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미국 국무장관]] [[분류:1860년 출생]] [[분류:1925년 사망]] [[분류:일리노이 주 출신 인물]] [[분류:일리노이 대학교 출신]] [include(틀:역대 미국 국무장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WilliamJBryan1902.png]] William Jennings Bryan. [목차] == 개요 == >'''“[[기업인|당신]]들은 노동자의 이마에 가시면류관을 씌울 수 없습니다! 인류를 금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대통령편(12권)에서 [[이원복]] 교수는 이 연설을 '''역대 선거연설 중 최고'''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도시를 불태우더라도 농장을 남겨두면 도시는 마술처럼 다시 솟아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농장을 파괴하면 이 나라의 모든 도시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랄 것입니다.” [[미국]]의 41대 [[국무장관]]. 1860.3.19 ~ 1925.7.26.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3번이나 낙선한]] --비운의-- 인물로[*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유력정당에서 대통령에 세 번 도전해서 세 번 다 낙선한 인물은 브라이언이 유일하다.][* 같은 시대 [[미국 사회당]]의 [[유진 뎁스]]가 다섯 차례나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1912년 최대 6%를 득표한 군소후보였다. 참고로 1900년 대선은 브라이언의 두번째 도전이자 뎁스의 첫 출마였는데, 뎁스는 불과 0.63%를 득표했다. 1908년에는 2.83%를 득표하며 나름 고춧가루.]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콩라인]] 정치인 정도로 볼 수 있지만... 사실 당대 미국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은 공이 있는 인물로 미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권익에 신경쓰면서 혁신적인 공약과 정책을 내걸었다. 당시 브라이언이 주장한 독과점 기업 규제와 노동자 권익 보호, [[여성]] 참정권의 보장을 통한 완전한 보통선거, 1일 8시간 근무제도 도입, 소비자보호법, 상원의원 직선제 등은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우드로 윌슨]] 치하에서 법제화되었고, 마저 도입되지 못한 법안들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에서 시행되어왔기에 대통령만 되지 못했지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미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정치인인 셈. 사실 브라이언 이전만 해도 [[미국 민주당]]은 인종차별적인 당원들이 당당하게 활동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는데[* 어찌보면 당연한게 이 당시 민주당은 1860년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링컨의 공화당에 반기를 들고 남북전쟁을 일으킨 남부 세력이 주축 중 하나인 정당이었다. [[공화당 급진파]]들을 비난하던 리디머와 부르봉 민주당 등이 대표적. 지금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 브라이언 이후 민주당은 [[인민당]]과의 연합 과정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많은 진보적인 정책들을 발굴했으며 인종간의 평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이후 민주당이 진보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도 평가되기에[* 민주당의 진보적인 색채가 고정된 것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기 이후부터다.] 단순히 콩라인 정치인 정도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비중이 제법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 전반적 생애 ==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장로회]] 교인이 되어 14살의 나이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후일 브라이언은 세례를 받은 날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일리노이 대학을 마치고 변호사가 된 그는 [[앤드루 잭슨|잭슨]] 민주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주당(미국)|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890년 네브래스카에서 하원의원이 된 것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1890년과 1892년 네브래스카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기업가와 부유층의 횡포에 맞서 서민,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89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존 멜른 터스튼에게 패배하며 야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국 순회연설을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유명세를 쌓았고, 이러한 것들이 인정받아 1896년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이 때 당시 전당대회에서 [[금본위제]]를 반대하며 했던 연설이 지금까지도 명연설로 남아있다.[* 개요 첫머리에 적힌 가시면류관, 금 십자가 관련 글귀가 바로 이 연설에서 한 발언이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당시 언론들이 [[트러스트]]들에 장악되어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찌됐건 높은 관세와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공화당(미국)|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에 맞서 저관세와 은화 자유 제조를 주장했지만 브라이언의 공약들은 대부분 부유층에 불리했기에 그들은 매킨리에게 엄청난 선거지원금을 퍼부었고 결국 매킨리가 승리하게 됨으로써 ~~예나 지금이나 [[쇼미더머니]]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습]]. === 1896년 대선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ElectoralCollege1896.svg.png]] 1896년 대선, 득표 710만(51%) 대 649만(47%)로 [[윌리엄 매킨리|매킨리]]의 승리. 선거인단은 271:176. --당만 바꾸면 지금의 미국 정치 지형도랑도 얼추 비슷한 게 개그 포인트--[* 사실 디테일을 보테면 현재의 [[워싱턴 주]]와 [[네바다 주]], [[콜로라도]]와 [[뉴멕시코]] 주는 민주당이 강세고, [[노스 다코타]] 주는 공화당이 강세다. 한편 북부의 산업주였던 [[웨스트 버지니아]](공화당)와 남부의 큰 주였던 [[버지니아 주|버지니아]](민주당)는 여전히 같은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데, 20세기를 거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가 낙후되면서 처지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중서부와 남부를 석권했지만,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라 [[미국]] [[인민당]](포퓰리스트 당) 등과의 제휴에 따른 중부 권역 압승(46명)은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되려 [[웨스트 버지니아]]와 [[켄터키]](18명)를 잃었으며, 선거에서 더 이기려면 결국 뉴욕주를 이겨야 했다. 물론 [[캘리포니아]](2천표, 0.64%)와 켄터키(277표(!), 0.06%)에선 초박빙이었으며, [[인디애나]](15명)와 [[오레건]](4명)에서도 2%대의 박빙 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북부의 뉴욕 등에서는 압도적인 공화당 몰표가 나왔으니, 오하이오의 5% 차 가 최소 격차였고 북부 대부분이 두 자리수 이상의 % 차이가 났다.[* 북부 [[버몬트]]는 무려 80%, [[매사추세츠]], [[메인 주]], [[로드 아일랜드]]에서는 각각 69% 공화당 몰표가 나왔고, 남부 [[미시시피]]에서는 91%(!) 민주당 몰표. 서부인 [[콜로라도]], [[네바다]], [[몬태나 주|몬태나]]에서도 각각 85%, 81%, 79% 민주당 몰표가 나왔다. 한편 [[사우스 다코타]]에서는 183표(0.22%) 차로 민주당이 간발의 승리를 거두었다. 인구가 적은 [[와이오밍]]에서도 789표(3.7%) 차로 승리. 결국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오하이오]]에서 5% 이상은 격차를 좁혀야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다. --역시 오하이오--] 또한 민주당 내에서 이탈표가 나와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 이른바 '''금본위 민주당''')이 브라이언에 반대하고 나서 0.96%의 득표를 했으며, 금주당도 0.9%의 득표를 벌었다. 캘리포니아와 켄터키에서의 패배는 이런 이탈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대선에서도 역사를 남겼는데 바로 '''패배 후보가 승복하는 메세지라는 전례를 남겼다.''' 당선인 윌리엄 매킨리에게 대선 이틀 뒤 전보를 보낸 게 시초였다. 당시 브라이언은 전보에 "축하를 드린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미국 국민에 맡겼고 그들의 의지가 법"이라고 썼다. 이 관례는 이후 약 120년간 지켜지다가,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조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깨지게 되었다. === 20세기의 삶 === 1898년 [[미서전쟁|스페인과 전쟁]]이 터지게 되자 시민군을 조직하고 참전하려 했다. 그러나 [[장티푸스]]로 인해 [[쿠바]]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1900년, 다시 한번 매킨리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하려는 공화당과 매킨리를 비난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 제국주의였던지라 또 다시 지고 말았다. [[안습]]. 45.5% 득표를 하며 북부의 지지세 일부를 좁히고 [[켄터키]](12명)를 회복하였으나, 인민당과의 제휴가 멀어지는 등 서부에서 되려 큰 격차로 지면서 선거인단 33명을 잃었다. 1904년에는 앨턴 B. 파커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내주었고(파커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에게 낙선하였다), 절치부심 끝에 1908년 마침내 3번째로 대통령에 도전한다. --근데 3번이나 한 당의 후보로 지명받는 것도 어찌보면 대단하다.-- 그러나 [[윌리엄 태프트]]에게 [[미주리]]까지 내주며 43%라는 본인이 출마한 대선 중 가장 낮은 득표율로 낙선하고 만다. [[지못미]]. 이렇게 계속 안습하게 사나 싶었지만 [[1912년]]에는 민주당 [[우드로 윌슨]] 후보를 지원했고, 결국 윌슨이 당선되자 그에 의해 [[국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신세 좀 피나 싶었지만... 윌슨이 거의 모든 외교 정책을 스스로 결정해버려서 브라이언의 비중이 크진 않았다. 결국 [[1915년]]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듬해에는 윌슨의 재선을 위한 선거 유세를 했다. 그리고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자신도 가겠다고 했지만 윌슨은 거절한다. 그 후에는 [[여성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세상을 떠났다. == 여담 == *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다. 그래서인지 [[진화론]]을 믿지 않았으며, 말년인 1925년에 그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에 원고측 변호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재판 내용면에서는 떡실신당했지만 어쨌든 1심에서 승소하였으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 상기된 진보적 행적과 비교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브라이언 뿐 아니라 초창기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의외로 진보적인 사회관을 가지려 했던 인물들도 많았다. 사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세속 정치에 대한 관점까지 보수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이다. 이는 도덕에 기반한 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의 특성 상, 당대 기준으로 '가장 도덕적인 사상'[* 예로부터 [[미국]]이 [[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나라였으니만큼, 지금보다도 종교의 영향이 강했던 20세기 초반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그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이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일 법도 했다.]으로 보였던 [[기독교 근본주의]]에 끌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신론]]이나 [[불가지론]], [[이신론]] 성향의 [[진보주의|진보주의자]]들 중에서, [[진화론]]이나 기타 [[자연과학]] 이론이 [[나치 독일]]같은 [[극우]]들의 창궐에 기여했다는 [[개소리]]에 낚여서, [[반지성주의|반지성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한편 그의 이런 행적으로 인해 스코프스 재판을 연극화한 <신의 법정>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악역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진화생물학|그 분야]]에서는 [[영고라인]]이 된 셈~~ * 별명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The Great Commoner(위대한 평민)[* 영국에서는 귀족 작위 수여를 거부한 정치인(예를 들어 [[윈스턴 처칠]] 등)에게 주로 쓰이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함을 굳게 믿는 정치인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Boy Orator of the Platte(플래트[* 그가 살던 네브래스카에 흐르던 강 이름.]의 꼬마 연설자) 등이 있다. * 비록 대통령은 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지금도 미국 내 몇몇 군데에서 꽤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이언 대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