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회원수정)] [include(틀:한반도의 선사 유적)]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121~150호)] [[파일:external/crm.usgne.go.kr/IMG_2377_1327658330.jpg]] [[파일:external/blog.joins.com/4e5f38248bcee.jpg]] ||<-2><tablealign=right><tablewidth=360><tablebgcolor=#315288><tablebordercolor=#315288><bgcolor=#fff>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147호}}}]]''' || ||<-2> {{{#fff {{{+1 '''울주 천전리 각석'''}}}[br]{{{-1 蔚州 川前里 刻石}}}}}}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 너비=100%, 높이=100%)]}}}|| ||<width=80> '''{{{#fff 소재지}}}''' ||<bgcolor=#fff>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 || || '''{{{#fff 분류}}}''' ||<bgcolor=#fff> 유물 / 일반조각 / 암벽조각 / 각석 || || '''{{{#fff 수량/시설}}}''' ||<bgcolor=#fff> 1기 || || '''{{{#fff 지정연도}}}''' ||<bgcolor=#fff> 1973년 5월 4일 || || '''{{{#fff 제작시기}}}''' ||<bgcolor=#fff> [[청동기시대]] 이후 || [목차] == 개요 == [youtube(cn56F5yNTZo)] 이름 그대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위치한 길이 9.5m, 높이 2.7m의 [[암각화]].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기록되었고 [[태화강]] 상류에 위치한다. 1970년 12월, 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가 우연히 발견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47호이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도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둘을 세트로 묶어서 둘러본다. 자가용으로 갈 수도 있고, 대중교통으로 간다면 약간의 산책길 정도를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이 곳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울주군|언양읍]]과 [[양산시]]를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로, 낙동강을 통해 [[남해]] 바다와 경상도 각지, 그리고 낙동강 상류를 통해 [[한강]] 유역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이므로 신라시대에는 중요한 교통로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암각화는 이 대로에서 살짝 비켜난 서늘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서 한여름 피서를 즐기기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바위는 주변의 흔한 [[화강암]] 바위와 달리 [[셰일]](shale) 재질로 단단하지 않고 조각하기 쉬운데다, [[칠판]]처럼 평평하면서도 15도 가량 살짝 기울어져 있어서 윗부분에도 손이 쉽게 닿는다. 그런 점에서 수천년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새겨넣었다. == 명칭 == 명칭은 원래는 각석(刻石 : 새긴 돌)이라고 이름붙여졌으나, 이후 서석(書石 : 글을 쓴 돌)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서석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당장 신라인이 당시에 이 곳을 서석곡(書石谷)이라고 불렀다고 여기에 써있는만큼 서석이라고 부르는 게 과거 명칭에도 부합하기도 한다. 다만 학계에서는 엄연히 신라대 이전에 새겨진 것이 많이 있고 글로 새겨진 금석문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암각화[* 다만 엄밀히는 암각화라기보다는 새겨진 게 전부 그림이 아니라 글도 있으므로 암각(돌에 새김)이라는 명칭만으로 충분하지만,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 등의 명칭과 통일성을 고려하였다고 한다.]라고 부르는 것을 권하고 있다. 물론 울산광역시는 각석이라는 명칭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여 각석, 서석, 암각화가 통용되고 있고, 현지 안내표기도 각석이고 현지인들에게도 각석이라는 명칭이 익숙해져 있다. 이 항목에서는 금석문 외의 가치도 고려하는 역사학계의 주장을 고려하여 암각화로 표기한다. == 내용 == === 선사시대 === 주로 바위의 위쪽 부분에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대거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도 그렇고 다른 여러 선사시대 암각화들이 주로 [[고래]] 같은 [[동물]]이나 일상생활, 기원 등을 묘사한 것과 다르게 천전리 암각화는 [[마름모]] 혹은 [[정사각형]], [[원(도형)|원]], [[꽈배기]] 모양 등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힘든 [[기하학]]적인 [[도형]] 등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으며, 대부분의 도형을 이중선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그림 중에 [[돛]]을 단 [[선박]], [[말(동물)|말]], [[용]], 기마행렬도 같은 그림들도 있는데 이건 아래에 설명할 신라시대에 새겨진 그림이다. === 신라시대 === 주로 바위의 아래쪽 부분에 있으며, 위쪽의 선사시대 암각화보다 훨씬 이후 시대인 [[신라시대]]에 신라인들이 새긴 명문들이 남아있으며, 그림과 함께 [[한문]]이라는 문자로 써 있으므로 해독이 가능하다. 여기에 남아있는 여러 인명은 [[삼국사기]] 등 기존 기록에 등장하는 인명과 교차검증되는 것도 많아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신라시대 사람들은 윗부분의 석기시대 그림을 피해서 아래쪽에다 주로 글을 새겼다. 명문은 여러가지가 새겨져 있는데, 기록시기를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글은 [[지증왕]] 14년(513)에 작성된 계사명이다. 그 이후로 신라 상대부터 [[통일신라]] 시기에 새겨진 것까지 여러 글귀가 여기저기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있는 원명(을사명)과 추명(기미명)이다. 원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을사년(乙巳年)에 [[입종 갈문왕|사탁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명문(銘文)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妹)와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안랑왕(於史鄒安郞王) 셋이다. (하략) 글자가 가장 빽빽히 써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둘 다 사각형을 치고[* 원명은 사각형의 오른쪽 부분과 아래쪽이 약간 떨어져 나간 상태다.] 그 안에 글자를 써 넣었다. 이 중 1차적으로는 '[[신라]] [[법흥왕]] 12년에 사탁부를 다스리던 [[입종 갈문왕|사부지 갈문왕]]과 그 누이 및 어사추안랑왕[* 왕이 꼭 [[군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귀한 사람, 혹은 신라 안에서도 한 내부 집단의 수장급 인물에게 붙이는 경칭으로 본다.]을 비롯한 여럿이서 놀러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이곳에 글 새기기도 좋은 돌이 있어서 이 장소를 서석곡이라 짓고 여기다 [[방명록]] 새기고 가염~' 이라는 내용이다. 같이 온 사람들과 사냥을 즐긴 사람, 음식을 한 사람과 명문을 새긴 사람까지 모두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원래 새긴 것이라 하여 원명(原銘)이라고 한다. 그 후 새긴 추명(追銘)은 1차 내용, 즉 원명을 새긴 것이 법흥왕 12년(525) 6월 18일 새벽이었으며 그 후 세월이 흘러 [[입종 갈문왕|사부지 갈문왕]]과 당시 같이 놀러왔던 누이와 어사추안랑왕은 죽었고,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 사부지 갈문왕이 어린 [[삼맥종]][* 훗날의 [[진흥왕]]. 여기에는 심맥부(深ㅁ夫, 가운데 글자는 판독불가)로 써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삼맥종 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고 써 있으니 곧 진흥왕이 맞다.] 등을 법흥왕 26년(539) 7월 3일에 데리고 왔다. 역시 이번에도 총책임자, 예를 드리러 온 사람, 음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추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安郎」三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支妃徙夫知王予郎深▨夫知共來 >----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입종 갈문왕|사탁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와 어사추안랑[* 앞서 언급된 누이와 동일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긴 한데, 郎 자체가 "사내"라는 뜻이라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셋이 함께 놀러온 이후 몇 년이 지났다. 팔사년 지난 날 누이의 모습, 왕은 누이를 생각했다. 왕은 회상했다. 왕은 지난 정사년에 있었던 [[지소태후|왕비 지몰시혜비]]의 사랑을 생각했다. 기미년 7월 3일에 왕과 누이는 함께 서석을 보러 왔다. >계곡을 보러왔을 때 셋이 왔다. [[법흥왕|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 보도부인(保刀夫人)], [[입종 갈문왕|사부지왕자]]랑 [[진흥왕|심맥부지]]가 함께 왔다.(의역) 이름을 단순히 나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의 누구, 누구의 부인 누구 라는 식으로 꽤 정확히 적어놓았는데, 다른 사료에 나오는 인명과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중에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입종 갈문왕|사부지 갈문왕]]의 누이와 어사추안랑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법흥왕의 왕비, 갈문왕의 왕비인 [[지소태후]]가 추명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법흥왕과 사부지 갈문왕에게 여자형제가 있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명과 추명은 단순한 내용이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추명에서 법흥왕을 '무즉지태왕'으로 칭하는데 15년 전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모즉지매금왕'이었던 것이 [[태왕]]으로 표기가 바뀐 것이다. 이를 법흥왕대의 왕권 강화책이 상당한 효과를 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상 원명과 추명은 사각형의 테두리를 그어놓고 매우 공들여 조각한 내용이고, 그 외 기타명이라고 하여 바위 이곳저곳에 엉망진창으로 새겨놓은 것들이 많은데 이 역시 대부분 [[화랑(역사)|화랑]], [[승려]] 등이 놀러와서 자기들 이름이나 메시지를 새겨놓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무오유월이일 영랑성업(戊午六月二日 永郞成業)으로 추정되는 기타명의 경우 무오년[* 위 원명 추명이 새겨진 시기(법흥왕~진흥왕 재위기) 비슷한 시기의 무오년은 538년, 598년, 658년, 718년, 838년 등이 있다.] 6월 2일 영랑이 업적을 달성하다 라는 의미로 '영랑'이라는 화랑이 어떤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화랑들이 본인의 이름을 적어놓고 간 덕분에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들의 명단과 암각화에 적힌 화랑들의 이름이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 == 관람 ==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울산 버스 348]]을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던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반구대 암각화]]와 달리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근처에 울주대곡박물관이 있는데, 천전리 암각화와 직접적 관련은 없고 인근에 대곡[[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지역의 문화재를 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 훼손 == 2011년 8월 30일 ‘이상현’이란 낙서가 발견된다. 낙서가 발견된 계기도 참 가관인데 문화재해설사가 이미 한달전인 7월에 관리인에게 알렸지만 관리인은 큰일이 아니란 판단으로 울주군에 뒤늦게 보고하게 된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태파악을 한 군청에선 뒷북을 치고 경찰에 이상현이란 이름을 새긴 사람을 수사의뢰 한다. 한달뒤 경찰은 고교 2년생인 A군을 이상현 사건의 범인으로 특정하고 입건하였다. A군은 범행동기에 대해 단지 “친구를 놀려주고 싶었다” 란 이유로 저질렀다고 한다. 한 고교생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으로 벌어진 국보 훼손 사건이었다. ~~이렇게 방명록에 이름이 하나 더 추가 되고야 말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역사는 흐른다]]~~ == 바깥고리 == * [[https://ko.wikipedia.org/wiki/울주_천전리_각석|한국어 위키백과 : 울주 천전리 각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0174&cid=46619&categoryId=46619|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울주 천전리 각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87410&cid=64865&categoryId=65326|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울주 천전리 각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764&cid=43065&categoryId=43065|고고학사전 : 천전리 서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756&cid=43065&categoryId=43065|고고학사전 : 천전리 바위그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18000&cid=62047&categoryId=62047|한국고중세사사전 : 천전리 서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6899&cid=42840&categoryId=42844|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울주 천전리 각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6776&cid=42840&categoryId=42844|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천전리 암각화]]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4125064&cid=58151&categoryId=58151|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 선사시대 암각화에 신라 화랑들이 찾아간 까닭은, 울주 천전리 각석]]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0907&cid=40942&categoryId=33374|두산백과 : 울주 천전리 각석]] == 국보 제147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1470000,26&pageNo=5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울주 천전리 각석 (蔚州 川前里 刻石)]] >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 아래 ·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분류:금석문]][[분류:신라의 금석문]][[분류:선사 시대]][[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미술 작품]][[분류:울주군]][[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