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제1차 세계 대전]] == [[협상국]]으로 갈아탄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국]]의 일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대결한 전선이자 [[참호전]].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였으며 알프스 산맥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게임 [[배틀필드 1]]의 캠페인 미션 중 하나인 '''사보이아에 영광이 있으라!! 가 이 전선을 다룬다.''' === 발단 === 원래 [[이탈리아 왕국]]은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대전 때 중립을 선언하여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을 지켜보던 중 협상국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또한 이미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와 비밀리에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날리며 전쟁에 참여한다. === 전개 === 1915년부터 1917년 초 까지 대략 11차 [[이손초 전투]]를 벌어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진다. 이러한 전투로 인해 전선은 더욱 고착화되고 양 진영 모두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저번 1916년에 일어난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동부전선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 [[독일 제국|독일]]한테 동부 전선을 전부 맡아달라고 요청을 보냈고 이에 독일은 제안을 거부하는 대신 이탈리아 전선에 증원병을 보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최초로 [[독일 제국군]]이 이탈리아 전선에 참여한 전투인 '''[[카포레토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독일군의 참전'''과, 이전과 다른 대규모 독가스 공격은 [[이탈리아 왕국군|이탈리아군]]에게 엄청난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까지 후퇴하여 자칫 잘못하면 파국을 맞이할 뻔했지만 다행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군을 내 쫒는것에 만족하여 공격을 멈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자력으로 피아베 강에 공세를 가했지만 이탈리아군도 재정비를 하여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1918년, 말... [[카포레토 전투]]로 인한 굴욕적인 패배를 갚기 위해 이탈리아군은 비토리오 베네토로 진격하여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를 벌인다. 이탈리아군은 승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제대로 한방을 먹였다. 이는 이탈리아군 최대의 승리이다. === 결과 ===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승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항복하게 되고 제국도 '''멸망'''하게 된다. == [[제2차 세계 대전]] ==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중기에 [[이탈리아 왕국]]을 통해 [[나치 독일]]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안치오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해변에 상륙한 [[연합군]]과 이 지역에 구스타프 선을 설치하고 필사적인 방어전을 벌인 [[독일군]]이 형성한 전선. [[김영옥(군인)|김영옥]] [[대령]]이 활약한 전선이기도 하며, 독일의 [[공수부대]]가 전설을 만들어낸 전선, 그리고 [[터스키기 에어맨]]이 활약한 전선이기도 하다. === 발단 === 이탈리아 전선의 시작은 [[북아프리카 전역]] 전선의 종말에서 시작한다.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장악하여 [[횃불 작전]]을 끝낸 연합군은 다음 목표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미국]]이나 [[소련]] 등은 늦어도 [[1943년]] 이내에 [[비시 프랑스|프랑스]] 등 [[나치 독일|독일 본토]]와 가까운 곳에 상륙해서 제2전선을 만들자고 주장한 반면, [[영국]]의 경우에는 전후 [[지중해]] 패권 유지와 소련의 [[동유럽]] 진출등을 저지하기 위해 일단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인 [[이탈리아]]를 공격해서 독일을 남쪽으로부터 공격하자는 안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무기대여법|연합군의 물량을 책임지는]] 미국과, [[독소전쟁|독일군의 주력과 피터지는 싸움]]을 계속 벌이는 소련의 의향을 거부할 수 없던 영국은 일단 원칙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제안대로 나가지만, 북아프리카의 확실한 확보를 위해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해도 제2전선을 만드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영국의 안으로 최종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칠리아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연합군은 [[영국]]의 [[낚시]]에 걸리고 말았다. 시칠리아를 공격하면서 미국이 슬슬 정확한 계산을 때리기 시작하자, 1943년 안에는 제2전선을 형성하는 데 쓸 충분한 물자를 보유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오고, [[태평양 전쟁|태평양 전선]]의 요구수량도 급증한데다가, 막상 시칠리아에 발을 올려놓고 보니, [[이탈리아 왕국군]]을 도와주러 온 [[독일 국방군]]의 저항이 심해서 쉽사리 이 방면의 군대를 빼서 영국에 보낸 후, 제2전선을 형성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며, 이럴 경우, 물자뿐 아니라 병력도 모자라서 더 이상 제2전선을 형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실상 1943년 내 제2전선 형성은 불가능해졌고, 곧 이어 시칠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바로 옆에 이탈리아 반도도 있으니 몇 개월동안 병력을 놀리느니 차라리 이탈리아도 공격하자는 제안이 나오게 된다. 결국 [[시칠리아 전투]]의 승리로 인해 '''내친 김에'''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는 것이 이탈리아 전선의 시작이 되었다. === 전개 === 일단 시작은 좋았다. 살레르노 상륙 작전을 통해 남부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1주일 동안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미군이 격전을 벌이긴 했지만 곧 [[영국군]]과의 협공으로 인해 [[독일 국방군|독일군]]은 교두보 일소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정부는 내분을 일으켜 결국 붕괴되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연합군의 계산이 먹혀들었다. 그러나, 좋았던 것은 여기서 끝.[* 꼭 그런건 아니다.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독일 국방군이 이 시점부터 공격 대신 수비 위주로 전략을 변경하면서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독일 국방군]] 지휘관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 원수는 즉시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을 움직여 근처의 [[이탈리아군]] 병력을 장악, 상당수의 병력과 장비를 독일군의 지휘하에 두는데 성공했고, 독일 친위대 [[슈츠슈타펠|SS]]는 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그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살로 공화국]]을 발족시켜 독일군을 돕게 했다. 결국 빠른 승리는 물건너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연합군에게 대참사가 벌어질 뻔한 일도 있었다. 당시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기 직전,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탈리아는 연합군 측에게 '[[공수부대]]를 [[로마]]에 직접 투입하고 이탈리아군이 이와 협력해서 독일군을 몰아낼 수 있다'라고 제안했다. '''성공만 한다면'''단숨에 독일군을 로마 이북의 북이탈리아 지역으로 몰아낼 수 있는 기회여서 상층부는 이 제안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실제로 82공수사단을 주력으로 한 공수부대를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의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소수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매튜 리지웨이였다. 리지웨이는 로마에 주둔한 독일군을 이탈리아군과 공수부대 병력만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의심을 했다. 이 때문에 리지웨이는 맥스웰 테일러에게 로마 인근을 정찰해서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의 상황을 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찰 결과는 리지웨이의 우려 그대로였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독일군과 교전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작전은 취소되었다. [* 출처- 앤서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 만약 저게 진짜로 실행되었다면 [[마켓 가든 작전]] 못지않은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연합군은 독일군과 살로 공화국군이 만든 방어선과 험준한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 전진이 지지부진해지자 [[로마]] 근교인 [[안치오 상륙 작전|안치오에 상륙작전]]을 벌였으나, 안치오에 상륙한 연합군 부대는 8일간의 전투동안 전진하기는 커녕 오히려 해변에서 포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공권의 상실과 물량의 우세가 명암을 갈랐다. 독일군의 치밀한 방어선에 직면한 연합군은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총동원해 이탈리아의 독일군을 서서히 북쪽으로 몰아냈고, 결국 이탈리아 신설 파시스트 정부 살로 공화국은 무너지게 된다.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달아내려 했으나 공산당 계열의 반독[[게릴라]]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그의 시체는 거꾸로 매달려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구타당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자신도 그렇게 될것이 두려워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자살하면서 그의 운전수에게 자기 시체를 태워줄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살로 공화국의 붕괴는 [[나치 독일]]의 붕괴에서 불과 1-2달 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종전 때까지 연합군 병사들은 이탈리아 본토마저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이는 이탈리아 반도의 특성상 반도를 가로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기 딱 좋았으며, 이 방어선을 넘고 북쪽으로 가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반갑게 맞이한다. 게다가 [[로마]] 점령 이후에는 목표물이 될만한 가치 있는 표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저 멀리 진격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연합군:대충 멀리 처박아 뒀고 더 나가봤자 별 득도 없으니 무시하자~~ 또한 로마 점령도 이래저래 좋은 말을 듣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연합군이 로마를 점령한지 딱 2일 뒤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지면서 일반 시민들에겐 묻혀버렸다. 여기에다 로마 점령을 명령한 [[마크 클라크]]는 오히려 독일군에게 후퇴의 기회를 제공해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로마 점령 전 미군의 전략은 [[안치오 상륙 작전|안치오 교두보에 고립된]] 병력을 구출하고 구스타프 라인을 우회해 독일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클라크가 포위 기동 대신 로마 점령을 선택해 버렸고, 그 틈에 독일군 주력이 북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때문에 마크 클라크는 로마를 점령한다는 명예욕 때문에 전략 전체를 망쳤다는 큰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한편 1943년 12월 2일에는 심각한 화학무기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바리]] [[항구]]에 정박한 연합군 함선들을 독일 공군이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공격받은 수송선 중 한 척이 미군 당국이 만약의 상황이 닥칠 경우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대량의 [[겨자 가스]]를 싣고 있었다. 이 누출된 겨자 가스가 항구를 덮치는 바람에 연합군 장병만 7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항구에 있던 민간인 사상자를 합치면 1000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 지체 === 전쟁 말기로 갈수록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형성된 [[서부전선]]과 [[독소전쟁|동부전선]]의 급박한 상황과, 서부전선이나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점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은 병력을 차출당해서 공격자와 방어자 비율이 1:1이 되어버려 더 이상의 [[공세 종말점|공세가 불가능해지는 등]]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전선의 변화가 별로 없는 매우 느긋한 전장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 병사들이 사고를 치거나 [[탈영]]하는 사례가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공세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연합군이 뭔가 화끈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항공 [[폭격]]과 [[포병]] 사격 정도였다. 하루는 어느 [[미군]] 포병대가 휴식시간 중 심심해서 다음과 같은 계산을 했다. 화포와 포탄의 값과 운송 비용, 포병대 자신들의 식비와 봉급 등등을 계산해서 이 포격만으로 저 독일군을 모두 죽인다면 얼마나 비용이 들지 계산한 것. 그러자 독일군 1명당 수만 달러의 거금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러자 포병대원들은 '차라리 그 돈을 독일군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게 낫겠다!'라고 말했다는 야사. 또 [[1944년]] 말에 [[나폴리]] 부근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는데,[* 화산재가 엔진에 들어가면서 주위에 주둔한 [[B-25]] 편대가 몽땅 못쓰게 되긴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사고 현장을 조사하러 산 미 육군 헌병들이 아직 뜨거운 [[용암]]에 [[식빵]]을 구워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반면 독일군은 비록 2선급 병력이지만 총 20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이곳에 묶여있었는데, 당사자들은 예상도 못했지만 [[베를린]] 함락을 목전에 두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기 전에 서쪽으로 도망쳐야 했던 수많은 독일군과 달리 이들은 온전히 서방 연합군의 [[포로]]가 되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독일군의 20개 사단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연합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진격을 멈추면 안되기 때문에 이따금 의미없는 전투를 벌이며 의미없이 많은 목숨이 사라져 갔고[* 어느 정도였냐면 연합군 측에서만 3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당연히 서부전선보다는 적은 사상자 수 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준.], 심지어 이 시기에는 [[영국]] [[의회]]에서 여성 정치인 레이디 애스터가 "프랑스에서 진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편하고 조용한 이탈리아에 나와있는 D-day 기피자들"이라는 발언을 할 정도로 이탈리아 전선 자체의 가치가 의심받을 지경이었다.[* 후일 레이디 애스터는 이 발언을 한 사실을 부정한다. 하지만 당대에는 거의 망언 정도로 전선에 퍼졌으며 일부에서는 풍자로 [[릴리 마를렌#s-1.4.2.1|디데이 기피자의 발라드]]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레이디 애스터의 발언의 진위는 접어두고라도 레이디 애스터가 2차 대전 내내 비난을 받았던 건 [[에드워드 8세|전쟁전에 친독일/반공 노선의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어느정도냐면 [[뮌헨 협정]]이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온 [[체코슬로바키아]] 난민들보고 "당신들이 [[빨갱이]]라면 영국이 아니라 소련에 가야하는게 아닌가?" 라고 하고, [[안슐루스]]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내비친 [[교황]] [[비오 11세]]를 비난하는등 도를 넘은 모습을 보여줘 당시 [[영국 노동당]]의 대표적 친소파인 스탭포드 크립스 경이 "그녀는 [[베를린]]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멤버]]다."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체임벌린과 처칠의 반독 노선에 비판적이라 미운 털이 박힌 것도 있다. 레이디 애스터는 인도-미얀마 전역의 영국군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물의를 일으켰고 소문에 의하면 미얀마 전선에서 온 장교와 딸의 문제 때문에 더 앙심을 품었다는 이야기까지도 돌았다. 거의 [[흑색선전]]급. 그 외에도 '''"흑인들은 노예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덕분에 기독교를 접했으니까요."'''라는 [[인종차별]]+[[인권침해]]적 망언이나 [[로디지아]]의 백인 정치인들 앞에서 '''"나는 흑인 노예 소유주의 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지껄이는 등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죽어나는건 이탈리아의 민간인들이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남부 지역은 어느 [[영국군]] [[아일랜드]] 근위대원의 말처럼 "1943년의 추운 겨울을 나기에는 빈말로도 행복하지 않은 곳"이었다. 풍요로운 미국에서 나폴리 항으로 쏟아져 들어온 각종 물품들이 희희낙락하게 한 건 암시장의 [[마피아]]들뿐이었던 반면 평범한 이탈리아인들은 거의 아사 직전이었다. 파시스트들이 이미 한 달 150g의 빵(독일에게 대놓고 노예 취급받던 [[폴란드]]인들과 비교해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까지 줄였던 시민들의 배급 식량이 그나마도 죄다 독일군에게 장악되었던 것이다. 독일군들이 손을 대지 않아 이탈리아인들이 먹을 수 있었던 거라고는 예전에는 [[돼지]] 여물 취급받았던 [[숲]]속의 야생 밤뿐이었다. 밀가루를 빼앗긴 이탈리아인들은 밤을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소금]]이었기에, 큰 맘을 먹고 돼지를 잡아도 고기를 보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독일군이 쓸고 간 뒤에 한 마리라도 남은 돼지가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독일 군정당국은 제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이탈리아 공무원들의 애원을 철저히 무시했다. 독일군이 이탈리아 병사들을 강제 노역장으로 끌고 가면서, 밭에서 일할 수 있는 남자의 씨가 말랐던 것이다. 영양실조가 만연하고, [[비누]]와 더운 물을 거의 사용할 수 없어 이가 들끓으면서 [[발진티푸스]]로 인한 대재앙이 눈앞에 닥쳐왔다. 미군이 다급히 [[DDT]]를 공수해와 주민들에게 퍼부은 후에야 간신히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미군들이 버린 음식찌꺼기나 [[담배]]꽁초조차 주워모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나폴리]]에서는 풋내기 창녀로 전락한 여성들이 단돈 25센트나 [[레이션]] 하나에 몸을 팔았고 남이탈리아 끝 바리에서는 담배 다섯 개비면 여자를 살 수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 10명 중 1명이 성병에 걸리면서, 1944년 [[봄]]에 성병 치료를 위한 [[페니실린]] 사용이 허용되었다.[* 앤터니 비버 "제 2차 세계대전"中] 이렇듯 이탈리아의 민간인들,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민간인들은 워낙에 [[살로 공화국]]과 독일 군정청에게 크게 시달렸다 보니 반독 감정이 매우 심했고, 이는 1946년 이탈리아 왕국 존립투표에서 왕당파가 패하는 원인이 된다.[* 연합군에게 일찍 해방되서 그나마 독일군에게 덜 시달린 이탈리안 남부 및 시찰리아는 왕정 존속을 주장했고, 살로 공화국을 비롯해 독일군에게 더 오래 시달렸던 북부는 왕정 완전 페지를 주장했다. 결과는 전술했듯이 반왕당파가 승리했고, 국왕 일가는 해외로 추방되었다.][* 다만 왕정 존속투표 자체는 굉장히 치열했다.] === 종말 ===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꾸준한 진격 끝에 전쟁 말기 이탈리아 전선은 드디어 독일군의 최종 방어라인인 '''고딕라인'''만 남았고, [[베를린]]을 동부전선의 소련군에게 담당하도록 한 결정으로 인해 남아도는 무기와 장비, 군대가 집결해서 마지막으로 포격지원과 항공지원을 총 동원해 '''호쾌한 진격'''을 시작했다. 이 시점의 독일군은 본국과의 연락과 보급이 끊어진데다가 누가 봐도 독일이 패전한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일단 고딕라인이 무너지자 더 이상의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딕라인을 돌파한 뒤엔 포(Po) 강 유역인데 이 곳은 이탈리아에서 몇 안되는 평야 지대였고, 이는 연합군의 쾌진격에 더욱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살로 공화국이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도주중 잡혀서 처형당한 때다. 결국 독일의 패전소식이 전해질 때, 연합군의 선두는 이탈리아 국경선까지 진격해서 [[스위스]]로 통하는 통로를 봉쇄하여 독일군이 중립국인 스위스로 튀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로서 간신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탈리아 전역을 점령하게 된다. === 연관 항목 === * [[몬테카시노 전투]] * [[시칠리아 전투]] * [[안치오 상륙 작전]] [각주] [[분류:제2차 세계 대전]][[분류:제1차 세계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