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7B68EE> '''[[누동궁#s-4|{{{#FAFAD2 누동궁의 역대 종주}}}]]''' || ||<width=30%><:>1대[br][[전계대원군|전계대원군 이광]][* [[덕흥대원군]]과 [[도정궁]]의 관계와는 달리 [[전계대원군]]은 [[누동궁]]에서 살았던 적은 없다. [[철종(조선)|철종]]이 왕이 되고 옛 집터 부근에 친아버지의 종가로 지은 것. 단 전계대원군을 모시는 [[종가]]이기 때문에 종주는 전계대원군부터 계산한다.] ||<:> {{{+1 ←}}} ||||<width=30%><#7B68EE><:>'''{{{#FAFAD2 2대 [br]영평군 이경응}}}''' || {{{+1 →}}} ||<width=30%><:> 3대[br][[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 ||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29176e><tablebgcolor=#29176e> {{{#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증손 | 누동궁 1대 사손'''[br] {{{+1 '''永平君[br]영평군'''}}}}}} || ||<width=20%> '''{{{#ffd800 군호}}}''' ||<-2><bgcolor=#fff>영평군(永平君) || || '''{{{#ffd800 이름}}}''' ||<-2><bgcolor=#fff>이욱(李昱) → 이경응(李景應)[*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회평군|회평군 명]]('''明''', '''日''' + 月)), 둘째는 [[영평군(1828)|영평군 경응]]('''景'''('''日''' + 京)應, 초명은 욱('''昱''', '''日''' + 立)), 셋째는 [[철종(조선)|철종 변]]('''昪''', '''日''' + 弁)인데 전부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는 이들 형제와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은전군]]의 [[양자(가족)|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고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이인응|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가족)|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으며 [[남연군]]의 네 아들들의 이름은 [[흥녕군|흥녕군 창응]]('''昌'''('''日 + 曰''')應), [[흥완군|흥완군 정응]]('''晸'''('''日 + 政''')應), [[흥선군|흥선군 하응]]('''昰'''('''日''' + 正)應)인데 [[흥인군|흥인군 최응]]('''最'''('''曰''' + 取)應)의 경우는 부수는 갈 왈(曰)로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였다.] || || '''{{{#ffd800 시호}}}''' ||<-2><bgcolor=#fff>효정(孝貞) || || '''{{{#ffd800 출생}}}''' ||<-2><bgcolor=#fff>[[1828년]] [[7월 20일]] || || '''{{{#ffd800 사망}}}''' ||<-2><bgcolor=#fff>[[1902년]] [[2월 1일]][* [[음력]] 신축년 12월 23일.] (향년 73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및 [[문신]]. [[사도세자]]의 3남[* 서장남.]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2남[* 서장남.], 조선 25대 임금 [[철종(조선)|철종]]의 둘째형이다. 전계대원군의 종가(宗家)인 [[누동궁]]의 1대 봉사손이자 2대 종주이다.[* [[누동궁]]의 종주 자체는 [[전계대원군]]부터고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은 영평군부터이다. 그래서 1대 씩 차이가 난다.] == 생애 == === 어린 시절 === 1828년([[순조]] 28년), [[강화도]]에서 유배 중이던 [[전계대원군|전계대원군 이광]]과 그의 [[첩]]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년) 이광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가족들과 함께 [[한성부]] 경행방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전계대원군]]이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할아버지 은언군도 여러 안좋은 사건에 엮였기 때문에[*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의 [[신유박해|천주교 순교사건]], 아들 [[상계군]] 추대 사건 등.] 처음에는 [[왕족]]의 작위를 받지 못했다.[* [[전계대원군]]도 살아 생전엔 군호를 받지 못했다. [[철종(조선)|철종]] 즉위 후 전계군으로 추봉받고 곧바로 [[대원군]] 작위까지 받은 것.] 더군다나 큰형이자 전계대원군의 적자 [[회평군|회평군 이명]][* 1827 ~ 1844. 첫 이름은 이원경.]이 민진용 역모 사건[* 1844년(헌종 10년) 몰락한 [[노론|노론]] 인물 민진용이 이원덕, 박순수 등을 포섭하여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사전에 적발당한 사건이다. 민진용은 노론 재상 민응수의 4대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 전에 몰락하여 [[중인]]이 되었고, 민진용은 [[무인]]으로 생활했다. 민진용은 이원덕(李遠德), 박순수(朴醇壽) 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원덕은 의원으로 [[전계대원군]]의 지인이었고, 박순수는 양아버지 박종훈(朴宗薰)의 음덕으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부사를 역임했다. 바로 이들과 함께 이원경을 추대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당해 전부 [[끔살]]당했다. 사족으로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이후 민진용 [[항렬]]의 '용(鏞)'을 '호(鎬)'로 바꾼다. 바로 [[고종(대한제국)|고종]] 시절 외척 세력이던 [[명성황후]]와 [[민태호(조선)|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등이 민진용과 같은 항렬이다.]에 엮여서 1844년([[헌종(조선)|헌종]] 10년)에 [[사사#s-2|사사]]당하자 [[이복형제|이복 동생]] [[철종(조선)|이원범]]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거기서 일반 [[농민]]들처럼 살았다. === 철종 시기 === 그러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복형제|이복동생]] [[철종(조선)|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다시 [[한성부]]로 돌아왔고 영평군(永平君) 군호를 받았다.[* [[君#s-2.3.2|군호]]는 [[경기도]] [[포천시|포천]] 북부 지역에 있었던 [[영평군|영평군(永平郡)]]에서 유래했다. 대략적으로 현재 포천시 영북면, 영중면, 일동면, 이동면, 창수면에 해당한다.][* 여담으로 이 일대에 [[전계대원군]]의 묘가 있다. [[철종(조선)|철종]]이 이를 고려하여 [[君#s-2.3.2|군호]]를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 때 영평군이 즉위하지 못한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병|만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첩]]이었으며, 큰형 [[회평군]]이 죽은 뒤라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가계를 이어야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럴 때는 친자식이라도 [[서자]]가 잇지않고 [[양자(가족)|양자]]를 [[적자]]로 [[입양]]해 잇는다. 대명률에는 적자와 서자가 모두 없을 때 양자를 들인다고 나와있어서 조선 초기엔 이를 따랐는데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점점 서자가 있음에도 적자가 없다는 이유로 양자를 들이는 일이 많아졌다. 영평군의 경우는 특이한 경우다.] 그리고 [[정조(조선)|정조]] 때에 잠시 설치했다가 사라진 숙위소가 부활하면서 그 [[대장]] 직에 임명받았다. 이후 능령[* 陵令. 왕릉을 지키는 벼슬 중 하나] [[벼슬]]을 받았다. 또한 [[고종(대한제국)|고종]] 때까지 [[국상]] 때마다 [[종친]]이 맡는 직책인 종척집사(宗戚執事)로서 활동했다. 1857년(철종 8년)에 본부인 [[평산 신씨]]가 사망한 뒤 곧 [[청도 김씨]] 김재협의 딸과 [[재혼]]했다.[* 영평군보다 훨씬 오래 살아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사망]]한다.] === 고종 시기 ===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후 1868년(고종 5년) 3월 6일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욱(昱)'에서 '경응(景應)'으로 [[개명]]했다. 이후로도 종친으로서 왕실의 행사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실 족보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교정했고, [[영혜옹주]] 및 [[의친왕|의화군 이강]]의 혼례 때 주혼당상을 맡아 자신의 집을 전안[* 奠雁.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 집에 가서 상 위에 올려놓고 절하던 예.[[https://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24774&supid=kku000284786|출처]]]하는 장소로 제공했다. 이외에도 판종정경(判宗正卿),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으로 임명받아 활동했다. == 사후 == 1900년([[광무]] 4년) [[음력]] 3월부터 만성 [[당뇨|소갈증]] 증세가 심해지다가 1902년(광무 6년) 2월 1일[* [[음력]] 신축년 12월 23일.]에 별세했다. 향년 74세. 〈[[제국신문]]〉에 따르면, 같은해 3월 6일에 발인했다고 한다. [[무덤|묘소]]는 원래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 산 11번지 [[전계대원군]] 묘역 내에 있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후손들이 [[화장(장례)|화장]]하여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https://ko.wikipedia.org/wiki/영평군_(1828년)|#]] == 대중 매체에서 == * [[유민규]] - 2020년 [[tvN]] 《[[철인왕후(드라마)|철인왕후]]》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영평군(철인왕후))] ||<table width=400>[[파일:철인왕후 영평군.png|width=100%]]|| || 《철인왕후》의 영평군 || 작 중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슬픈 2인자'이다. 사랑이든 권력이든, 언제나 이복동생 [[철종(조선)|철종]]([[김정현(1990)|김정현]] 분)의 뒤에 2인자로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속에 그늘을 지니고 있다. 철종의 침소를 지키는 금위대장으로, 철종을 무척 아낀다하여 홍별감([[이재원(배우)|이재원]] 분)이 '동생애자'라 칭한다. 동생 철종과는 달리, 방법의 정당함 보다는 목적의 정당함을 우선시한다. == 후손 == '''입양 릴레이''' 영평군은 첫 부인 [[평산 신씨]]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한 채 일찍 [[사별]]했고, 김재협의 딸인 [[청도 김씨]]와 [[재혼|두 번째 결혼]]을 했다. 둘 사이에 자식은 있었으나 [[딸]] 한 명 뿐이었다.[* [[왕실]] 작위는 없으며 군수(郡守) 창원 황씨 황연수와 혼인했다. 1918년 사망.] 거기다 영평군은 [[병|고질병]]이 있어 더 이상 자식을 낳기 힘들었기 때문에 [[양자(가족)|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1864년(고종 1년) 9월에 [[선조(조선)|선조]]의 서9남 [[경창군]]의 9대손 이신휘(李愼徽)[* 1868년 이휘응(李徽應)으로 [[개명]]한다.]의 아들인 [[청안군(1851)|이순달(李順達)]]을 [[입양]]했다.[* 영평군과 실제 혈통으로는 21촌이다.(...)] 이순달은 이재순(李載純)으로 개명했고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 자격으로 청안군(淸安君) [[君#s-2.3.2|군호]]를 받았다. 청안군은 1904년([[광무]] 8년)에 사망했는데 그도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소현세자]]의 8대손 이재철의 아들 [[풍선군|풍선군 이한용]][* 1907년([[융희]] 원년) 풍선군(豊善君)으로 추증. 영평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 18촌(...), [[청안군(1851)|청안군]]과는 23촌(...)이다.]을 입양했지만 1890년(고종 27년) 16세로 사망했다.(...) 풍선군 역시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1897년([[광무]] 원년)에 풍선군의 [[양자(가족)|양자]]로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을 [[입적]]시켰다.[* 1908년 청풍군(淸豊君)으로 책봉. 근데 눈여겨 볼 건 [[청풍군(1890)|이해승]]은 원래 [[덕흥대원군]]의 후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 혈통 상으로는 무려 '''[[월산대군]]의 후손'''으로(...), 이해승의 친할아버지 이재숙이 덕흥대원군 후손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서 그의 본가가 덕흥대원군파로 편입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평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 '''31촌(...)''', [[청안군(1851)|청안군]]과는 '''32촌(...)''', [[풍선군]]과는 '''33촌(...)'''이다. ] 그래서 [[영평군(1828)|영평군]] - [[청안군(1851)|청안군]] - [[풍선군]] - [[청풍군(1890)|청풍군]]까지는 전부 [[입양]][[관계]]인 셈. '''영평군은 살아서 양[[증손]]까지 본 것이다.''' 참고로 저 때 영평군이 이해승을 입양할 것을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직접 청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4_09A_28A_00120|#]] 청풍군 이해승의 자녀들부터는 친자식들이다.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지만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일제강점기|일제 치하]] 1943년에 [[참척|자신보다 먼저 죽었고]] 그 자신도 1950년 [[6.25 전쟁]] 때 [[실종|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장손이 바로 그랜드힐튼 서울의 이우영 회장. 즉 영평군의 후손들이 현재 그랜드힐튼 서울 오너 일가이다. [각주] [[분류:조선의 왕자군]] [[분류:대한제국의 황족]] [[분류:누동궁 종주]] [[분류:서출]] [[분류:강화군 출신 인물]] [[분류:1828년 출생]] [[분류:190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