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창덕궁)] ---- [include(틀:조선 왕궁의 동궁)] ---- ||<table width=662> [[파일:창덕궁 관물헌.png|width=100%]] || || 관물헌 || {{{+1 昌德宮 觀物軒}}} [[창덕궁 성정각]] 동북쪽에 있는 건물이다. == 이름과 현판 == '관물' 뜻은 ‘만물(物)을 보고(觀)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로, [[중국]] [[북송]]의 사상가 소옹(邵雍)의 〈관물편〉에서 인용했다. 《[[동궐도]]》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으며 이는 ‘넉넉하고 맑은 마루’란 뜻이다.[[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808|#]] 그런데 정작 [[현판]]의 [[글씨]]는 관물헌도, 유여청헌도 아닌 ‘집희(緝熙)이다. 1864년(고종 1년) 1월에 13살[* 만 11세.]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직접 쓴 것이다. ‘계속하여(緝) 밝게 빛난다(熙)’는 의미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소년]] [[왕]]이 앞으로 [[국가]]를 잘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듯 하다. 어릴 때 써서 그런 지 현판 글씨 치고는 서툴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성인들도 저 정도 못 쓰는 사람 많다.-- 참고로 [[경희궁]]의 [[동궁]] 중 아예 정식 이름이 [[경희궁 집희당|집희당]]인 [[건물]]이 있다. || [[파일:집희.jpg|width=100%]] || ||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직접 쓴 '집희(緝熙)' [[현판]] || == 역사 == ||<table width=662> [[파일:동궐도 관물헌.png|width=100%]] || || 《[[동궐도]]》에서 묘사한 관물헌 일대 ||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조(조선)|정조]] 때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11026_001|#]] 정조는 [[신하]]들을 자주 만나고 [[문신]]들을 [[시험]]보게 했다. 이후 [[효명세자]] 역시 이 곳에서 [[경전]]과 [[역사]]를 [[공부]]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wa_11304003_001|#]], [[헌종(조선)|헌종]]은 몸이 불편할 때 여기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xa_11505014_001|#]] [[고종(대한제국)|고종]]도 즉위 초 많이 사용했으며, [[섭정]]이던 [[흥선대원군]]이 [[궁]]에 들어올 때 주로 이용했다. 1874년(고종 11년) 3월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여기서 태어났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는 [[개화파#s-4|급진개화파]]의 본거지로 쓰였으며 그들에 의해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가 잠시 머물기도 했다. 개화파가 이 곳을 고른 이유는, [[창덕궁]] 내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있고, 또한 좁아서 [[청나라]] [[군대]]가 와도 [[방어]]하기 쉬울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망했어요|결과는 알다시피...]] [[일제강점기]]에 [[덕혜옹주]]가 1919년 [[고종(대한제국)|고종]] [[죽음|승하]] 이후 [[일본]]으로 [[유학]]--이라 쓰고 [[인질]]로 잡혀간다고 읽는다--가기 전까지 [[어머니]] [[귀인 양씨]]와 함께 이 곳에서 살았다. == 구조 == *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동, 서에 [[방]]이 각각 2칸 씩 있고 가운데에 [[대청]]이 2칸이며, [[마루|툇간]]이 남, 북면 가장자리에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동쪽 끝에 반 칸을 뒤로 물려 가퇴를 달았고, 서쪽 끝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반 칸을 물려 [[다락방|다락]]을 달았다. 단 동쪽 가퇴와는 다르게 전면을 [[나무]] [[판]]으로 막았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계의 몰익공 양식이며 [[기둥]]은 네모나게 깎아 세웠다. [[단청]]은 모로단청[*A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으로 하여 절제된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은 뒤 그 위에 [[치미|취두]]만 올리고 [[용두]]와 [[잡상]]은 놓지 않았다.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성정각, version=61, paragraph=4.2)] [[분류:창덕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