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0%95%ED%98%84%EC%84%AD.jpg]] 鄭賢燮 1896년 9월 14일 ~ 1981년 10월 21일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유공자|독립 운동가]]이자 야권 정치인. [[전라북도]] [[김제시|김제]] 출신.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東萊). [[의열단]], [[한인애국단]]과 같은 무력 독립운동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창설했다. [[이회영]]과 함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다. 구파 [[백정기]]와의 친분도 유명하다. 또한 [[옥관빈 피살사건]]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 독립운동가를 역사에 기록한 독립운동가 ==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인데, 약산 [[김원봉]]과 백범 [[김구]]의 활약을 역사에 기록하였다. 보수적인 시각에서 일제 강점기, 광복 직후 시기를 중심으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연구를 해왔던 역사학자 이정식 교수(펜실베니아 대학교)가 젊은 시절 [[김성숙(1898)|김성숙]], [[장건상]], 정현섭, [[이강훈(독립운동가)|이강훈]] 등 독립운동가 출신 인물과 인터뷰해서 구술·기록한 책이 있다.[[http://www.yes24.com/24/Goods/1932671?Acode=101|#]] == 생애 == 1896년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동래 정씨]] 집성촌이다.][[http://gimje.go.kr/gjdev/grandculture/getContentMap.gimje?dataCode=GC02600148&menuCd=|#]]에서 출생한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1920년에는 [[미국 국회]]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활동을 계획했다. 이때문에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어1921년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1924년부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회영]], [[신채호]], [[박열]], [[신성모]] 등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과 같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이때부터 무력을 사용한 독립 운동에 뜻을 두면서,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를 기도했다. 이무렵 중국의 아나키즘 혁명운동가인 [[리스쩡]], [[우징헝]] 등과 제휴하여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28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계열이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의자연맹을 결성하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맹하고 기관지 《탈환》을 발행했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무정부주의 운동을 계속하면서 1930년, 중국의 아나키스트이며 암살대왕으로 불리던 서남파의 정객 [[왕야차오]]의 지원을 받아 [[유자명]]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재중국무정부주의자 [[유기석]]을 만나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종화]] 등과 중국인 무정부주의자와 연대하여 함께 활동하며 공동 무력 투쟁을 시도했다. 1931년 1월 [[원심창]]이 상해로 건너와 [[정화암]]과 합류하자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파 및 전향자 등을 사살하였다. 1933년 3월 [[이강훈(독립운동가)|이강훈]]·[[원심창]]·[[백정기]]·[[유기문]]·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과 함께 청년들을 모아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駐中) 상해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해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 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검거되었다. 1936년에는 국내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5만 7000원을 탈취하여 기관지 ≪남화통신 南華通信≫을 창간, 발행기금으로 활용하였고 남화통신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1940년부터는 상하이에서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정탐하여 미국 공군에 보고하는 정보 활동을 벌였다.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의 탈출 공작도 진행하고 탈출 학도병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데 후원하였다. == 광복 이후 == 1945년 광복 이후 1946년 상하이[上海] 한인인성학교(韓人仁成學校) 이사장, 상하이교민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1958년 민권수호연맹 지도위원, 1959년 사회대중당 지도위원, 통사당(統社黨)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1960년 7월 7·29 총선거에서 [[정화암]]은 [[곽상훈]]으로부터 사상공세를 당하였다. 곽상훈은 [[전라북도]] [[김제]]군 갑구에 출마한 [[조한백]]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곽상훈은 상대방 후보인 정화암을 사상으로 공격하였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의 사촌쯤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이나라 정치를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정화암]]은 '나는 곽상훈 씨를 위대한 정치가인 줄로 여겨왔다. 그런데 그 위대한 정치가가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의 사촌쯤 된다고 말했다니 그 동안의 이나라의 정치작태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 위대한 정치가로 대접받아 왔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그런 소리는 이불 속에서 자기 마누라하고나 하시오. 유권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곽상훈이라도 꽤 무식한 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17,784표를 얻어 26,281표를 얻은 민주당 후보 조한백에게 2위로 석패하였다. 19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회 위원에 추대되었고, [[5·16 군사정변]]으로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하여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1974년 동(同)당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1974년 민주화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다. 1981년 10월 21일 85세로 사망하였다. 1983년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 나의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가 있다. == 정치인 정현섭 == [include(틀:한국 진보진영 관련 문서)] 광복 이후 정치인의 길을 간 독립운동가 출신 정현섭은 수난을 꽤 당해왔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 김제군 갑구 선거구에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상대 후보 [[조한백]]의 지지유세를 한 독립운동가 [[곽상훈]]([[한국민주당]] 정치인 출신)으로부터 아나키스트란 이유로 공산주의자와 비슷하다는 비방을 받았다. 결국 이때 선거에서는 조한백에게 밀려서 낙선하였다. 1년 뒤 [[5.16 군사정변]] 당시에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가 풀려났다. 이후에 박정희 정권 당시 1969년에 실시한 [[3선 개헌]]에 항의하며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유신정권 치하의 1974년에는 민주화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 기타 == * [[옥관빈 피살사건]] * [[자유인 이회영]]에서는 홍일권이 연기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 광복군/군인]]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 [[분류:민주운동가]] [[분류:김제시 출신 인물]] [[분류:1896년 출생]] [[분류:1981년 사망]][[분류:동래 정씨]][[분류:건국훈장 독립장]] [[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