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5><bgcolor=#FFFFFF><:>[[중의원|[[파일:shuugiin_logo.png|width=100px]]]] {{{#000000 '''[[일본|{{{#000000 일본}}}]] [[중의원|{{{#000000 중의원}}}]] ([[도쿄도 제4구|{{{#000000 도쿄 4구}}}]])'''}}}|| ||<width=30%><:> ''선거제도 개편'' ||<width=5%><:>→||<width=30%><:>'''제41대[br]아라이 쇼케이'''||<width=5%><:>→||<width=30%><:>'''제41~42대'''[br][[모리타 겐사쿠]][* 아라이의 자살로 인한 보궐선거 당선]|| [[파일:아라이 쇼케이.jpg]] 新井将敬 ([[1948년]] [[1월 12일]] ~ [[1998년]] [[2월 19일]]) [목차] == 개요 == [[일본]]의 [[정치인]]. [[중의원]] 4선을 지냈다. [[재일 한국인]] 출신. 증권 스캔들로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자 [[도쿄]] [[미나토구(도쿄)|미나토구]]의 [[호텔]]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 생애 == 1948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경재(朴景在)이다. [[아라이]](新井)란 성은 [[통명]]으로 박(朴)씨들이 [[박혁거세]]가 우물 속의 알에서 나왔다는 고사에서 따서 많이들 썼다고 한다. [[조선학교]] 대신에 일본의 중학교, 오사카부립 키타노 고등학교[* [[하시모토 도루]], [[마쓰시마 미도리]], [[노노무라 류타로]]가 이곳 출신.]를 졸업했다. 1966년에 [[조선적]]에서 [[일본인]]으로 귀화하였다. 본래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재수하여 [[도쿄대학]] 이과1류[* 공학부와 물리학 등]에 입학했다. 젊은 시절엔 [[미시마 유키오]]와 [[칼 마르크스]]에 심취했다. 정작 졸업은 도쿄대학 경제학부에서 했다. 중간에 [[전과(학교)|전과]]한 모양이다. 졸업 후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에 들어갔다가 1973년에 [[일본 재무성|대장성]]에 들어간다. 세무 관련 업무를 맡다가 1980년에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1923년 ~ 199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파로 부총리 등을 지냈다. 정치인 [[와타나베 요시미]]의 아버지이다.] 신임 대장대신(大藏大臣; [[기재부]] 장관)의 비서관이 되었다. 비서관으로 지내면서 증권업계가 원하던 중기국채펀드 등을 도입했고 은행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83년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2구에 출마, [[이시하라 신타로]]와 대결했다.[* 같은 자민당이었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던건 당시 일본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도쿄 2선거구에서 5명 선출했는데 당시 자민당에서 3명의 후보자를 냈다.] 당시에 아라이의 포스터에 [[북한]] 사람이란 표식을 누군가 붙여놓은 '검은 씰 사건(黒シール事件)'이 일어났다. 이시하라는 자기 비서가 알아서 한 거라고 꼬리 자르기를 시전했고 아라이는 낙선했다.[* 참고로 당시 도쿄 3구의 선거결과는 자민당이 1명 당선되었고 야당후보가 4명 당선되었다.] 아라이는 이때 좀 더 자신이 확실한 일본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신우익 운동을 펼치던 우익운동가인 [[노무라 슈스케]](野村秋介, 1935-1993)와 친해졌고, 노무라가 이시하라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1986년에 [[도쿄도 제4구|도쿄 4구]]에 다시 출마하여 처음으로 입성한 후 4선을 역임했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아직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소속이었을 때다.]는 아라이의 지역구 주민이었는데 정작 [[홋카이도 제4구]]로 나가 당선됐다. 1992년에 자민당 부대표인 [[가네마루 신]]이 5억 엔 상당의 불법자금을 받은 [[사가와 규빈 사건|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東京佐川急便事件)이 일어나자 가네마루를 맹렬히 비판하고 정치개혁 등을 주장해 젊은 논객으로 인기를 얻는다. 특히 아라이는 일본의 중대선거구제 대신에 소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했는데 소선거구제에 반대하던 [[이시하라 신타로]]나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수구파라고 공격했다. 이듬해 1993년에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이 쪼개질 때 탈당하여 자유당을 결성한다. 1994년엔 신진당에 들어갔지만 [[오자와 이치로]]의 독단적인 당 운영에 반대하여 탈당하고 1996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자민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그 후 자민당에 복당했다. 그러던 중 증권 스캔들이 일어나는데 1980년대에 그와 연이 있던 증권사인 닛코 증권(日興証券; 현 SMBC 닛코 증권)의 편의를 봐주고 차명계좌 등을 운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98년 2월 19일에 중의원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때 "마지막 말은 들어 주십시오. 저는 결백합니다."라고 말했고, 다음 날 도쿄도 [[미나토구(도쿄)|미나토구]]의 호텔에서 목 맨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호실 바닥에는 위스키 병이 가득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아내와 [[가메이 시즈카]]에게 보내는 유서가 있었다고 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간혹 [[음모론]]이 나오기도 한다.[* 사건 관련자들 중에 자살자가 많긴 했다.] 아라이가 자살했을 때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상태였는데 "도대체 왜 우리 애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건가."라고 발언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 아라이 쇼케이의 비서였던 [[오구마 신지]](小熊慎司; 1968 ~ )는 2012년에 [[다함께당]] 소속으로 [[일본 참의원]]이 되었다가 [[개혁결집회]]를 거쳐 현재 [[입헌민주당(2020년)|입헌민주당]] 소속 중의원이다. 지역구는 [[후쿠시마현 제4구]]. == 평가 == 개인사로 볼 때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6세까지 조선적이었단 불리한 조건임에도 '''자민당 중의원'''으로 4선을 지냈다. 당시 그와 대립하던 인물들은 [[오자와 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일본 정계의 거물들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소수의 조선인이 있긴 하지만 전후에 중의원을 지낸 한국계 일본인은 그가 유일하다.[* 중의원의 경우는 일본 패전 이전에는 한국계는 [[박춘금]]이 유일했다. 현재 한국계 의원은 [[하쿠 신쿤]]이 유일하다.] 아라이 쇼케이는 최소 겉으로는 자신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란 자각은 그리 없던 것으로 보이고, 정책적, 정치적인 측면으로 볼 때 전형적인 우익 일본인이었다. 도쿄 지검이 수사에 들어가자 자신의 출신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는 설도 있다. == 소속 정당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50038><tablebgcolor=#fff,#191919><rowbgcolor=#E50038> '''{{{#fff 소속}}}''' || '''{{{#fff 기간}}}''' || '''{{{#fff 비고}}}''' || || [include(틀:자유민주당(일본))] || 1983 - 1994 || 정계 입문 || || [include(틀:무소속)] || 1994 || 탈당 || || 자유당 || 1994 || 창당 || || 자유개혁연합 || 1994 || 합당 || || [include(틀:신진당)] || 1994 - 1996 || 합당 || || [include(틀:무소속)] || 1996 - 1997 || [[오자와 이치로]]의 독단적 당 운영에 반발해 탈당 || || [include(틀:자유민주당(일본))] || 1997 - 1998 || 복당 || [[분류:일본의 정치인]][[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1948년 출생]][[분류:1998년 사망]][[분류:오사카시 출신 인물]][[분류: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분류:신진당 국회의원]][[분류: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일본의 자살한 인물]][[분류:객사한 인물]][[분류:일본의 보수주의자]][[분류:오사카부립 키타노 고등학교 출신]][[분류:도쿄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