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프랑스군(2차 세계대전)/장성급 장교)]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2395><tablebgcolor=#FFF><(> {{{#!wiki style="margin: -4px -8px" [[파일:1-1464792511.jpg|width=310]]}}} || ||<#002395> {{{#FFF 이름}}} ||'''Henri Honoré Giraud''' 앙리 오노레 지로 || ||<#002395> {{{#FFF 생몰년도}}} ||1879. 1. 18. ~ 1949. 3. 11. || ||<#002395> {{{#FFF 복무}}} ||[[프랑스군|프랑스 육군]] · 제 4 주아브연대 3대대 · 메츠 제 6 군관구 사령관 · 7군 사령관 · 9군 사령관 [[자유 프랑스]] · 국민해방 프랑스 위원회 의장 · 프랑스군 총사령관 || ||<#002395> {{{#FFF 최종계급}}} ||대장(Général d'armée) || ||<#002395> {{{#FFF 주요참전}}} ||[[제1차 세계 대전]] · [[말메종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 [[프랑스 침공|프랑스 전투]] · [[횃불 작전]] || ||<#002395> {{{#FFF 서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 [목차] == 개요 == 양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프랑스]]의 장군. [[프랑스 침공|프랑스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프랑스 항복 이후 탈출하여 [[자유 프랑스]]에 합류, 연합군 일원으로써 참전한다. [[샤를 드골]]과 더불어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 생애 == === 세계대전기 === 앙리 지로는 [[알자스]]계 출신으로 1879년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에 임관하여 [[프랑스 식민제국#s-5|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제 4 [[주아브]](알제리 프랑스 보병대)의 지휘관으로 근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주아브 연대와 복귀해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1914년 생 캉텡 전투에서 [[총검 돌격]]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전투 종결 후 [[독일 제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벨기에]]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수감 2개월 뒤 유랑 서커스 단원으로 위장하여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전범#s-2.4.1.1|에디스 카벨]]와 벨기에 공주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17년 가을, 프랑스 군에 복귀한 지로는 [[필리프 페탱]]이 주도한 [[말메종 전투|말메종 공세]]에서 제4주아브 연대의 제3대대를 이끌고 말메종 요새를 점령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종전 후 지로는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 휘하의 이스탄불 프랑스군에서 근무하였다. 1926년에는 당시 스페인 점령지역이었던 모로코를 [[리프 공화국]]을 위시한 원주민 커바일족 저항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결성되어 저항군과의 전쟁에 돌입하였고 앙리 지로 또한 연합군이 커바일족 저항군 사령관 아브드 엘 크림을 생포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의 공로로 지로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 파리에서 에꼴 데 게흐(École de Guerre)[* 프랑스의 고위 장교 사관학교.]에서 군사전략 등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되었고 이 때 [[샤를 드골]]이 교육생으로 그의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이후 [[메스]] 군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중령이었던 [[샤를 드골]]과 재회하기도 하게 된다. 1936년에는 장군으로 진급하여 7군 사령관이 되었고 전쟁최고의회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이때 지로는 기갑 전력의 효과를 미미하다고 보았는데 휘하의 소장파였던 드골 중령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고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샤를 드골#s-3|샤를 드골 문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기갑전력의 활용과 효과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대령 진급이 몇 차례 누락되기도 하였고 부대가 해체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 [[프랑스 침공|프랑스 전투]]에서 7군 사령관으로써 네덜란드 방면의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었고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는 전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7군의 소모가 컸기 때문에 7군은 9군과 병합되었고 최전선에서 아르덴을 돌파한 독일군의 진격을 막는 임무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드프랑스]] 지방의 와시니 지역에서 직접 정찰에 나섰다가 [[독일 국방군]]에게 생포되어 '''또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나치 독일]]의 군사 법원은 지로에게 독일 민간인에 대한 사형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하였으나 무죄를 선고 받고 드레스덴 인근의 쾨니히슈타인 요새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지로는 인근의 지형 및 지리를 숙달하고 독일어를 배웠고 밀반입받은 로프와 와이어, 모포 등으로 준비하여 2년간 꾸준히 탈출계획을 세웠다. 1942년 4월 17일, 준비한 도구를 바탕으로 성벽을 타고 내려와 길렀던 수염을 밀고 현지인으로 위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탈출 후 영국의 특수작전집행부에 연락을 취해 위조된 신분증 및 옷, 현금 등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스위스]]를 통과해 [[비시 프랑스]]로 복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지로는 [[페탱]]을 만나 나치 독일이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대해서 항거하여야 한다고 설득하였으나 페탱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탱은 지로를 독일로 다시 송환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지로가 프랑스에 복귀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인리히 힘러]]는 [[게슈타포]]를 동원해 그를 수배하였다. 아이젠하워가 횃불 작전에 임하여 비밀리에 연락해 북아프리카의 프랑스군을 지휘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다. [[프랑수아 다를랑]]이 암살되고 나서야 그 연락을 받을 수 있었고 드골, 처칠, 루즈벨트와 함께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후 1944년에 직에서 물러난다. === 종전 이후 === [[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879년 출생]][[분류:194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