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한 황제)]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fff><tablecolor=#000><colbgcolor=#a11><colcolor=#ece5b6><tablewidth=300> {{{#ece5b6 '''한 제18대 황제'''}}}[br]{{{+1 {{{#ece5b6 '''肅宗 章皇帝 | 숙종 장황제'''}}}}}} || ||<width=50><:> '''[[묘호|{{{#fff 묘호}}}]]''' ||<bgcolor=#fff><(> '''[[숙종]](肅宗)''' || ||<:> '''[[시호|{{{#fff 시호}}}]]''' ||<bgcolor=#fff><(> 효장황제(孝章皇帝) || ||<:> '''[[연호|{{{#fff 연호}}}]]''' ||<bgcolor=#fff><(> 건초(建初, [[76년]]~[[84년]])[br][[원화]](元和, [[84년]]~[[87년]])[br]장화(章和, [[87년]]~[[88년]]) || ||<:> '''{{{#fff 출생}}}''' ||<bgcolor=#fff><(> [[57년]] || ||<:> '''{{{#fff 사망}}}''' ||<bgcolor=#fff><(> [[88년]] [[4월 9일]] || ||<|2><:> '''{{{#fff 재위}}}''' ||<bgcolor=#a11><:> '''{{{#ece5b6 전한의 황제}}}''' || ||<:><bgcolor=#fff> [[75년]] [[9월 5일]] ~ [[88년]] [[4월 9일]] || ||<^|1><-2><height=32><:>{{{#!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tablewidth=100%><width=50><tablebgcolor=#fff><tablecolor=#000><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fff 성}}}]]''' ||<bgcolor=#fff><(> 유(劉) || ||<:> '''[[휘|{{{#fff 휘}}}]]''' ||<bgcolor=#fff><(> 달(炟) || ||<:> '''{{{#fff 부모}}}''' ||<bgcolor=#fff><(> 부황 [[명제(후한)|명제]], 모후 귀인 가씨 || ||<:> '''{{{#fff 황후}}}''' ||<bgcolor=#fff><(> [[장덕황후 두씨]][br]경은황후 송씨[br][[공회황후 양씨]]||}}}}}}}}} || [목차] [clearfix] == 소개 == [[한나라]]의 제18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3대 황제. == 생애 == [[명제(후한)|명제]]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3살에 [[황태자]]가 되었다. [[75년]]에 아버지인 [[명제(후한)|명제]]가 붕어하여 19세에 즉위했다. 동시에 마황후를 [[황태후]]로 세워 후견하도록 했다. 마태후는 보기 드물게 몸을 사려 친가의 마씨 일족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못하게 하였기에 그녀가 생존했던 장제의 시대에는 아직 [[후한]]의 폐가 된 [[외척]]의 전권이 겉으로 나타난 것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유학을 좋아했다고 하는 장제는 관대한 성격으로 유학의 덕목에 필적한 너그러운 덕치를 이끌었다. 장제의 치세에는 큰 내우외환도 없었기 때문에 후한은 명제의 시대부터 인계된 안정기를 계속 이어갈수 있었다. 또한 유학이 정치적, 사회적, 학술적으로 중요하게 확고하게 뿌리내린 시기로도 평가받는데, [[백호통의]]가 장제의 주도 하에 여러 유명 학자들과의 토론을 거쳐 편찬되기에 이른다.[* 편저자는 [[반고]]이지만 실질적으로 장제의 개입과 영향이 지대했기에 어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를 마태후의 업적이라 평하고 있다. 마황후의 능력과 덕을 잘 알고 있던 명제는 장제를 마황후의 교육 아래 자라도록 조치했고, 이로 인해 장제가 올바른 가치관과 능력을 가진 군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후 본인의 혈족(장제의 외척)에 대한 어떠한 혜택도 금지했기에 장제는 궁내 정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장제의 치세는 또한 규벌 세력이 [[후한]]의 역사에 처음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황후 두씨는 마태후가 죽으면서 후궁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태자 유경의 생모 송귀인과 태자 유조를 낳은 양귀인을 죽음으로 몰고 또 태자를 폐위하여 유조를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원정에는 신통치 않아서 서역에 대한 [[흉노]]의 공격이 자꾸 오자 일단은 서역 지역에서 철수하였고 서역은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 후 아들인 화제의 치세에 [[반초]]의 활약에 의해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회복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외척 문제와 원정 등 장제의 시대는 후한 쇠퇴의 조짐이 보여 왔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골머리를 앓다가 그만 [[88년]] 장제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여 10세 유조가 즉위했다. 이 사람이 [[환관]]을 중용해서 나라를 망하는 길을 터준 '''[[화제(후한)|화제]]'''이시겠다[* 다만 표면상으론 [[화제(후한)|화제]]의 치세까진 [[후한]]의 전성기라 평가할 수 있다. 영원지륭(永元之隆)이라 불리는 [[후한]]의 마지막 대외 사업이 진행된 시기가 [[화제(후한)|화제]] 시기이다. 이 시기 이후 [[중국]]은 [[당 태종]]이 [[동돌궐]]을 정벌할 때까지 400여년간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 장제 이후의 후한 황제들은 모두 장제의 후손들이다. 그의 뒤를 이은 화제의 후손들은 [[상제(후한)|상제]]를 끝으로 황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제가 즉위했을때 나이인 19세, 만 18세를 성인으로 한다면, 장제는 [[후한]]에서 '''성인나이로 즉위한 마지막 황제'''가 된다.[* 즉위 당시 나이는 다음과 같다. 4대 [[화제(후한)|화제]] 만 11세, 5대 [[상제(후한)|상제]] '''생후 약 100일''', 6대 [[안제(후한)|안제]] 만 12세, 7대 [[전소제(후한)|전소제]] 생년미상이나 장제의 손자인 이상 나이를 고려할때 즉위시 미성년자인 것은 확실하다, 8대 [[순제(후한)|순제]] 만 10세, 9대 [[충제(후한)|충제]] 만 2세, 10대 [[질제(후한)|질제]] 만 7세, 11대 [[환제(후한)|환제]] 만 14세, 12대 [[영제(후한)|영제]] 만 12세, 13대 [[홍농왕|소제]] 만 16세, 14대 [[헌제]] 만 9세. 유소년기에 [[황제]]가 된 군주들이 모두 허수아비 신세로 치세를 끝마치거나 [[암군]]이 되는 것은 아니나 [[샤푸르 2세|이는 거의]] [[강희제|예외적인 것]]이고, 어린 황제의 계속적인 즉위는 필연적으로 황권의 약화를 불러온다. 따라서 이는 [[외척]]과 [[환관]] 세력의 비대화를 가져와 [[후한]]의 멸망 원인이 된다.] == 후비와 자녀 == * [[장덕황후 두씨]] * 귀인 송씨(언니) > 경은황후[* 안제 때에 화희황후가 사망하면서 추존의 논의가 있어 격상되었다.] * 청하효왕 유경 > 효덕황(추존)[* 아들 유호가 안제로 즉위하게 되어 추존되었다.] * 귀인 송씨(동생) * [[공회황후 양씨|귀인 양씨]](동생) > 공회황후(추존) * [[화제(후한)|화제]] * 귀인 양씨(언니) * 귀인 신씨 * 제북혜왕 유수 * 하간효왕 유개 * 생모 미상 * 성양회왕 유숙 * 광종상왕 유만세 * 무덕장공주 유남 * 평읍공주 유왕 * 음안공주 유길 == 둘러보기 == [include(틀:후한서)] [include(틀:후한기)]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장제,version=145)] [[분류:한나라의 황제]] [[분류:57년 출생]] [[분류:88년 사망]][[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