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 양회열(梁會烈) || || '''생년월일''' || [[1971년]] [[9월 9일]] || || '''출신지''' || [[광주광역시]] || || '''학력''' || [[한서고등학교 야구부|한서고]][*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 야구부]] 출신이었으나 주전자리를 잡지 못해서 한서고로 전학을 갔다.] || || '''포지션''' || [[내야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1990년 [[태평양 돌핀스]] 신고 선수 입단 || || '''소속팀''' || [[태평양 돌핀스]] (1990) [br] [[해태 타이거즈]] (1991~1996) || || '''지도자''' || [[화순고등학교 야구부|화순고등학교]] 감독 (2015~2016) || [목차] == 개요 ==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선수. == 아마추어 시절 ==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서 [[한서고등학교 야구부|한서고]]로 전학을 갔다. 한서고를 졸업한 후에도 프로에 지명을 받지 못했고, 불러주는 대학도 없었다. == 선수 시절 == 결국 1990년에 [[태평양 돌핀스]]에서 5백만원을 받고 [[연습생]]으로 입단을 했으나 그 해 말에 방출된 뒤 고향인 [[해태 타이거즈]]에 간신히 입단했다. 포지션은 내야 전 포지션을 뛰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야구)]]. 매년 저조한 성적을 거뒀고 기대치도 높지 않아서 매년 마무리 캠프나 스프링 캠프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에게도 큰 기회가 찾아왔으니...''' [[이종범]]이 [[1995년]]부터 [[방위병]]으로 소집되면서 원정경기를 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95년에 인생 시즌을 맞이했다. 수비에서는 원정경기에서는 [[유격수]], 홈경기에서는 내야 유틸리티맨으로 활약했고, 공격에서도 해태 주전 선수 중 유이하게 [[규정타석]]을 채우며 356타수 94안타, 타율 0.264라는 당대 내야수치고는 좋은 성적을 내 이종범의 빈 자리를 제대로 메꿨다. 이 해 해태는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홍현우]][* 무려 신인왕에 .288 22홈런 81타점을 기록한 [[이동수]]를 제치고 수상한 것이었다.]와 원정경기를 뛸 수 없는 [[이종범]]을 빼면 믿을 만한 타자가 전무했던 시기라 양회열의 활약은 그만큼 반가웠다.[* 95시즌의 해태를 보면 ERA 1위, 타율 7위(8개구단 중)로 투타의 불균형이 극과 극을 달리던 시기였다. 이종범의 홈경기 출전 불가 외에도 그 전해만 해도 비록 규정타석에는 못미쳤으나 3할2푼을 치던 [[이순철]]이 갑작스런 노쇠화로 간신히 2할을 치는 타자가 되었으며, --[[이호성]]--, [[이건열]], [[정회열]] 등도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했다. 이종범과 홍현우 그리고 그나마 1인분은 하는 양회열 외에는 OME급의 타선이었던 것. [[야만없]]이지만 해태의 타력이 평균수준만 되었어도 95년도의 챔피언은 누가 될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활약을 인정받아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에서도 비록 낙선하긴 했지만 [[김민호(1969)|김민호]]에 이은 2위 득표율을 기록했고, 연봉도 무려 3배가 오른 2,300만 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1995년 비공식 타이틀을 하나 차지했다. 바로 실책왕(25개)-- 그러나 이듬해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과 [[장성호]]가 입단하고, 이종범이 전역하면서 그의 입지는 극도로 좁아졌고, [[BABIP]]의 신이 그를 외면했는지 공격력까지 다시 떨어지면서 1997 시즌이 끝난 뒤 해태에서 방출되었다. == 여담 == * 이름이 당시 같은 팀에서 뛰는 [[정회열]]과 똑같아서 나름 기억하는 팬들도 있다고 한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광주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71년 출생]][[분류:내야수]][[분류:우투우타]][[분류:해태-KIA 타이거즈 은퇴/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