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의령군 출신 인물]][[분류:1924년 출생]][[분류:198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전영수.jpg|width=300px]] || || 성명 ||전영수(田永秀) || || 호 ||봉화(奉化) || || 생몰 ||[[1924년]] [[12월 22일]] ~ [[1983년]] [[2월 17일]] || || [[출생지]]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가락리 || || 사망지 ||[[경상남도]] [[의령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전영수는 1924년 12월 22일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가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3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견습직공과 신문배달로 고학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유학생에게도 독립투쟁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41년 9월 일본 오사카 소재 야간중학교 2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최후까지 투쟁한 영웅의 후손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으로 1943년부터 이를 조직화하여 단결을 굳히고, 일거에 봉기하여 완전 독립을 달성하겠다. ”는 각오하에 맹세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우선 동지포섭에 나선 그는, [[남상순(1878)|남상순]]·조경복(趙景福)·동방옥모(東坊沃模)·송촌대교(松村大敎) 등을 포섭한 뒤 비밀결사 충성회(忠誠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그는 국수대중당(國粹大衆黨)에 입당하여 조직결성에 필요한 경험 및 지식을 닦았고, 또 당기 및 당원마크를 고안하기도 하였다. 충성회의 운동방략은 고향에 야간사숙을 열고 수시로 귀국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일·소가 개전하면 즉시 귀국하여 국내의 청소년층을 지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과거의 독립운동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실력의 결핍에 있었다고 보고 실력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안중근]]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명각하면서 30여차례의 모임을 갖고 항일활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발각되면서 1942년 12월에 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2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이후 의령군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전영수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