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장덕익(張德翼) || || 생몰 ||[[1888년]][* [[1889년]] [[8월 19일]] 설과 [[1891년]] [[7월 6일]] 설도 있다.] ~ [[1947년]] [[11월 8일]][* [[1942년]] [[11월 8일]] 설도 있다.] || ||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 진주읍 비봉동 || || [[본관]] ||[[인동 장씨]] || || 사망지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79년도에 발행한 <부산경남3.1운동사>에 따르면, 장덕익은 1891년 7월 6일생이라고 한다. 반면 경찰청지문 기록에는 1889년 8월 19일생으로 기재되었다. 그는 기독교 계통의 광림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3월 10일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3.1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광림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인 [[강달룡]], [[심두섭]], [[이강우#s-2|이강우]], [[박진환(독립운동가)|박진환]]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서, 교유문 등 2천 매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든 후 거사일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배부하면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며 행진했다. 그러다가 일제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는 중단되었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인동장씨 족보'에 따르면, 장덕익은 50세 전후에 병환이 악화되자 침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중 자식들이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냐고 묻자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말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날짜는 11월 8일로 명시되었지만 사망년도는 1942년설과 1947년설로 나뉜다. 또한 별세 후 진주시 이현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표지석을 세우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장덕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분류:인동 장씨]][[분류:진주시 출신 인물]][[분류:1877년 출생]][[분류:190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