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center><tablewidth=600><table bordercolor=#000000><bgcolor=#000000> {{{#ffffff 패션 디자이너 }}} || ||<-2><bgcolor=#ffffff> [[파일:John-Galliano1.jpg|width=100%]] || ||<-2><bgcolor=#ffffff> [[파일:Foto-Logo-John-Galliano.jpg|width=45%]] || ||<-2><bgcolor=#ffffff> {{{+2 '''존 갈리아노'''}}} [br] John Galliano || ||<bgcolor=#999999> '''출생''' ||[[1960년]] 11월 28일, [[영국]], [[지브롤터]]|| ||<bgcolor=#999999>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width=28]]|| ||<bgcolor=#999999> '''학력''' ||[[센트럴 세인트 마틴]]|| ||<bgcolor=#999999> '''경력''' ||[[1995년]]~[[1996년]]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br][[1996년]]~[[2011년]] 크리스챤 디올 수석 디자이너[br][[2015년]]~ 메종 마르지엘라 수석 디자이너[br]|| ||<bgcolor=#999999> '''브랜드''' ||[[https://www.johngalliano.com|[[파일:홈페이지 아이콘.png|width=25]]]] [[https://instagram.com/jgalliano?igshid=3ntfrllx10j|[[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width=25]]]]|| [목차] == 소개 == ||<-2><table align=center><tablewidth=600><table bordercolor=#000000><bgcolor=#999999> '''최근 디자인 (2019년)''' || ||[[파일:johngalliano-runway2019ss01.jpg|width=100%]]||[[파일:johngalliano-runway2019ss02.jpg|width=100%]]||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디자이너 레이블의 이름. [[크리스챤 디올]]의 전 수석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반유대주의]] 발언으로 디올에서 쫓겨난 이후 현재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수석 디자이너로 있다. == 생애 == === 유년기 === 1960년 11월 28일 [[지브롤터]]에서 지브롤터 출신 아버지 '후안 갈리아노'와 [[스페인]] 출신 어머니 '아니타 기옌' 사이에서 태어났다.갈리아노에게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고 아버지는 [[배관공]]으로 일하셨다. 갈리아노가 여섯 살 때 그의 가족들은 일을 좇아 [[영국]]으로 건너가 남런던의 스트릿햄에 정착한 뒤 덜위치를 거쳐, 이후 브로클리로 이주했다. 또한 갈리아노의 가족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 집안이었다고 한다. === 첫 번째 컬렉션 === 갈리아노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St. Anthony's School과 Wilson's Grammar School을 졸업하고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입학하게 된다. 1984년에 이르러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 1등급(First-Class Honours Degree)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의 첫 번째 컬렉션은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받아 '''Les Incroyables'''[* Incredible의 프랑스어]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제목에 걸맞게 컬렉션이 [[대중]]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게되고 [[런던]]의 유명한 패션 부티크 Browns에서 재판매를 위해 전량 구매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이끌어내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첫 번째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 갈리아노는 앞으로 오랜 협력자가 될 아만다 할레치[* 당시 Harpers & Queen 매거진의 스타일리스트였다.]와 여성 모자 디자이너인 스티븐 존스 등과 함께 자신만의 패션 레이블을 시작하기로 한다. 첫 번째 컬렉션의 성공에 힘입어 갈리아노는 런던에 [[스튜디오]]까지 차리게 되지만, 그가 가진 [[천재]]적인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에 비해서 [[사업가]]적인 기질은 턱없이 부족했다. 초기에는 요한 브런이 재정적인 [[후원]]을 해주었고 이 후원이 끝나자 패션 브랜드 '캐서린 햄넷'을 후원하고 있던 [[덴마크]] 출신 사업가 올레 페더 베르텔슨이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계약]]도 얼마 못 가 1988년에 끝을 맺게 되고 1990년에 이르러서 갈리아노는 [[파산]]하게 된다. 런던에 본사를 둔 자신의 레이블을 되살리기 어렵다고 느낀 갈리아노는 재정을 지원해 줄 사람과 [[고객]]들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갈리아노는 파리를 소재로 하고 있는 [[모로코]] 출신 디자이너 페이칼 아모르[* 패션 레이블 Plein Sud의 소유주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후원을 얻어 Plein Sud 본사에 초대받게 되고, 1989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자신의 첫 번째 파리에서의 쇼를 선보이게 된다. === 파리 시절 === 1993년에 갈리아노와 아모르가 맺은 재정협정이 종료되며 당시 10월부터 컬렉션을 발표하지 못하면서 한동안 일이 없다가,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와 당시 Vanity Fair 매거진의 [[유럽]] 특파원 안드레 레온 탈리의 도움으로 갈리아노는 [[포르투갈]]의 사교계 인사 및 패션 후원자 사오 슐럼버거와 [[벤처기업]] 아르벨라 주식회사, 존 벌트, 마크 라이스 등과 같은 재정적 후원자들에게 소개를 받게 된다. 갈리아노가 파리에서의 발돋움을 위해 꼭 필요한 재정 지원과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된 계기는 바로 이 파트너십 덕분이었다. 이 만남은 갈리아노의 패션 하우스를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지금까지도 패션계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Fashion Moment)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만남이 없었더라면 갈리아노의 천재적인 재능이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 지방시 === 존 갈리아노는 1995년 7월 명품 대기업 [[LVMH]]의 소유주인 베르나르 아르노에 의해 [[지방시]]의 디자이너로 임명되었다. 1996년 1월 21일 갈리아노는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지방시의 지휘봉을 잡고 첫 [[오트쿠튀르]]쇼를 선보였다. 이 컬렉션은 패션 매체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방시에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LVMH는 갈리아노를 [[크리스챤 디올]]의 디자이너로 재임명하게 된다. 존 갈리아노가 지방시를 떠난 후 지방시는 [[알렉산더 맥퀸]]이 맡게 된다. === 디올 === 1996년 10월 갈리아노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지안프랑코 페레를 대신해 [[크리스챤 디올]]의 디자이너를 맡게 된다. 디올에서의 갈리아노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1996년부터 2010년까지의 [[오트쿠튀르]]와 기성복 컬렉션을 모두 성공적으로 완성해나가며 대다수의 [[비평가]]들에게 뜨거운 찬사와 칭송을 받았다. 이렇게 [[크리스챤 디올]]에서의 환상적인 행보는 '''계속될 것 같았으나...''' === 몰락 === 때는 2011년 2월 25일, 파리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갈리아노가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이후 그는 [[크리스챤 디올]]의 디자이너 자리에서 '''가차없이 쫒겨나게 된다.''' 같은 날 시민 저널리즘 사이트인 Citizenside는 지난 12월 같은 술집에서 일어난 비슷한 내용의 갈리아노 영상을 받게 되고 공개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영상 속에서 갈리아노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탈리아]] 여성들을 [[모욕]]하며 "나는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너 같은 사람들은 죽어야만 해. 너희 어머니들, 너희 조상들은 모두 빌어먹을 [[가스]]에 중독이 될 거야."[* "I love Hitler... People like you would be dead. Your mothers, your forefathers would all be fucking gassed."]라며 망언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이 사건은 [[크리스챤 디올]]의 2011~2012년 파리 [[패션위크]] 직전에 발생했던 일이었다. 쇼비즈니스 업계는 존 갈리아노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에 대해 엇갈린 감정들을 드러냈었다. 당시 디올의 뮤즈였던 [[나탈리 포트만]]은 갈리아노의 [[발언]]에 대해 "깊은 [[충격]]을 받았다"면서 그를 추하다고 [[평가]]했다.[* 정확히는 "아름다운 것들과는 정반대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디올의 또 다른 모델이었던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은 이 사건에 대해 "때로는 [[실수]]를 할 수 있다. 나는 그가 [[반유대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그가 유대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아마 약간 [[술]]에 취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존 갈리아노를 옹호하는 발언을 남겼다. 갈리아노는 [[변호사]]를 통해 혐의를 부인했고,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로 고발한 커플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에 나섰었다. 2011년 3월 1일, [[크리스챤 디올]]의 [[최고경영자]] 시드니 톨레다노는 "존 갈리아노가 한 말을 매우 단호하게 규탄한다"고 말하면서, 갈리아노에 대한 해임 절차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디올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라이선스]] 때문에 갈리아노 브랜드를 재정적으로 계속 지원을 했어야 했으며, 이후 빌 게이튼이 디올과 갈리아노 브랜드의 지휘봉을 잡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존 갈리아노를 대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갈리아노는 '카페에서 고객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한 혐의'로 파리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이 재판은 2011년 6월 22일에 시작되었다. 갈리아노의 [[변호사]]는 "파리 카페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모욕]]을 내뱉었던 것은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2011년 9월 8일, 갈리아노는 인종 때문에 대중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 혐의와 반유대적 발언을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총 6,000유로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 복귀 === 2013년 초, 갈리아노는 [[안나 윈투어]]의 요청[* 요청이라고 써두었지만 사실상 도움의 손길에 가깝다. [[반유대주의]] 발언 사건 이후 갈리아노는 패션계에서 영원히 [[퇴출]]될뻔했으니 말이다...]으로 '오스카 드 라 렌타'의 2013년 2월 [[뉴욕]] [[패션위크]] 기간 동안 가을 기성복 컬렉션을 준비하기 위해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잠시동안 일을 도우라는 초대를 수락했다. 갈리아노는 '오스카 드 라 렌타' 쇼의 [[백스테이지]]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때문에 오스카 드 라 렌타의 [[후계자]]로서 갈리아노가 될 가능성이 있고,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교직을 맡을 수도 있다는 등, 그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측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후 2013년 6월 12일 존 갈리아노가 [[크리스챤 디올]]에서 해임된 이후 첫 인터뷰가 [[미국]]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다. 그는 "나는 [[창조]]할 수 있다. 나는 창조할 준비가 되어있다... [[속죄]]를 통해 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라며 패션계로의 복귀를 원하는듯한 발언을 표현했었다. 2014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패션 그룹 OTB는 존 갈리아노가 [[메종 마르지엘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는다고 [[발표]]하며 갈리아노의 복귀를 선언했다. == 수상 == * --200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2012년 8월 20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 의해 수훈이 박탈되었다.] * 2002년 RDI[* Royal Designers for Industry] 수상 * 2001년 [[대영제국 훈장]] 3등급 수훈 * 1987, 1994, 1995, 1997년 [[영국]]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상[* 1997년에는 자신이 떠난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 자리의 후임자인 [[알렉산더 맥퀸]]과 함께 이 상을 공동 수상했다.] [[분류:패션 디자이너]][[분류:패션 브랜드]][[분류:1960년 출생]][[분류:영국의 인물]][[분류:게이]][[분류:대영제국 훈장 3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