월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여기서 [[죽음|승하]]했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명목상 순종이 가지던 [[이왕]] 위를 물려받은 [[영친왕|의민태자]]와 [[이방자]]가 가끔 [[조선]]에 올 때 머물렀으며, [[일제강점기]] 중 마지막으로 들른 1939년 10월 이후엔 아무도 살지 않는 [[전각]]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조선시대 대조전의 모습 === * 《[[동궐도]]》에 따르면 대조전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집상전(集祥殿), 서북쪽에 경훈각(景薰閣)이 [[복도]]로 통했고, [[창덕궁 대조전#s-5|부속 건물]]로 흥복헌(興福軒) · 융경헌(隆慶軒) · 양심각(養心閣) · 관리각(觀理閣) 등이 행각 형태로 대조전을 감쌌다. ||<tablewidth=700> [[파일:동궐도에서 묘사한 대조전 모습.png|width=100%]] || || [[동궐도]]에서 묘사한 대조전 모습 || * 대조전 [[건물]] 자체를 보면, 정면 9칸, 측면 4칸의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다른 [[궁궐]]의 침전과는 다르게 솟을지붕으로 세웠다.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고, [[암석|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2개에 이익공 [[공포]]를 놓고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長花盤)을 놓아 침전 건물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지붕의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 바름을 하고 용두와 7개의 [[잡상]]으로 장식했으며 9칸 중 가운데 3칸은 [[건물]]로 드나들 수 있게끔 [[마루|툇마루]]를 밖으로 돌출시켰다. 그리고 대청의 [[문]]은 분합문으로 달았다. * [[경복궁 강녕전|강녕전]]처럼 중앙에 월대를 놓았다. 이는 침전의 [[위엄]]을 나타내는 동시에 왕실 행사가 있을 때,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월대 동, 서쪽에 [[태극|삼태극]] 소맷돌을, 남쪽엔 [[서수]] [[해치]]의 [[얼굴]]을 단 [[계단]]을 세웠으며, 월대 가장자리에 [[나무]] 난간을 세우고 계단과 통하는 곳에 나무 [[문]]을 달았다. [[창문|창]]은, 밑 부분에 머름을 달고 그 위에 전면 창호를 달았는데 창살은 흔히 볼 수 있는 띠살이 아닌 정자(井) 형으로 만들었으며 창호 위엔 빗살교창을 달았다. 창 앞에는 돌[[기둥]]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고, 이 돌기둥 위에 쪽마루를 [[대청]] 툇마루와 연결시켜 [[건물]] 밖에서도 [[신발|신]]을 신지 않고 주변 행각으로 통행할 수 있게 했다. 창 쪽 쪽마루엔 [[추락]] 방지를 위해 나무 난간을 설치했으며 대청 툇마루와의 사이엔 월대처럼 나무 문을 두었다. * 대조전의 월대 서쪽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수라|수라간]]에서 만든 [[음식]]을 [[왕]]과 [[왕비]]에게 올리기 직전에 한 번 더 데우던 중간 [[부엌]]인 퇴선간(退膳間)이다. * [[시각|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대조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왕자|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국|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집|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덕수궁|경운궁]]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만화카페|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 * [[조선시대]] 대조전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사진]]이 현재 두 장 남아있다. 왼쪽의 사진은 주변이 황폐화되어 있는 것을 보아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 쉽게 말해 [[왕]]이 [[이사]]가는 것이다.]하기 전에 찍은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촬영일자는 불명이다. 오른쪽은 1912년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것이다. 순종 이어 전 찍은 사진은 전체적으로 《[[동궐도]]》의 묘사와 비슷하나, 창 앞에 세운 앞면 [[암석|돌]] [[기둥]]과 그 틈새를 나무판자로 가려놓았다. 다만, 가운데 칸 밑엔 [[문]]이 달렸는데 아마 [[아궁이]]로 들어가는 문인 듯 하다.[br][br]오른쪽 사진을 보면 순종이 머문 후 개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창문|창]]과 [[문]]의 창호지를 떼어 [[유리]]로 바꾸어 달았고, 가운데 [[지붕]] 양 끝에 [[피뢰침]]을 설치했다. 또 앞면 돌 [[기둥]]들 사이가 [[전통]] [[벽돌]] 장식으로 메꾸었고, 한 가운데엔 [[무늬]]로 형상화 된 [[한자]]를 새겼으며 월대 남쪽의 양 가장자리에는 큰 [[전등]]을 세워놓았다. ||<tablewidth=700> [[파일:조선 말기 창덕궁 대조전.png|width=100%]] || [[파일:순종이 살던 당시 창덕궁 대조전.png|width=100%]] || || [[구한말|조선 말기]] 촬영한 대조전 || [[일제강점기]]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살던 당시 대조전 사진 || === 1920년 이후 재건된 대조전의 모습 === * 위에 언급했듯,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온 것이기 때문에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는 교태전과 같다. [[희정당]]에 비해 변화가 크진 않지만[* 기본 구조 정면 9칸, 측면 4칸은 전과 같다.], 그래도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솟을지붕이 평지붕이 되고, [[누각]]처럼 보이게 했던 [[암석|돌]] [[기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재질이 돌이라 불타지 않고 남아있는 월대만이 [[조선시대]] 대조전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 내부도 상당히 변하여 [[대청]]을 [[거실]]로 삼고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했다. 그리고 원래 우물마루였던 대청 바닥을 쪽널마루로 바꾸었으며 [[온돌|온돌방]]의 [[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창호지를 떼고 [[유리]]를 달았으며 문 틀엔 [[커튼]] [[박스]]까지 달았다. 단, 외관의 유리는 훗날 창호지를 붙인 문으로 [[복원]]했다. * [[거실]]엔 [[거울]]을 세워놓았고[* 정 중앙에 있을 때도, 구석에 있을 때도 있다.] 정중앙엔 대형 자개[* [[조개|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조각]].] [[의자]]를 놓았으며 자개의자를 중심으로 양 옆에 [[나무]] 의자가 두 개가 있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 창호문의 위 아래를 [[벽지]]로 바르고, 그 한가운데에 교자창이나 완자창을 낸 [[문]].]을 달아 [[공간]]을 구분했다. ||<tablewidth=700> [[파일:대조전 대청.jpg|width=100%]] || [[파일:창덕궁 대조전 내부.png|width=100%]] || || 일월오악도 [[병풍]]이 펴져있는 대조전 대청 || 동 측면에서 바라본 대조전 대청 || * 침실인 [[온돌|온돌방]]은 동, 서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교태전과 달리 내부를 구분하지 않고 한 칸으로 터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침실 측면과 후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벽지]]는 [[무늬|문양]]이 그려진 능화지로 발랐고 천장엔 [[전등]] [[조명]]을 달았다. 동온돌 남쪽 창호엔 [[한시]](漢詩)를 써 붙였다. [[시]]의 내용에 대해선 [[http://cafe.daum.net/kotour/9Z02/40?q=%EB%8C%80%EC%A1%B0%EC%A0%84%20%EB%8F%99%EC%98%A8%EB%8F%8C|이 곳을 참조.]] ||<tablewidth=700> [[파일:창덕궁 대조전 서온돌.png|width=100%]] || [[파일:창덕궁 대조전 동온돌.png|width=100%]] || || 창덕궁 대조전 서온돌[[http://www.sculturein.com/bbs/print.php?bo_table=news&wr_id=650|#]] || 창덕궁 대조전 동온돌[[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PKlh&articleno=23&categoryId=1®dt=20110406191323|#]] || * 서온돌(왕비의 침실)에는, 길이 224cm, 폭 154cm, 높이 113.5cm의 뼈대 전체를 [[용]]으로 조각하여 굉장히 화려한 [[양식|서양식]] [[침대]] 및 [[탁자]]와 2인용 [[의자]]를 설치했다. 순종 사후 방치되어있다가 1988년에 일부를 보수했다. 그러나 [[매트리스]] 중앙부가 함몰되고 덮개천도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2008년 10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에이스침대]]에서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수리]], [[복원]]했다.[[https://news.v.daum.net/v/20090717123907147?f=o|#]] ||<tablewidth=700> [[파일:대조전 침대.png|width=100%]] || || 대조전 [[침대]]와 [[의자]], [[탁자]] || * 이 밖에도 행각에 [[서구|서구적인]] [[욕실]]과 [[화장실]]을 설치했다. ||<tablewidth=700> [[파일:대조전의 세면대와 보일러, 세면실.png|width=100%]] || || 대조전 세면대와 [[보일러]], 세면실[[http://www.sculturein.com/bbs/print.php?bo_table=news&wr_id=650|#]] || || [[파일:대조전의 욕실과 화장실.png|width=100%]] || || 대조전 [[욕실]]과 [[화장실]] || ==== 대조전 벽화 ==== ---- ||<-5><tablebordercolor=#0047a0><bgcolor=#0047a0><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장.svg|width=26]]]]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ff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width=30%> 241호 ||<|2> ← ||<width=30%> '''240호''' ||<|2> → ||<width=30%> 241호 || || [[창덕궁 희정당#s-5.2.1|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 ---- ||<-5><tablebordercolor=#0047a0><bgcolor=#0047a0><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width=100%>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장.svg|width=26]]]]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ffffff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width=30%> 240호 ||<|2> ← ||<width=30%> '''240호''' ||<|2> → ||<width=30%> 241호 || ||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 [[창덕궁 경훈각#s-3.2.1| 경훈각 조일선관도]] || ---- ||<tablewidth=1000> [[파일:대조전 봉황도.png|width=100%]] || || [[파일:대조전 백학도.png|width=100%]] || || 위는 《봉황도(鳳凰圖)》, 아래는 《백학도(白鶴圖)》이다. || 대조전을 완공한 그 해 [[가을]], [[거실]] 쪽 불발기문과 천장 사이 벽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의 명으로 동편엔 《봉황도(鳳凰圖)》가, 서편엔 《백학도(白鶴圖)》가 각각 그려졌다. 둘 다 폭 5.78m, 높이 2.14m 크기로, 《봉황도》는 오일영(吳一英, 1890 ~ 1960)과 이용우(李用雨, 1904 ~1952)가, 그리고 《백학도》는 [[김은호]](金殷鎬, 1892 ~ 1979)가 그렸다. [[문화재청]]에서는 2006년 《봉황도》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국가등록문화재]] 242호, 《백학도》를 243호에 각각 지정했다.[br][br]안전한 [[보존]] [[관리]]를 위해 지난 2013년 [[벽화]]를 떼어 내 보존처리하고 대조전에는 모사본을 제작, 부착했으며 보존처리가 완료된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한다. 원래 이왕직에서는 작업을 담당할 [[화가]]로 [[일본인]]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내전[*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창덕궁 경훈각|경훈각]].]의 그림만큼은 무조건 [[조선인]] 화가에게 맡기겠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1911년]]에 창설된 서화미술회[* 형식상이라지만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총무는 소호 김응원.]와 서화연구회 소속 조선인 화가들이 각각 대조전과 경훈각의 벽화 4폭,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아 그렸다. 그런데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은 서화연구회 소속 화가 김규진이 윤필료[* 제작비. 화가 한 사람당 1,500원 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건가?~~]를 챙길 속셈으로 '''희정당 벽화 작업을 독차지했다'''는 의심을 샀고, [[김은호]]는 "윤필료를 500원밖에 받지 못했다"며 '''제작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후에 어찌어찌 사태가 수습돼서 서화미술회에서 중진화가 강필주와 [[고희동]] 대신 강습소 출신의 당시로써는 신진 화가였던 [[이상범]]과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오일영 등 5명 그리고 해강 김규진까지 총 6명에게 벽화를 맡기기로 결론이 났다. == 부속 건물 == === 선평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선평문)] === 흥복헌 === ||<tablewidth=700> [[파일:창덕궁 흥복헌.png|width=100%]] || || 흥복헌 || {{{+1 昌德宮 興福軒}}} 대조전의 동쪽 익각(翼閣)[*A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이다. 역사는 대조전과 같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내부는 본채를 기준으로 [[대청]]은 대조전 쪽에 1칸, 동행각 쪽으로 2칸, 이렇게 3칸이었고 그 사이에 [[온돌|온돌방]]이 2칸 있었으며 [[건물]] 앞, 뒤로 [[마루|툇간]]을 놓았다. 그리고 청향각 방향으로 온돌방 3칸을, 동행각 쪽으로 온돌방 2칸을 더 놓았고 건물 앞에만 툇간을 놓았다. 외부는 대조전 쪽 1칸의 벽면의 [[창문|창]]을 작게 만들고 그 위를 [[벽]]으로 막은 뒤 중간에 작은 교창을 내었으며 나머지 칸은 전면 창호로 내었다. 그리고 건물 앞 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대조전 실내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대조전보다 한 단 낮아 서열이 대조전보다 아래임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한 후엔 꽤 달라졌는데 대조전 본채 자체가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은 거라서 [[교태전]]의 동익각인 원길헌과 구조가 같아졌다. 원길헌의 구조는 [[경복궁 교태전#s-4.1|여기]] 참조. 다만, 동행각에 달린 [[문]]이 사라지고, 밖으로 돌출된 [[마루|툇마루]]가 아예 실내로 들어갔으며, 밖에서 볼 때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낸 3칸만 드러나 있는 등 세부적인 부분은 많이 달라졌다. 내부 역시 [[이발소|이발실]]이 설치되는 등 많이 바뀌었다. 특이하게 내전의 건물임에도 [[임금]]이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는 [[공간]]으로도 쓰였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1001_001|#]],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의 체결을 [[결정]]한 [[대한제국|조선 왕조]]의 마지막 [[회의|어전회의]]가 열린 슬픈 [[역사]]의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흥복헌(興福軒) [[이름]]이 ‘복(福)을 불러 일으킨다(興)’는 뜻인데, 정반대로 여기서 [[비극]]적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 === 융경헌 === ||<tablewidth=700> [[파일:창덕궁 융경헌.png|width=100%]] || || 융경헌 || {{{+1 昌德宮 隆慶軒}}} 대조전의 서쪽 익각(翼閣)[*A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으로 [[역사]]는 대조전과 같다. 이름은 ‘경사(慶)가 융성(隆)하라’는 의미이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내부는 본채를 기준으로 [[대청]]은 대조전 쪽에 1칸, 서행각 쪽으로 2칸, 이렇게 3칸이었고 그 사이에 [[온돌|온돌방]]이 2칸 있었으며 [[건물]] 앞에만 [[마루|툇간]]을 놓았는데 이는 뒷면에도 툇간이 있던 흥복헌과는 다른 점이다. 그리고 융경헌 서쪽에 [[문]]을 두어 경훈각을 드나들 수 있게 했으며 서행각 쪽으로 온돌방 5칸을 더 놓았는데 서행각의 [[방]]들은 동행각의 방들보단 규모가 조금 작았다. 외부는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었고 건물 앞 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대조전 실내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대조전보다 한 단 낮아 서열이 대조전보다 아래임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한 후엔 꽤 달라졌는데 대조전 본채 자체가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은 거라서 [[교태전]]의 서익각인 함홍각과 구조가 같아졌다. 함홍각의 구조는 [[경복궁 교태전#s-4.2|여기]] 참조. 다만 밖으로 돌출된 [[마루|툇마루]]가 아예 실내로 들어갔으며 외부 모습이 전면 창호로 바뀌는 등 세부적인 부분은 많이 달라졌다. 흥복헌과 달리 현판은 붙어있지 않다. === 함원전 === ||<tablewidth=700> [[파일:창덕궁 함원전1.png|width=100%]] || || 함원전 || {{{+1 昌德宮 含元殿}}} 대조전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대조전과는 한 몸체로 붙어있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건물]]의 [[위치]]나 형태 등을 볼 때, 1920년에 [[창덕궁]] [[내전]] 일곽을 재건할 때 [[경복궁 교태전]]에 딸린 [[경복궁 교태전#s-4.3|건순각]]이 함원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기둥]]의 간격 등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교태전 옆에 [[이름]]이 같은 함원전이 있는데 건물명은 거기서 따온 것으로 추측한다. 건물의 위치와 구조 상 정면은 동쪽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북쪽 가장자리 칸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동쪽을 향해 있다.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청향각 === ||<tablewidth=500> [[파일:창덕궁 청향각.png|width=100%]] || || 청향각[[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tpORyx1LnTactS24tBG42WUda2Ul2V3nbjHQV0P2anY8yzA9ysXG4uuab5w94rTI.cha-was01_servlet_engine1?nttId=3827&bbsId=BBSMSTR_1006&pageUnit=0&searchCnd=&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searchUseYn=&mn=|#]] || {{{+1 昌德宮 淸香閣}}} 흥복헌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이름은 ‘맑고 깨끗한 향기(淸香)’란 뜻이다.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흥복헌 방향에 [[대청]] 2칸, 그리고 그 북쪽으로 [[온돌|온돌방]] 2칸이 있었다. === [[창덕궁 경훈각|경훈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경훈각)] === 지금은 사라진 건물 === ==== [[창덕궁 집상전|집상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집상전)] ==== 양심합 ==== ==== 관리합 ==== == 영상 매체에서의 활용 == [[1980년대]] 초까지는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중전|중궁전]]으로 많이 나왔다. 다만, 월대에 [[전등]]이 세워져 있는 등 [[양식|서구화]] 된 부분들도 많이 보였는데, 당시엔 야외 세트장을 짓는 것은 [[방송사]] [[예산]] 상 거의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고, [[일본 제국|일제]]의 훼손 등으로 그나마 당시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조선 궁궐]]의 침전 [[건물]]은 대조전 일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창경궁]]도 내전 건물이 남아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진짜 달랑 건물만 놓여있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1983년까지는 [[놀이공원]] [[창경원]]이었기 때문에(...) 촬영이 힘들었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촬영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경복궁을 비롯한 다른 궁궐의 침전들이 [[복원]]되면서 나오는 빈도가 줄었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를 다룬 사극에선 여전히 많이 나왔다. 그러나 [[창덕궁]]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장면을 촬영할 때, [[서양]] 풍이 나는 실제 [[창덕궁]] 대신 갓 복원하여 서구적 느낌이 하나도 없는 [[경복궁]]에서 찍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경복궁 교태전]] [[건물]]에서 교태전 [[현판]]을 뗀 뒤 [[창덕궁 대조전|대조전]] 현판을 대신 걸고 촬영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경복궁관리소의 허락을 받고 임시로 교체한 것이고 이 때 걸었던 대조전 현판도 당연히 [[방송사]]에서 별도로 제작한 것이다.] --100년 전엔 교태전이 [[창덕궁]]으로 가더니 이젠 반대로-- ||<tablewidth=700> [[파일:명성황후 8화의 대조전.png|width=100%]] || ||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 8화에 나온 대조전. [[경복궁 교태전|교태전]]에서 촬영했다. ||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대부분의 [[사극]]들이 야외 세트장에서 많이 촬영하면서 실제 [[창덕궁]] 대조전 [[건물]]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다. 참고로 [[교태전]]을 재현한 [[세트]]는 있지만 대조전 세트([[조선시대]] 원형의 모습)는 구현한 곳이 없고, 때때로 교태전 세트에 대조전 [[현판]]을 거는 식으로 나온다. --진짜 [[궁궐]] 촬영 때 하던 짓을 이제 세트에까지-- --영원히 고통받는 교태전 – 대조전 콤비--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교태전, version=10, paragraph=3, title2=창덕궁, version2=464, paragraph2=4.3.1)] [[분류:창덕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