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남조 황제)] ||<-2><tablealign=right><tablewidth=350><tablebordercolor=#10275d><tablebgcolor=#10275d> '''{{{#d4cd99 남진 2대 황제[br]{{{+1 世祖 文皇帝 | 세조 문황제}}}}}}'''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4px-Chen_Wendi_Tang.jpg|width=100%]]}}} || || '''[[묘호|{{{#d4cd99 묘호}}}]]''' ||<bgcolor=#fff><(> '''[[세조]](世祖)''' || || '''[[시호|{{{#d4cd99 시호}}}]]''' ||<bgcolor=#fff><(> 문황제(文皇帝) || || '''[[연호|{{{#d4cd99 연호}}}]]''' ||<bgcolor=#fff><(> 천가(天嘉, [[560년]] ~ [[566년]] [[2월]])[br]천강(天康, [[566년]] [[2월]] ~ [[566년]] [[12월]]) || || '''[[성씨|{{{#d4cd99 성}}}]]''' ||<bgcolor=#fff><(> 진(陳) || || '''[[휘|{{{#d4cd99 휘}}}]]''' ||<bgcolor=#fff><(> 천(蒨) || || '''[[자(이름)|{{{#d4cd99 자}}}]]''' ||<bgcolor=#fff><(> 자화(子華) || || '''{{{#d4cd99 생몰 기간}}}''' ||<bgcolor=#fff><(> [[522년]] ~ [[566년]] || || '''{{{#d4cd99 재위 기간}}}''' ||<bgcolor=#fff><(> [[559년]] ~ [[566년]] || || '''[[능호|{{{#d4cd99 능호}}}]]''' ||<bgcolor=#fff><(>영녕릉(永寧陵) || [목차] [clearfix] == 소개 == [[진(육조)|진나라]](陳)의 제2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재위 기간 동안 천가(天嘉), 천강(天康)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자(이름)|자]]는 자화(子華). == 생애 == === 초기 생애 === 보통 3년([[522년]]) 시흥소열왕(始興昭烈王) 진도담(陳道譚)[* [[진패선]]의 형으로 대부분의 관례와 달리 진천은 아버지를 따로 추존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창업자인 작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황제]]에 오를 수도 없었고, 아들이 사실상 없던 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름은 담선(談先)이라고 한다. 이 이름은 그의 두 아우와 돌림 이름이 같게 되는데 어느 쪽 이름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영민했으며 담력과 식견이 있었다. 용모와 풍채가 좋고 몸가짐이 단정했으며 예법을 바르게 지켰으므로 숙부 [[진패선]]이 그를 아꼈다. [[후경]]의 난이 터지자 진천은 진씨 일족들을 보호하며 임천으로 피난갔다. [[진패선]]이 [[후경]]을 토벌하러 떠나자 [[후경]]은 진천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진천은 몸에 비수를 품고 후경을 찔러 죽이기 위해 스스로 자수했으나, 바로 감금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패선]]이 석두성을 포위하자 [[후경]]은 몇 번이나 진천을 죽이려고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죽이지 않았고, 결국 진천은 [[진패선]]이 석두성에 입성하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승성 3년([[554년]]), 진패선은 광릉을 점령할 때 진천을 선봉으로 삼아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뒀다. 이듬해(555) [[10월]], 왕승변의 사위였던 정주 자사 두감 등이 정병 5,000명을 이끌고 장성으로 쳐들어오자 진천은 이에 맞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장비가 부족했고, 모두가 대경실색해서 사기가 낮았다. 하지만 진천은 우스개소리를 하며 태연자약했고, 이에 모두가 안정을 찾았으며 진천이 직접 선두에 서서 40일 동안이나 지켜 결국 두감 등은 후퇴했다. 이 공로로 진천은 선의장군, 회계태수가 되었다. 영정 원년([[557년]]) [[11월]], 임천왕에 책봉되었고 시중, 안동 장군이 되어 남환을 수비했다. === 치세 === 영정 3년([[559년]]) [[6월]], 진패선이 사망하자 진천은 건강으로 소환되어 황제 옹립을 의논했다. 장태후는 '''"선제의 여섯 아들이 모두 [[요절]]하거나 [[서위]]의 포로로 잡혀 장안에 있으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소."'''[* 진패선의 다섯 아들은 모두 요절하고, 막내 아들 진창은 서위군이 강릉을 함락할 때 포로로 붙들려 장안에 있었다.]라며 결정을 못 내렸다. 이에 남예주 자사 후안도가 '''"지금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먼 곳을 생각하겠소? 임천왕은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모두가 받들어 모셔야 할 분이오. 이 일에 응하지 않는 자는 베어 버릴 것이오."'''라며 칼을 뽑아 전 위로 올라가 태후를 [[협박]]하여 [[옥새]]를 바치고 명령을 내리게 했다. 그래서 진천이 건강 태극전에서 즉위했다. 천가 원년([[560년]]), 우문씨의 [[북주]](557~581)는 진나라를 치기 위해 [[진패선]]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형왕 진창(陳昌)[* 진패선의 막내 아들이자 자는 경업(敬業)이다.]을 시켜 공격하게 했다. 진창은 왕림에게 막혀 안륙(安陸)까지만 쳐들어왔으나, 왕림이 사라지니 진창은 그대로 계속 진격할 수 있게 되었고, 장강을 따라 동진하면서 진천에게 무례한 편지를 보내 제위를 요구했다. 진천은 후안도를 불러 진창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왕으로 내려갈까라고 물어보았다. 이에 후안도는 그러지 말라고 하며 일단 몸소 나가 진창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한달 후, 진창이 진나라 영토에 들어오자 후안도는 반갑게 맞이하며 둘은 장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오고 있었다. 갑자기 후안도가 진창을 죽여버리고 장강에 던졌으며, 건강에 도착해 진창이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고 보고했다. 진천은 후안도가 진창을 죽였다는 걸 알면서도 이를 기쁘게 여기고 후안도를 청원공에 봉했다. 대신 죽은 사촌 동생이 불쌍했는지 자신의 7남 형양왕 진백신(陳伯信)을 양자로 삼아줬다. 진천은 백성의 고통을 알았으며 즉위 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 또 사리분별에 능했고 신하들의 간악한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천강 원년([[566년]]) [[4월]], 재위 8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건강 유각전에서 사망하고, [[6월]]에 영녕릉에 안장되었다. 진천은 태자 진백종이 개인적으로 너무 유약해서 황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염려되어 제위를 동생 [[진욱]]에게 넘겨주려 했다. 그러나 [[진욱]]은 거절했고 관료인 공환(孔奐)도 반대했다. 결국 진천은 [[진욱]]을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지만 [[진욱]]과 공환, 도중거(到仲舉), 원추(袁樞), 유사지(劉師知) 등에게 진백종을 보좌하게 했다. == 여담 == 정사에 장군 한자고를 매우 총애했다고 나온다. 이 모티프를 가지고 후대에 둘을 동성 연인으로 묘사한 연극들이 인기를 얻었다. 명나라 때 연극에 나온 '남황후(男皇后)'라는 단어가 유명하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역대 진(육조) 황제)] [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5><tablewidth=100%><#10275D> '''[[진(육조)#s-2|{{{#ffffff 남진의 역대 황제}}}]]''' || ||<width=30%> 초대 고조 [[진패선|무황제]] 진패선 || {{{+1 ←}}} ||<width=30%> '''2대 세조 문황제 진천''' || {{{+1 →}}} ||<width=30%> 3대 폐제 [[진백종|임해왕]] 진백종 ||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성소수자]][[분류:522년 출생]][[분류:566년 사망]]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진천,version=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