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관련 인물(NPB)]]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3851570067_a314b8b36f.jpg]] [목차] || 이름 || 에나츠 유타카(江夏 豊) || || 생년월일 || 1948년 5월 15일 || || 국적 || [[일본]] || || 출신지 ||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좌투좌타[* 원래는 오른손잡이 였으나 야구를 하려면 [[왼손잡이]]가 유리할 거라는 큰형님의 권유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글쓰기와 젓가락질도 왼손으로 하고 있다.] || || 프로입단 || 1966년 드래프트 1위 ||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즈]] (1967~1975)''' [br] [[난카이 호크스]] (1976~1977) [br]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8~1980)''' [br] [[닛폰햄 파이터즈]] (1981~1983) [br] [[세이부 라이온즈]] (1984) || |||||||||||| '''1968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 || ~~[[오가와 겐타로]]~~[br]~~([[주니치 드래곤즈]])~~[*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 || → || '''에나츠 유타카 [br]([[한신 타이거즈]])''' || → || 다카하시 가즈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197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와카마츠 츠토무]][br]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에나츠 유타카[br]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야마모토 코지]][br]([[히로시마 도요 카프]]) || |||||||||||| '''198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 || 기다 이사무[br]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닛폰햄 파이터즈]]) || → || '''에나츠 유타카[br]([[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닛폰햄 파이터즈]])''' || → || [[오치아이 히로미츠]][br]([[치바 롯데 마린즈|롯데 오리온즈]]) || [[일본프로야구]] 선수, 해설가. 1960~1980년대를 통틀어 최고의 좌완투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우승 청부사"''' 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 별명은 후배 좌완투수 [[쿠도 키미야스]]에게 이어진다.] 더불어 현역 시절 5개 구단을 거쳐간 [[저니맨]]이기도 하다. 참고로 국내에서도 정발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박사'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이기도 하다. 지병으로 인해 박사는 그가 전성기였던 한신 시절만[* 주인공 아들에게 "에나츠 지금도 활약하냐?" 라고 묻자 아들이 "[[난카이 호크스|다른 팀]]으로 이적했고 이미 은퇴했다" 란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했다.] 기억하기 때문에, 에나츠는 작중 내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 학창시절 == [[형제]]간의 아버지가 서로 다른 다소 복잡한 가정에서 자랐다. 중학교 시절엔 투포환 선수였으며, [[오사카]]가쿠인 대학 부속고교에 입학한 이후 비로소 [[야구]]를 시작했다. 또래 선수들에 비하면 다소 늦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투포환으로 다져진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학교의 에이스로 자리잡았고, 졸업하던 해인 1966년 학교를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전국대회 4강으로 이끌었는데 예선 7경기에 모두 등판하여 단 3점만 실점하는 짠물투구를 선보이며 야구계의 이목을 끌었다. 비록 학교는 준결승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그해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드래프트에서 1위로 [[한신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고, 그 외 4개 구단의 뜨거운 추파가 있었으나 에나츠는 그대로 한신 유니폼을 입었다. == 프로시절 == === [[한신 타이거즈]] === [[파일:external/stat.ameba.jp/t02200271_0539066413491550048.jpg|width=350]] 한신에서 최고의 배터리를 이루었던 [[타부치 코이치]](왼쪽)와 에나츠. 입단 첫해인 1967년, 젊은 투수를 선호하는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의 눈에 들면서 기회를 잡았고,[* 후지모토는 에나츠를 친손자처럼 귀여워 했고, 틈만 나면 차 한잔 하면서 에나츠에게 옛날 일본 야구에 대해 얘기해주는 것이 낙이었다고 한다. ~~유타카야 이 할애비가 옛날엔 커브의 후지모토로 유명했단다~~] 42경기에 등판하여 12승 13패 평균자책 2.74 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탈삼진 225개로 1위를 기록하면서 무서운 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신인왕은 [[고쿠테츠 스왈로즈]]의 신인 2루수 [[타케가미 시로]]에게 내주었다.]. 이듬해엔 25승에 무려 '''401탈삼진''' 으로 2년만에 생애 첫 다승왕과 2년 연속 탈삼진왕에 올랐는데, 401탈삼진은 1964년 [[샌디 쿠팩스]]가 세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기록 382개를 뛰어넘는 세계 신기록이며 이는 지금도 철옹성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현재 메이저리그 기록은 1973년 [[놀란 라이언]]이 세운 383개이다. 데드볼 시대 기록까지 포함하면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인 513탈삼진을 포함해 401 탈삼진을 넘는 기록이 6개 있지만, 당시 야구 환경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참고용 기록 정도로 취급한다.] 이후로도 에나츠는 불같은 강속구를 바탕으로 데뷔 첫해인 1967년부터 1972년까지 탈삼진왕을 6연패 하며, [[무라야마 미노루]]의 뒤를 잇는 한신의 에이스로 맹활약 하였다. [[이나오 가즈히사]]의 탈삼진 일본 기록인 353개를 넘는 354번째 삼진은 [[오 사다하루]]에게 뺏어내겠다고 공언했다. 타이 기록이 되는 353개를 오 사다하루에게 뺏어내고 일본 기록을 갱신한 것으로 착각해 기뻐했지만 바로 포수에게 아니라며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모든 후속 타자는 의도적으로 범타로 유도하고 다시 오 사다하루의 타석이 돌아 왔을 때, 신기록인 354개째 삼진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에나츠 본인이 회고하기를 "[[모리 마사아키|모리 마사히코]]씨와 다카하시 씨의 타석에서 삼진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힘들었다. 특히 다카하시 씨가 2스트라이크까지 몰린 것이 가장 곤란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연장 12회말에 [[답답해서 내가 친다|에나츠 자신이 끝내기 안타를 치면서]] 승리를 거뒀다. 팀 선배 자토펙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라이벌 의식을 품고 고비의 기록이 되는 탈삼진은 늘 나가시마에게 빼앗던 것을 동경하여, 에나츠는 오 사다하루와의 승부에 집착했다. 에나츠는 오 사다하루에게 가장 많은 삼진을 뺏었지만(57개), 오 사다하루는 에나츠가 가장 많은 홈런(20개)을 허용한 타자이기도 했다. 데뷔 4년차인 1970년에 통산 1천 탈삼진을 기록하며 [[가네다 마사이치]]가 보유하고 있던 최단기간 1천 탈삼진 기록을 뛰어넘었고, 1971년 올스타전 1차전 에서는 9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전년도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5연속 탈삼진과 1971년 올스타전 2차전에서 기록한 탈삼진을 연결시키면 무려 15타자 연속 탈삼진이다(...). 이 또한 일본 올스타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1973년 8월 30일 [[주니치 드래곤즈]] 와의 홈경기에서 상대 투수인 마츠모토 유키츠라와 11회까지 선발 맞대결을 벌여 무안타 무실점으로 역투했고, 결국 11회말에 [[답답해서 내가 친다|에나츠 자신이 마츠모토를 끝내기 홈런으로 두들기며]] 사상 초유의 연장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오죽 승부가 극적이었으면 이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가 "에나츠 만세!!"를 외쳤고, 덕분에 방송위원회 징계심의에 회부되어 주의조치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한신의 기둥 투수로 불꽃같은 활약을 보였지만, 1974년 이후 지병인 혈행장애와 심장질환이 악화되고 어깨와 팔꿈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남용한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체중이 심하게 불어나는 등의 건강문제로 에나츠의 기량은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야스]][* 1973년 [[곤도 마사토시]]가 가네다의 갈굼과 모욕에 시달리다가 결국 시즌 종료 후 "나를 [[원숭이]]라고 모독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으나 가네다가 그런 말 한 적 없다며 발뺌하자 결국 제대로 빡쳐서 가네다를 구타하고 이것 때문에 중징계를 받고 은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곤도랑 같이 따라갔던 선수가 바로 에나츠였다(..) 에나츠가 당시 곤도가 감독실로 들어간 후 감독실 문을 막고 서 있었는데 잠시 후 가네다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무엇 때문 인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코치들이 감독실로 쫒아와 들어가려 했으나 에나츠는 계속 문을 막고 있었고(..) 결국 비명 소리가 잦아든 뒤 문을 열자 가네다는 곤도에게 실컷 얻어터지고 제대로 코뼈가 돌아가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곤도에게 에나츠가 "선배 이제 분이 풀렸수?" 하니 곤도는 "그래.." 하면서 감독실을 나왔다고... 참고로 곤도는 야구계 안팎에서 성격이 상냥하고 온후하기로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에(에나츠의 말에 의하면 한신 시절 '''곤도가 화내는 모습을 1번도 본 적 없었다'''고 한다. 또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과의 시합 중 [[오 사다하루]]의 뒤통수에 빈볼을 날린 적 있는데 당시 거인 감독인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곤도가 일부러 빈볼을 던졌을리 없다"''' 라며 직접 선수들이 나가려는 걸 말릴 정도였다. 참고로 바로 직전에 한신 투수 [[진 바키]]의 [[오 사다하루]]를 향한 빈볼 때문에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진 후였다) 이 사건 후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야구계 안팎으로 동정을 받았다고... ~~이렇게 상냥하고 온후한 사람을 빡치게 만든 가네다는 정말(...)~~], [[요시다 요시오]]와 불화가 심했고 "독불장군" 이니 "고독한 늑대" 라는 별명이 붙는 등 프런트와의 관계도 악화 일로였으며 한편으로 1969년 [[검은 안개 사건]]에 본의 아니게 연루되면서(물론 무혐의로 끝났지만) 한신에서의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가던 상황이었다. 결국 에나츠는 1975년 시즌 종료 후 [[에모토 타케노리]], [[시마노 이쿠오]]와의 1-2 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자신이 트레이드 된다는 소식을 들은 에나츠는 현역에서 은퇴하려 하였으나, 난카이 감독이던 [[노무라 카츠야]]의 간곡한 설득으로 결심을 번복하고 난카이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에나츠가 맞트레이드 상대중 한명인 [[에모토 타케노리]]에 대해 "내가 왜 저런 친구랑 바뀌어야 되는거야?!" 라며 불만을 표시하자, 이를 들은 에모토는 "어디 꼴리는 대로 지껄여 보시지!!"면서 한판 붙어보자는 태도로 맞서며 둘의 관계는 한때 최악의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그도 그럴만 한게 에모토는 1973년 난카이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끈 공신인데 그런 사람을 비하했으니..) 그러나 이 둘은 나중에 서로 화해하며 둘도 없는 친구지간이 되었고, 후일 에나츠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자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던 에모토가 직접 증인으로 나서는 등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였다.] === [[난카이 호크스]] === [[파일:external/cca839102b5b8e1fcacd6b86da9e71120230ac0bc1aefc22234c78e713770791.jpg|width=250]] 난카이의 일원이 된 에나츠는 지병인 혈행장애와 심장질환으로 1976년 시즌 6승 12패 9세이브, 탈삼진 109개에 그치며[* 의외로 방어율은 2.98로 전년도인 1975년보다 더 내려갔다. 출장경기가 49경기에서 36경기로 대폭 감소한 게 함정이긴 하지만.] 최악의 한해를 보냈다. 이에 난카이의 [[감독 겸 선수]]이던 [[노무라 카츠야]]는 에나츠가 긴 이닝을 던질 수 없는 점을 감안하여 한 경기에 50개 정도만 던지는 구원 투수로 뛸 것을 권유하였는데 처음에 에나츠는 "나를 퇴물로 생각하는 겁니까?" 라며 반발했지만 "구원 투수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야구계에 혁명을 일으켜 보자" 라는 노무라의 설득에 감명받고[* 노무라의 회고에 따르면 제안을 받은 에나츠는 "내가 선발 투수에서 구원 투수로 바뀐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반발했지만, 노무라는 "뭐가 부끄럽다는 게냐? 훌륭한 일이 아닌가? 자네가 일본 야구의 [[마무리 투수|릴리프]] 투수로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라고 설득하자 에나츠가 눈을 반짝이며 "오오... 혁명인 겁니까?" 라 되물었고, 이에 노무라가 "그래, 혁명이다!" 라고 강하게 답하자 에나츠가 "좋아, 하겠습니다!" 라며 받아 들였다고.] 1977년 시즌 중반부터 전업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19세이브(리그 1위), 22[[세이브 포인트|SP]]로 [[세이브 포인트|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얻으며 노무라의 기대에 부응했고, 사실상 일본 프로야구의 첫번째 전문 [[마무리 투수]]로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노무라는 에나츠와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에모토 타케노리]]도 명투수로 단련시킨 바 있다.][* 물론 [[마무리 투수]]라고 해서 [[토니 라루사]]가 [[데니스 에커슬리]]로 시작한 이후의 현대적 1이닝 전문 마무리가 아니라,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2~3이닝 정도를 책임지는 [[롤리 핑거스]], [[마이크 마셜]], [[브루스 수터]], [[리치 고시지]]와 비슷한 [[중무리 투수]] 역할이었다.] 당시 일본 야구계에선 [[마무리 투수]]의 컨디션 조절 방법이 체계화 되어있지 않은 탓에,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던 에나츠는 직접 기자들에게 메이저리그의 구원 투수들은 어떻게 하는 지 묻기도 했고, 결국 에나츠는 자기 [[나름]]대로 컨디션 조절법을 창안하여 경기 개시 후 5회 이전엔 덕아웃에 들어가지도 않고 라커룸에서 [[마사지]]를 받거나 잠을 자는 식으로 몸을 추스렸다. 이 방법은 처음엔 구단에서는 물론 야구계와 언론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아무튼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에나츠는 비록 전성기 시절의 불같은 강속구는 사라졌지만 타자와의 수싸움과 정교한 변화구를 바탕으로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고, [[가네다 마사이치]]는 "현역 시절의 나보다 낫다"며 에나츠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파일:external/2e1d010e4f499242d8271aaa3cf539ef6af275d903b1f31241341dd986b88389.jpg]] 그러나 1977년 시즌 말 [[노무라 카츠야]]가 구단과의 불화로 난카이를 떠나자 에나츠도 난카이를 떠나겠다고 선언, 현금 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난카이는 [[비밀번호(스포츠)|20년간]]...~~ 히로시마에서도 [[고바 타케시]] 감독이 그를 마무리로 중용하며 에나츠는 1979 ~ 1980년 2년 연속으로 최다 [[세이브(야구)|세이브]]와 [[세이브 포인트|최우수 구원투수]] 수상을 달성했고, 히로시마의 1979 ~ 1980년 [[일본시리즈]] 2년 연속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1979년에는 에나츠 생애 처음이자 마무리 투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하였고, 특히 그 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9회말에 보여준 이른바 '''[[에나츠의 21구]]'''는 아직까지도 [[일본프로야구]] 명승부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남아있다. ~~그리고 [[니시모토 유키오|그 때 긴테츠 감독]]은 영원한 콩라인행으로~~ 에나츠는 은퇴 후 히로시마 에서 뛰던 시절을 '''"정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1979년은..."''' 이라고 회상하며 그때의 활약에 대해 여전히 감격에 젖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시절 신인 투수였던 [[오노 유타카]]의 투구폼을 교정해 주고 많은 조언을 건네는 등 그가 프로에서 성공하는데 적지 않은 힘을 보태주었고, 팀의 중심 타자였던 '''"철인"''' [[기누가사 사치오]]와 친분을 쌓으며 기누가사가 2018년 4월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절친으로 우의를 다졌다. === [[닛폰햄 파이터즈]] === [[파일:external/www.mg-fighters.net/enatsu.jpg|width=250]] 1981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인 [[오사와 케이지]]의 강력한 요청으로 에나츠는 1-1 맞트레이드를 통해 [[닛폰햄 파이터즈]]로 적을 옮겼다. 그곳에서도 에나츠는 [[끝판왕]]으로 강력한 포스를 발휘했고, 이적 첫해인 1981년 닛폰햄이 19년만에 [[퍼시픽리그]]를 제패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다만 닛폰햄은 [[일본시리즈]]에선 요미우리에게 패배하여 요미우리의 V9시대 이후 8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여담으로 그 당시 두 팀의 구장이 똑같이 [[고라쿠엔 구장]]이었기 때문에 '''덕아웃 시리즈'''를 구현한 전무후무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게다가 25세이브로 구원부문 1위에 퍼시픽리그 MVP 까지 손에 쥐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양대 리그에서 MVP를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덧붙여 히로시마 시절 포함하여 1979~1982년 4시즌 연속 구원 1위를 차지했고 사상 최초로 12개 구단을 상대로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다만 친정이던 한신을 상대로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바람에 12개 구단 상대 승리투수는 되지 못했다.] 1982년에는 프로통산 200승을 달성하며 [[가네다 마사이치]]가 주도하던 명구회에 가입하였다. === [[세이부 라이온즈]] === [[파일:external/im10-a.mbokimg.dena.ne.jp/479796473.1.jpg]] [[한신 타이거즈]] 시절 배터리 멤버이자 절친 [[타부치 코이치]](오른쪽)와 세이부에서 재회했다.[* 타부치는 세이부로 이적한 이후 포수 마스크를 벗고 1루수로 전환하여 에나츠와 다시 배터리를 결성하지는 못했다.] 1983년 시즌 후 오사와 감독이 물러나면서 에나츠는 1984년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에나츠를 [[마무리투수|마무리 투수]]로 전향시켜 대스타가 되는 계기를 만든 [[노무라 카츠야]]도 1980년 세이부에서 은퇴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기에 예년같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당시 성적은 20시합에 출전해 1승 2패 8세이브. 방어율 3.65를 기록. 참고로 이 방어율은 에나츠의 역대 최악의 방어율 성적이었다.(실점 11점중 자책점이 무려 10점이었는지라) 그 때문에 WHIP도 역대 최악은 1.38 을 기록.], 감독이던 [[히로오카 타츠로]] 특유의 관리야구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에나츠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이었다. 결국 에나츠는 통산 200세이브(에나츠가 달성했다면 사상 최초였다)와 3천 탈삼진이 눈앞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당시 200세이브 까지 '''단 7개''', 3천 탈삼진은 '''단 13개''' 남아 있었다.] 미련없이 1984년 시즌 도중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타부치 코이치]]도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구단에서 따로 은퇴경기 내지는 은퇴식을 마련해 주지 않았지만 에나츠는 자신이 소속해 있던 [[명구회]]의 협찬으로 은퇴식을 거행했고, 에나츠는 은퇴식에서 "메이저리그에 도전해 보겠다. 에나츠 유타카 36세, 정말 시시한 녀석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 일본에 돌아오거든 '수고했다' 라는 한마디로 맞이해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더욱 큰 꿈이 있음을 털어놓았다. 에나츠의 현역 18시즌 간 통산 성적은 '''829경기 출장, 3196이닝, 2987탈삼진, 206승 158패 193세이브 평균자책 2.49''' 이다. 또한 MVP 2회, [[사와무라상]] 1회, 베스트나인 1회를 수상했다. == 은퇴 이후 == 은퇴식에서 밝힌 것 처럼 에나츠는 이듬해 1985년 초 [[미국]]으로 건너가 [[밀워키 브루어스]]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하여 36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동양인으로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에나츠는 스프링 캠프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나이가 문제였고, 결국 밀워키의 시즌 개막전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며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후 에나츠는 [[니혼 TV]], [[TV 아사히]] 등에서 해설가로 활동하였고 탤런트와 영화배우로 예능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3월, 각성제 단속법 위반혐의로 체포당하여 초범임에도 각성제 소지량이 많다는 이유로 징역 2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시즈오카]] 형무소에 수감되는 [[흑역사]]를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에나츠는 명구회를 자진 탈퇴했다.[* 이는 회장이던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출소 후 명구회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에나츠는 형무소에서의 규칙적인 생활로 오히려 몸 상태가 많이 건강해졌고, 스승이던 [[노무라 카츠야]]와 현역 시절 동료이자 친구인 [[에모토 타케노리]], [[기누가사 사치오]]의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통해 1995년 4월 가석방으로 출소하여 해설가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했다. 출소 후 에나츠는 "나의 석방을 위해 힘써준 모두에게 감사한다. 만약 형무소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죽은 목숨 이었을지도 모른다" 라면서 수감 생활이 자기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음을 시사하였다. 또한 야구계에서도 독불장군이던 에나츠가 형무소에서 새 사람이 되어 나왔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나츠는 출소 후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받은 트로피와 상장 등은 전부 내다 버렸다고 말했다. [[파일:external/userdisk.webry.biglobe.ne.jp/120007955565916400582.jpg|width=300]] 에나츠는 현재 TV 오사카와 데일리 스포츠의 해설가, 평론가로 야구계에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2015년 한신의 춘계 캠프 때 투수 인스트럭터(임시 [[코치(스포츠)|코치]])로 일했고 2016년 2군 춘계 캠프 때도 인스트럭터를 맡아 투수들을 지도했다. 2015년 캠프 때 [[오승환]]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는데, 어떤 [[기레기]]가 [[http://sports.news.naver.com/npb/news/read.nhn?oid=016&aid=0000616733| [[각도드립]]을 치며 에나츠를 비하하는 쓰레기 기사를 싸지르기도 했다.]]. 기사를 보면 '''에나츠가 오승환보다 못한 투수라고 한다(...)''' ~~설마 범죄전과 때문에 비난하는 건가? [[바카라이온즈|이젠 똑같은 전과자 신세]]인데?!~~ 2018년 4월 23일, 소울 메이트인 [[기누가사 사치오]]가 [[대장암]]으로 작고하자 슬픔을 금치 못하면서 '''"기누가사는 나의 보물같은 친구였다. 나도 곧 그를 따라가서 저 세상에서 같이 야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라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에나츠는 기누가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절친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 하는 사나이의 진한 우정을 보였다. == [[에나츠의 21구]] == 해당 항목 참조. [각주]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일본의 마약사범]][[분류:1948년 출생]][[분류:아마가사키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