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함평군 출신 인물]][[분류:1874년 출생]][[분류:191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이강산.jpg|width=300px]] || || 성명 ||이강산(李江山) || || 생몰 ||[[1874년]] [[4월 16일]] ~ [[1910년]] [[6월 6일]] || || [[출생지]]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용정리 || || 사망지 ||대구형무소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강산은 1874년 4월 16일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용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7월 하순경 함평군 대야면 복룡리에서 [[박치일]]·[[정인술]]·[[박장봉]]·[[서성학]]·[[양창국]]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대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1909년 8월 29일 밀정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박복남(朴福男)이 이양삼(李良三)의 주막에 모여 있는 것을 탐지하고 박치일, 정인술, 박장봉, 서성학 외 2명에게 이들을 처치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이 명령을 받들어 이양삼의 집에 이르렀을 때, 마침 양창국과 [[박병수(독립운동가)|박병수]]가 그곳에 와 있었다. 이들도 동참할 것을 결의했고,그들은 이판안, 김정태, 최치도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박복남을 산중으로 연행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하들과 함께 일제 헌병대에게 체포된 이강산은 1909년 12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 및 모살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1910년 3월 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1910년 6월 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강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