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1~30호)] ||<-2><tablealign=right><tablewidth=360><tablebgcolor=#315288><tablebordercolor=#315288><bgcolor=#fff>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9호}}}]]''' || ||<-2> {{{#fff {{{+1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br]{{{-1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 (부여읍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너비=100%, 높이=100%)]}}}|| ||<width=80> '''{{{#fff 소재지}}}''' ||<bgcolor=#fff>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 (부여읍, 정림사지) 정림사지박물관 || || '''{{{#fff 분류}}}''' ||<bgcolor=#fff>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 '''{{{#fff 수량/면적}}}''' ||<bgcolor=#fff> 1기 || || '''{{{#fff 지정연도}}}''' ||<bgcolor=#fff> 1962년 12월 20일 || || '''{{{#fff 제작시기}}}''' ||<bgcolor=#fff> [[백제|백제시대]] 후기 7세기 || {{{+1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목차] [clearfix] [include(틀:영상 정렬, url=gWGSOvDiFvs)]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백제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 개요 == ||<tablealign=center>{{{#!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poemlane.com/junglim57.jpg|width=500]]}}}|| [br][[백제]] 후기 수도 [[사비성|사비]]의 중심에 있었던 사찰 [[정림사|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석탑]].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내용 ==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특이한 부분으로는, 석탑인데도 목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660년 [[황산벌 전투|백제멸망전]]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7월 18일 멸망시킨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8월 15일에 이 탑에 정복 기념으로 새긴 비문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평제탑(平濟塔)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형식상으로도, 역사적 이벤트상으로도 나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단골소재다. 700여 년의 유구한 백제 역사에 비하면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문화유산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조각이나 공예품에 비하여 건축 자료는 극히 적다.[* 건축물은 남아 있는 것이 아예 없으며, 석탑 몇 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 다만,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만이 백제시대 건축의 모든 것을 대변하려는 듯 제자리에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남아있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은 금당 앞뜰에 거대한 [[목탑]]을 두는 가람배치였다. 이 경우 목탑이 차지하는 평면 너비 때문에 금당 앞뜰의 공간은 좁아지게 마련이다.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s-6|미륵사지 석탑]]은 사찰 안에 목탑과 함께 건립되었기 때문에 세부적인 면에서나 평면 구조면에서 목탑이 위치하는 공간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에 반해 정림사는 기존의 백제 사찰과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목탑이 금당 앞뜰을 넓게 차지하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탑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시키고 있다. 부여 군수리사지의 경우 탑 평면이 금당 앞의 공간을 차지하는 비율은 1:12인 데에 반해 정림사의 경우는 1:100으로 금당 앞뜰이 그만큼 넓어져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이는 백제 사찰 가운데 정림사가 유일하다. 목탑가람이 갖는 공간적인 협소함을 석탑가람으로 변모시켜 공간을 확보한 점에서 일대 변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인은 미륵사에서 시작된 석탑을 완벽한 단탑(單塔)가람으로 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간적인 장점으로 변모·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금당 앞뜰을 대각선으로 연결하였을 때 정(正) 중앙에 탑을 위치시켜 넓은 공간에서도 탑이 공간과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장악하도록 하는 건축 기법을 사용했다. == 비문 == 이 탑이 평제탑, 평제비라 불리는 이유는 탑의 초층 탑신 전체 면(4면)에 [[소정방]]이 전승기공문을 새겼기 때문이다. 비문의 정확한 이름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전체적인 형식은 1면 24행, 2면 29행, 3면 28행, 4면 36행으로 총 117행이며 각 행은 16, 18자로 이루어져 총 2126자나 된다. 제작 연도와 제작자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록해두었는데 현경 5년(660년, [[무열왕]] 7년) 8월 15일, 당나라의 권회소가 글을 썼다. 내용은 [[당나라]]의 [[고종(당)|고종]]이 소정방으로 하여금 [[사비성]]을 함락시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왕태자 [[부여융]]과 [[부여효]] 외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등 7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내용과 전투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주요 공적을 기록했다. 또한 백제를 접수한 후 행정 구역 정리를 한 내용도 있는데 5[[도독]], 37주, 250현을 두고 호 24만, 인구 620만을 편호로 정리하고 오랑캐(백제)의 풍속을 바꾸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왜 굳이 불탑에다가 이런 글을 새겼냐면 의자왕을 붙잡은 것이 660년 7월 18일이고 이 비석을 새긴 것이 8월 15일, 당군 주력이 본국으로 철수한 것이 9월 3일이었다. 비석을 새로 만들 큰 돌을 캐서 연마하고 글씨를 새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백제의 수도 사비 시가지 한복판에 이미 크게 서 있고 여러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이 탑에 글씨만 새긴 것이다. 실제로 비문을 보면 처음엔 글씨체가 반듯하다가 뒤로 갈수록 고르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는 비문 글씨에 붉은색 물감칠을 했지만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물감이 바래서 붉은색은 아주 미세하게만 남아 있다. == 바깥고리 == * [[https://ko.wikipedia.org/wiki/부여_정림사지_오층석탑|한국어 위키백과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7529&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5853&cid=46710&categoryId=46710|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정림사지 5층석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4022&cid=40942&categoryId=37404|두산백과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국보 제9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090000,34&pageNo=5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분류:부여군]][[분류:백제역사유적지구]][[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석조 불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