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2><tablealign=right><tablewidth=350><tablebordercolor=#4A2D5B><tablebgcolor=#4A2D5B> '''{{{#FFD700 [[신라/왕사|{{{#FFD700 신라 제3대 국왕}}}]][br]{{{+1 儒理 尼師今[br]유리 이사금}}}}}}''' || || '''[[시호|{{{#FFD700 시호}}}]]''' ||<colbgcolor=#fff,#2d2f34>'''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 || '''{{{#FFD700 별호}}}''' ||노례 이사금(弩禮 尼師今)[br]세리지 이사금(世里智 尼師今) || || '''{{{#FFD700 출생[br]{{{-3 (음력)}}}}}}''' ||[[기원전 20년]](?)[* 이도 다만 추측이다. 남해 차차웅의 유력하게 추측되는 생년으로 보아서 이다. 매제가 되는 탈해 이사금 보다는 많았거나 비슷햇을 것으로 추정한다. ] || || '''{{{#FFD700 사망[br]{{{-3 (음력)}}}}}}''' ||기원후 [[57년]] 10월 || || '''{{{#FFD700 능묘}}}''' ||사릉원(蛇陵園) || || '''{{{#FFD700 재위[br]{{{-3 (음력)}}}}}}''' ||기원후 [[24년]] 9월 ~ [[57년]] 10월[br]{{{-2 (33년 1개월)}}} || || '''{{{#FFD700 성씨}}}''' ||박(朴) || || '''{{{#FFD700 휘}}}''' ||유리(儒理) / 치리(治理) / 치리(齒理) || || '''{{{#FFD700 부모}}}''' ||부왕 [[남해 차차웅]], 모후 [[운제부인]] || || '''{{{#FFD700 형제}}}''' ||여동생 [[아효부인]] || || '''{{{#FFD700 자녀}}}''' ||왕자 [[일성 이사금|박일성]](朴逸聖), [[파사 이사금|박파사]](朴婆娑)[br]왕녀 2명 || [목차] [clearfix] >"'''내가 모자란 몸으로 군림하매 백성을 먹여살리지 못하여 노약자들을 이런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었으니, 이는 내 죄이다.'''"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使老幼至於此極, 是予之罪也. >----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5년조[[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64&cid=62145&categoryId=62226|#]] == 개요 == [[신라]]의 제3대 [[국왕]]. 처음으로 [[이사금]] 칭호가 나타났다. [[남해 차차웅]]과 [[운제부인]]의 장남이자 [[태자]]. 현대의 어느 박씨가 됐던 유리 이사금의 피가 섞여 있다. 그의 장남은 [[일성 이사금]], 차남이 [[파사 이사금]]으로 모든 박씨가 근원한다. 6부촌 여섯 부족에게 [[중국]]식 성을 내리기도 하는 등 아직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초기 신라에 많이 기여한 왕이다. 유리 이사금은 달리 치리(治理), 치리(齒理), 노례 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에 [[유리명왕]][* 유리명왕 쪽이 1~2세대 앞의 인물로 재위 기간은 겹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 유리왕의 사망년도와 신라 유리 이사금의 즉위연도는 채 10년이 차이나지 않는다. 사실상 동시대라고 봐도 무방하다.]이라는 동명이인이 보이는데 [[한자]]는 다르다. 제14대 왕 [[유례 이사금]](석씨)에 대해 [[삼국사기]]에 '제3대 왕, 제14대 왕이 이름을 함께 한다'라고 기록해 유리 이사금과 동명이인이 됨을 알 수 있다.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의 딸, 혹은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 박씨, 또는 사요왕(辭要王)[* 이 사요왕의 '왕'은 갈문왕을 의미하는 거라는 설이 있다. 허루 갈문왕이 '허루왕'으로, 마제 갈문왕이 '마제국왕'으로 적힌 경우가 있어 사요왕의 '왕'이 국왕이 아니라 '갈문왕'을 의미하는 거라는 설이 정설에 가깝다.]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 일생과 업적 == 남해 차차웅이 [[후계자]]를 확실하게 정해주지 않고 둘 중 현명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유언]]했는데 일단 태자라서 계승 서열이 높았던 유리는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 이사금|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했지만 석탈해와의 유명한 잇자국 대결을 통해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서기 24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尼師今)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다른 해석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치아]] 갯수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다는 얘기[* 정확히는 이가 많다 = 나이가 많다 = 현명하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옛날 동양에는 치아가 많으면 존귀하다는 인식도 있었는데 1천여 년 뒤 [[송나라]] 시대에 쓰여진 [[관상학]] 서적 마의상법(麻衣相法)에서는 '치아가 38개면 [[왕]]이나 [[제후]]이고, 36개면 [[관료]]나 [[갑부]], 32개인 사람은 [[중인]](中人), 30개는 [[보통]] 사람, 28개는 하층의 [[가난]]한 부류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석탈해 일화와는 시대 차이가 상당히 나지만 치아가 많을수록 현명하고 존귀하다는 인식이 하루아침에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참고할 만하다. 참고로 따로 병이 없다면 일반인의 치아 개수는 [[사랑니]]까지 포함해 32개다. 32개를 넘어가면 현대에는 [[과잉치]]라고 해서 [[질병]]으로 취급한다. 기록대로면 유리 이사금은 치아 생성 세포 [[DNA]]에 변이가 일어나 과잉치를 가진 질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에 따라 서로 [[떡]]을 문 후 잇자국이 가장 많은 유리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질금(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잇금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빨 갯수와 덕망이 상관 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연구는 없겠으나 최소한 초기 신라에서의 [[왕위]]란 [[가문]] 배경이나 정통 계승권, [[군주]]로써의 행정력, [[카리스마]]보다는 '덕망'이 상위에 있는 가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다른 [[동양]] 문화권은 물론 [[서양]]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초창기 신라만의 문화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효율적일 수도 있는데 어차피 [[원삼국시대]]인 신라 초창기에 지리상 [[한반도]] 남동쪽 구석에 있는 신라는 각 씨족 중에서 누가 군장이 될거냐 서로 싸우다가 인구가 줄어들거나 결속력이 약해지기보다는 덮어놓고 미신을 만들어서 이빨 개수 기준에 따라 최대한 수평적으로 통치하는게 나았을 수 있다. 그러다 물산이 풍부해지고 규모가 커지면 주변 씨족들이나 야만인들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고 오히려 이사와서 인구가 늘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역사학]]적으로 아직 [[국가]]로 분류하지 않는데다 [[호패법]]도 없어서 이민이 아주 자유로웠다.][* 이는 물론 인구가 적었을 때 얘기다. 인구가 많아짐에 비례해 점점 중앙집권화가 필요하며 그것을 보좌할 각종 제도, 법, 군대 등이 없으면 통치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이것을 신라에 정착시킨 세력이 [[김알지]] 계통의 [[경주 김씨]]들이다.] 대체적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의 전통 문화를 만든 것 이외에는 별거 없는 무난한 왕이었다. 단, 42년 이후 승하할 때까지 15년 정도 기간 동안의 역사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왕인 [[탈해 이사금]] 문서를 참고할 것.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성씨)|이씨]], [[최(성씨)|최씨]], [[손(성씨)|손씨]], [[정(성씨)|정씨]], [[배(성씨)|배씨]], [[설(성씨)|설씨]]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주요 [[한국의 성씨]]들이 유리 이사금 대에 정립됐다는 것. 물론 [[고대]] 한국에는 아직까지 성씨 개념이 거의 없었고 6촌 → 6부 개념은 분명히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훗날 신라 중대 이후 어느 시점에 가문의 [[조상]]까지 소급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한민족]] [[명절]]인 추석의 여러 풍습들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유리 이사금 때다. [[추석]] 문서 참조. 5년(서기 28년) 겨울에는 유리 이사금이 나라를 둘러보다가 한 [[할머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걸 보고는 느낀 바가 있어 옷을 벗어 덮어주고 밥을 먹인 뒤에 관리에게 명해 나라 곳곳의 [[홀아비]], [[과부]], [[고아]], 부양 가족이 없는 [[노인]]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 정책을 펼치자 신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주변 나라에까지 나서 백성들이 신라로 몰려왔으며 이들이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새로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전근대 시대는 인구가 많아서 생산력이 높은 나라가 거의 무조건 유리했으므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경주시]] 일대의 [[성읍국가]]였던 초기 신라가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 북방에서는 고구려의 제3대 국왕 [[대무신왕]] [[무휼]]이 [[낙랑군]]을 격파하자 5천여 명의 낙랑 사람들이 [[피난]]왔는데 낙랑이 예전에 신라를 여러 번 공격했음에도 유리 이사금은 낙랑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이 역시 초기 신라의 인구 증가와 국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사실 신라의 전신 6촌이 [[고조선]] 유민이었고 낙랑인은 고조선 멸망 후 설치한 낙랑군 사람이자 대부분은 [[한나라]] 지배를 받는 고조선 [[유민]]이므로 신라 입장에서는 오는 사람을 받지 않을 이유도 없다. 33년을 재위한 후 중병에 걸리자 두 아들(일성, 파사)보다 매제 [[석탈해]]의 재능이 뛰어나니 탈해에게 왕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해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낸다. 아무튼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평가와는 별개로 훗날 늦게나마 각자 왕에 오르긴 한다. >"'''탈해는 신분이 나라의 친척이고 지위는 날 보좌한 신하이니 여러번 공이 있다. 짐(朕)의 두 아들은 그 재능이 따라오지 못하니 내가 죽은 뒤, 대위(大位)를 있게하라. 내 유훈을 잊지 말라.'''"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 가족 관계를 살펴보자면 둘째 아들이 제5대 국왕 [[파사 이사금]], 첫째 아들이 제7대 국왕 [[일성 이사금]]인데 [[한가위]]의 유래를 설명할 때 2명의 딸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파사 이사금이 즉위할 때 '일성이 적자'라는 언급이 있는 탓에 유리 이사금에게 다른 [[왕비]]나 [[후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역사학계에서는 그리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 첫째 아들의 나이를 따지면 [[늦둥이]]라도 조금 괴랄한데다 왕위에 오르는 순서가 이상하기 때문에 둘이 정말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삼국사기]] 기록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64&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본기]]''' 一年秋九月 유리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혁거세 거서간|시조]] 묘에 제사지내다 五年冬十一月 [[진휼]]을 실시하다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十一年夏五月 [[서라벌|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十一年夏六月 [[홍수]]가 나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十七年秋九月 [[맥(동음이의어)#s-2|맥국]]과 우호를 맺다 十九年秋八月 [[맥(동음이의어)#s-2|맥]]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三十四年秋九月 [[탈해 이사금|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三十四年冬十月 왕이 죽다 일부 기록은 [[진흥왕]] 시대의 것을 상대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 관련 기록 == * [[임금]] * [[떡]] [[분류:이사금]][[분류:기원전 20년 출생]][[분류:5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