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29176e><bgcolor=#29176e> '''{{{#ffd800 역임 지위}}}''' || ||<bgcolor=#FFF,#1F2023>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bgcolor=#4A2d5b>[[파일:Unhyeongung_Ihwamun.png|width=40]][br] '''[[운현궁|{{{#FAFAD2 운현궁}}}]]{{{#FAFAD2 의 역대 주인}}}''' || ||<width=30%><rowbgcolor=#fff,#1F2023> 2대[br][[흥친왕|흥친왕 이희]] || → ||<width=30%><bgcolor=#4A2d5b> '''{{{#FAFAD2 3대[br]영선군 이준용}}}''' || → ||<width=30%> 4대[br][[이우]] || ---- [include(틀:왕공족)] }}} ||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29176e><tablebgcolor=#29176e><colcolor=#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 | 운현궁 2대 사손[br]{{{+1 영선군 이준용}}}[br]永宣君 李埈鎔''' || ||<-2><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파일:external/www.sculturein.com/1_L_1317495190_9.jpg|width=100%]]{{{-2 {{{#000,#ddd 영선군 영정}}}[* 영정 속 얼굴이 이전의 조선식 초상화 기법과는 다르게 그려졌다. 얼굴을 보면 확실히 사촌간인 [[순종(대한제국)|순종]], [[영친왕]], [[조남승]]과 닮았다.]}}}}}} || ||<width=20%> '''군호''' ||<colbgcolor=#fff,#1F2023>영선군(永宣君) || || '''성명''' ||<(> 이준용(李埈鎔) → 이준(李埈) || || '''자''' ||<(> 경극(景極) || || '''호''' ||<(> 석정(石庭), 송정(松亭) || || '''출생''' ||<(> [[1870년]] [[7월 23일]] || || '''사망''' ||<(> [[1917년]] [[3월 22일]] (향년 46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및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양[[돼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조카]]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 생애 == 1870년(고종 7년) 7월 23일,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이재면]]과 첫 부인 [[남양 홍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밑으로 동생 이문용(李𪣢[土+汶]鎔)이 있었지만 20세에 [[요절]]하여 사실상 독자였다.[* 이문용의 후계는 큰할아버지 [[흥완군]]의 양증손자 이해명(실제로는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12대손)이 입양되어 이었다.] 이래도 예 저래도 예 하는 아버지 이재면이나 [[고종(대한제국)|고종]]과는 다르게 호탕하고 활달하며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마음에 들어 해서 이준용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한다. 죽기 직전에 흥선대원군이 사이가 틀어진 아들 고종을 찾았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준용이는 어디 갔느냐." 하며 이준용도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죽을 무렵에 이준용은 일본에 있었다.] 15살 때인 고종 21년(1884) [[개화파]] 내각에 의해 관직에 오른 뒤 다음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장각]]과 예문관에서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74년]](고종 11년) 권좌에서 축출당한 흥선대원군은 [[1881년]](고종 18년) 이복삼촌 [[완은군|이재선]]을, [[1885년]](고종 22년) 아버지 [[이재면]]을 왕으로 앉히고 다시 섭정을 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이후에는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노력했다. [[청나라]]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왜 영선군이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꾸준히 설득했지만 [[청나라]]나 [[일본]] 모두 쌩깠다. 그럴 경우 100%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외세를 빌린 왕실 쿠데타를 지원해봤자 상대에게 빌미를 줄 뿐이기도 하고. 이준용은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나 [[유길준]]보다는 덜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삼촌 고종의 눈밖에 나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조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하였다고 한다. [[1899년]]([[광무]] 3년)에는 흥선대원군도 사망한 이후였지만, 여전히 존재했던 흥선대원군의 파벌에 의해서 영선군을 추대하는 '''쿠데타 시도만 3건이 발각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이준용 입국을 허락을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고종은 끈질기게 거부했다고 한다. 오히려 1904년(광무 8년)에도 [[일본]]에 있던 반역자 14인[*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1862)|이규완]], [[유길준]], [[조희연(1875)|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1867)|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을 송환하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고종 강제 퇴위 직전인 1907년(광무 11년) 7월 중순에야 거의 [[밀입국]] 형태로 귀국했다. 정식 귀국 허가가 나온 것은 고종 퇴위 이후였다.[* [[박영효]]도 정확하게 같은 형태로 귀국했다. 일단 밀입국하고, 고종 퇴위가 확인된 다음에 정식 귀국의 형태를 밟았다.] ||<tablewidth=550><tablebordercolor=#dddddd,#383b40><tablebgcolor=#dddddd,#383b4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선군_봉작_교지.gif|width=100%]]}}} || || 1907년 9월 12일 내려진 영선군 봉작 교지. || 귀국 후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졌다. [[대한제국]] 수립 10년 만에 비로소 정식 [[황족]] 작위를 겨우 받았음은 그가 얼만큼 위험하게 여겨지고 냉대당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이준용은 족보 상 [[사도세자|장조(사도세자)]]의 5대손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황족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아마 [[대원군#s-3|대원군 봉사손 세습제]] 차원이거나 아니면 황실과 실질적으로 가까운 친척이라 수여한 듯 하다. 그래도 기왕 줄 거면 좀 더 일찍 줄 수도 있었는데, 제국 선포 10년 뒤에야 준 것은 앞에서 설명한 이유가 맞을 것이다.] 이후 보국숭록대부에 승진, 주차 일본 대사를 지낸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이 되었고, 그해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다이쇼 덴노|요시히토 황태자]]를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 [[영친왕]]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tablewidth=550><tablebordercolor=#dddddd,#383b40><tablebgcolor=#dddddd,#383b4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unjong_&_Yoshihito_in_Korea_1907.jpg|width=100%]]}}} || || 뒷 줄 왼쪽부터[br][[흥친왕|흥친왕 이재면]],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의양군 이재각]], [[영선군 이준용]]. 앞 줄 왼쪽부터[br][[아리스가와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황제|순종황제 이척]], [[다이쇼 덴노|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영친왕 이은]]. || 이후 영선군은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희망을 잠시 품었고, [[1909년]](융희 3년) [[이근택]] 등과 합세해 [[이완용]]을 몰아낸 다음에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연히 일본을 밀어내는 것은 아니고, 당시 상황을 용인하는 상황에서의 내부 권력 싸움. 핵심은 '이완용 다음 영선군 자신이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것'이었다. 영선군이 연관된 쿠데타 시도만 이 것으로 '''4번째이다'''([[1899년]]의 시도들은 하나로 취급). 하지만, 점점 드러나는 일제의 침략 행위들로 모든 게 다 헛 것임을 알면서 좌절하더니 이후 '''친일파로 전향'''했다. 초기에는 반일주의자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빠르면 [[을미사변]] 이전, 늦어도 일본 망명 시기에는 [[친일파]]로 전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106인 명단에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과 함께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서 조선 왕족들은 신분상 일제의 감시와 영향력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받아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명단에서 제외되었지만, '''그 특별한 사례가 영선군 가계'''이다. [[1909년]](융희 3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을 [[일본]]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에 부속되는 구도[* 이에 대해서는 [[조선신궁]] 참조.]로 향후 세워질 조선신사([[조선신궁]]) 같은 신궁급 신사에 함께 배치하여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 바 있다.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 체결 후에는 조칙에 따라 아버지 이재면이 이희 공(李熹公)[* 이재면은 흥친왕으로 책봉되면서 이름을 이희로 고쳤다.]에 봉해졌는데, 이재면이 곧 사망하자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 공(李埈公)으로 불렸다. [[1912년]]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 가족들에 대한 원망 === ||<tablewidth=450><tablebordercolor=#dddddd,#383b40><tablebgcolor=#dddddd,#383b4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2-08 06-26-49.jpg|width=100%]]}}} || ||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br]왼쪽부터 [[흥친왕|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br]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의양군 이재각]]. || 영선군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계속 위기에 빠지게 한 [[가족]]들을 상당히 미워하였다. 특히 [[일본]] [[망명]] 생활 중 여러 번 [[암살]]당할 뻔했음에도 가족들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자 감정은 더욱 격해져 차가운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대한제국)|순종]]에게 [[사면]]받고 귀국한 직후 [[흥선대원군]] 내외의 [[사당]]을 찾아가긴 했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 [[흥친왕]]이 죽을 때도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무루공자(無淚公子)', 즉 눈물없는 사나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다. 이 일로 그의 [[당숙|5촌 당숙]][* 영선군의 큰할아버지 [[흥완군]]의 아들.]인 [[완순군|완순군 이재완]]에게 질책까지 받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식으로서 너무 불효하는 것 아니냐고. === 사망 === ||<tablewidth=450><tablebordercolor=#dddddd,#383b40><tablebgcolor=#dddddd,#383b4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선군 이준용.png|width=100%]]}}} || || '''나이든 때의 모습''' || 저런 상황에서 건강을 제대로 돌볼 리 없었다. 나중에는 [[콩팥]]과 [[심장]]이 망가졌는데, 계속된 피신 등으로 [[골든아워|치료 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했으며 결국 1917년 3월 22일 [[운현궁]]에서 향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가족과 후손 == ||<table width=450> [[파일:e287192471395f18446a19f314188488.jpg|width=100%]] || || 영선군 군부인 광산 김씨 || [[남양 홍씨]]와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두 번째로 [[광산 김씨]]와 결혼했지만 두 부인 사이에서 모두 자식이 없었다. 1916년 [[첩|소실]] 전순혁과 사이에서 딸 이진완(李辰琬)을 낳았다.[* 이진완은 후에 [[윤보선]]의 동생 윤원선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뒀다. 1997년 82세로 사망.] 하지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영선군의 부인이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운현궁]]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소연하자 고종이 이우의 손을 잡고 양자로 선택했다고 한다. 어쨌든 《순종실록부록》에는 "태왕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강 공의 아들을 이준 공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다."라고 되했다. 이 후의 가계는 [[이우#s-1]] 항목 참조. == 매체에서 == * 이환지[* [[야인시대]]에서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가네야마로 나왔다.] - 1982년 [[KBS]] 《[[풍운(KBS)|풍운]]》 * 김경진 - 1990년 [[MBC]]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 * 강신조 - 1996년 KBS 《[[찬란한 여명]]》 * 안승민--[[안승민|이 어르신]] 말고-- - 2002년 KBS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 : 실제와는 다르게 상당히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마른 체격으로 나온다. == 여담 == * 영선군은 한국이 문명진보의 영역으로 나가려면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신의 교육론을 직접 실천에 옮겨 1908년([[융희]] 2년)에 종친, 외척 자제의 일본 유학을 건의하여 실행했다. 그 뒤에도 해외 유학과 견문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일반 양반가와 평민의 자제들에게도 해외 유학 지원을 구상하였으며 1908년 봄에 [[이지용]], [[이재극]] 등과 함께 한성부 북부 계동에 황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돈명학교(敦明學敎)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황족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점차 문호를 개방하여 나중에는 평민, 민간인들까지 입학을 허가해 100여 명 정도가 공부하게 되었다. 설립 당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거금 수천 원을 하사하기도 했다.][* 명목상 주인은 6촌 동생인 [[계동궁]]의 종주 이기용이고 실질적으로 운영한 사람은 [[신소설]]의 선구자이자 조카 뻘되는 먼 친척인 [[이해조]]다.] 당시 나중에 자신의 토지를 저당잡히면서까지 학교를 부흥시키려 했다고 한다. 또한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예전의 전통적 교육 기관이 아닌 근대적 인재들을 길러낼 사범 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런데 [[친일]]을(...)-- * 몸이 뚱뚱하면서도 걷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 이준용을 두고 [[윤치호]]는 양돼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일본의 공작]][[분류:이왕가]][[분류:운현궁 종주]][[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친일단체]][[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경제, 사회]][[분류:조선의 반란자]][[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870년 출생]][[분류:191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