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center><tablewidth=600><tablebgcolor=#fff,#2d2f34><tablebordercolor=#000><bgcolor=#ddd,#191919> '''{{{+2 장 미셸 바스키아}}}'''[br]'''Jean-Michel Basquiat'''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ean-Michel Basquiat.jpg|width=100%]]}}}|| ||<colbgcolor=#ddd,#191919><width=20%> '''출생'''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 || || '''사망''' ||[[1988년]] [[8월 12일]] || ||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width=22]] || || '''직업''' ||[[현대]][[미술가]], [[그래피티]] [[아티스트]] || || '''가족''' ||부모님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 || || '''링크''' ||[[http://basquiat.com/| 공식 홈페이지]] || [목차] == 개요 ==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통칭 '''검은 피카소'''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낙서]],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어 충격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 등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 해링]]과 같이 [[거리]][[예술]]의 틀을 구축한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현 세대 그래피티라이터들 사이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아티스트이다. == 생애 ==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와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장 미셸 바스키아는 유색 [[인종]]으로서 [[차별]]을 경험했고, 자연스럽게 [[슬럼가]]에서 살았다. 바스키아가 7세 되던 무렵 부모가 [[이혼]]하자 수차례 [[가출]]을 시도하고 다니던 [[학교]]마저 뛰쳐나왔다.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바스키아는 [[1980년대]] 당시 [[브레이크 댄스]], 펑크족의 출현, [[레게]], [[힙합]] 등의 [[흑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를 그렸다. 바스키아는 슬럼가에 사는 [[10대]]들이 그린 낙서에 담긴 특유의 [[반항]] 의식을 [[예술]]로 만들었다.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6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세이모 시절.png|width=100%]]}}}|| ||<bgcolor=#ddd> '''세이모 시절의 바스키아''' ||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6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세이모는 죽었다.png|width=100%]]}}}|| ||<bgcolor=#ddd> '''세이모가 해체했을 당시 남긴 그래피티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 || 이후 바스키아는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City-as-School)에서 낙서 화가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낙서그룹 SAMO(Same Old Shit의 약자)를 조직하고 [[스프레이]] 낙서를 시작하였다. 그 후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미술대학(시각예술학교)을 다니던 이들과 [[유흥가]]에서 어울렸고, 특히 이 시기 바스키아는 [[키스 해링]]과 만났다고 한다. 이후 [[1980년]] 바스키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된다.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6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워홀과 바스키아.png|width=100%]]}}}||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를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워홀은 자신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 실력을 바탕으로 '화가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렸고 바스키아는 그런 워홀 덕분에 '유명한 화가'라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았는데 전에 없던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뉴욕 [[미술계]]를 휩쓸었던 바스키아는 어느덧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 유명세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다.'같은 여러 [[소문]]들과 [[갈등]]이 바스키아를 괴롭혔고 결국 바스키아는 워홀과의 공동 전시 실패를 계기로 교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바로 워홀의 사망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바스키아에게 큰 상실감과 심각한 [[마약]] [[중독]]을 초래했는데 결국 바스키아는 [[헤로인]] 중독으로 27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 작품 ==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6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basquiat.com/fallen_angel-orig.jpg|width=100%]]}}}|| ||<bgcolor=#ddd> '''Untitled (Fallen Angel), 1981''' || 바스키아는 마치 [[원시인]]이나 어린 아이같은 그림을 그린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바스키아의 그림을 인종 문제를 비롯해 당시 뉴욕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비극]]과 [[유머]]가 공존하는 풍자적인 화풍이 그의 아이덴티티다. === 대표 작품 ===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6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rown, 1982.jpg|width=100%]]}}}|| ||<bgcolor=#ddd> '''Crown, 1982''' || 우리가 흔히 아는 이 뾰족뾰족한 [[왕관]]이 바스키아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특정 아티스트 그리고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이 왕관은 훗날 왕관만을 그려 넣는 것 외에 점차 본인의 [[서명]]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과 다름 없는 부분이 되었다. === 미국 아티스트 중 최고가 낙찰 === ||<tablebordercolor=#000><tablewidth=6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 미쉘 바스키아 무제.jpg|width=100%]]}}}|| >죽어도 바스키아를 놓아주지 않는 명성 작품 무제가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의 패션 이커머스 조조타운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에 의해 앤디 워홀의 기존 기록을 뛰어넘는 최고 가격인 '''110,500,000 달러'''로 낙찰되었다. == 기타 == * 바스키아와 관계가 있었던 현대미술가 [[줄리앙 슈나벨]]이 전기 [[영화]]를 만들어 [[감독]] [[데뷔]]를 하기도 했다. * 여담으로 앤디 워홀을 우연히 본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10달러에 강매하려고 했었던 일화가 있는데 앤디 워홀은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라며 거절을 했었고 그때 당시 바스키아가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라고 응수했었다. * 미국의 록밴드 [[스트록스]]의 6집 [[The New Abnormal]]이 바스키아의 작품인 Bird on Money를 앨범 커버로 차용하였다. [[분류:화가]][[분류:예술가]][[분류:미국의 화가]][[분류:미국의 인물]][[분류:1960년 출생]][[분류:1988년 사망]][[분류:뉴욕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