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이애라.jpg|width=300px]] || || 이름 || 이애라 || || 한문 || 李愛羅 || || 생몰년도 || 1894년 4월 7일 ~ 1921년 9월 4일 || [목차] == 개요 == 이애라는 애국부인회를 지도하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한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이다. [[이애일라]](李愛日羅)라고 불리기도 한다. == 생애 == 1894년에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졸업한 이애라는 졸업한 이화학당에서 교사직을 맡는다. 그러다 [[이규갑]]을 만나 20살에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공주시|공주]] 지역에서 교사직을 하게 된다. 이규갑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교편을 내려놓자 이애라도 이에 따라 교편을 내려놓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게 된다. [[3.1 운동]] 당시에는 애국부인회를 지도해서 만세운동에 참가한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출옥한 후 다시 애국부인회를 이끌고 이번엔 군자금 모금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헌병이 쳐들어와 이애라의 100일 된 아기를 다짜고짜 땅에 내동댕이쳐 즉사하게 하는 극악무도한 일을 당하고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 이 무렵 남편 이규갑은 이애라의 도움을 받아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러시아]]로 망명해 한국[[독립군]]사관학교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했다. 이 때문에 이애라는 출옥한 뒤에도 남편의 행방을 시도때도 없이 추궁당했다. 견디다 못해 [[아산시|아산]]으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오래 버틸 수 없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한다. 이애라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함경북도]]까지 갔다가 거기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다시 고문을 받는다. 계속된 고문으로 이번에는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었기에 일제는 의사를 불렀고, 천운으로 부른 의사가 이애라의 큰조카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모르는 척 하며 "상태가 위독하니 격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해 이애라는 석방될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애라는 다시 상봉한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어디 가지 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라다. 이 말을 하고 며칠 뒤 후유증이 겹쳐 숨을 거뒀다. 사후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충남 아산의 충국순의비에 이름이 새겨진다. == 참고 자료 ==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15~216p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94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아산시 출신 인물]][[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