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top2=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fff><bgcolor=#c29f6d> {{{#000 {{{+1 '''신라-왜 전쟁'''(삼한정벌)[* 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는 키워드. 일본 『국사대사전(国史大辞典)』에는 '신라정토'로 기술하기도 함.]}}}[br]新羅・倭戰爭([ruby(三韓征伐, ruby=さんかんせいばつ)]) | Silla–Wa War}}} || ||<-3> [[파일:silla-japan-war.png|width=100%]]|| ||<width=20%><bgcolor=#c29f6d> '''{{{#000 기간}}}''' ||<-2> [[364년]] 음력 4월 - [[404년]](407년?) || ||<bgcolor=#c29f6d> '''{{{#000 장소}}}''' ||<-2> [[한반도]] 중・남부[*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왜군이 고구려의 옛 대방군(현 [[황해도]]) 지역을 공격하여 수군을 동원하여 섬멸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 ||<bgcolor=#c29f6d> '''{{{#000 원인}}}''' ||<-2> [[백제]]와 [[야마토|왜국(야마토 정권)]]의 [[신라]] 복속 시도[* 일본서기 주해, 村井(1999).][* 사실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진구 황후]]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신라에 물난리를 일으켜 항복시켰다는 신화가 나온다. 이는 당시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싶었던 일본인들의 욕망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bgcolor=#c29f6d> '''{{{#000 교전국}}}''' ||[[파일:신라기.png|width=23]] '''[[신라]]'''[br][[파일:고구려 군기.png|width=23]] '''[[고구려]]''' ||[[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width=23]] '''[[일본]]'''[br][[파일:external/s24.postimg.org/K_001.jpg|width=23]] '''[[백제]]'''[br]'''[[가야]]'''(?) || ||<bgcolor=#c29f6d> '''{{{#000 지휘관}}}''' ||[[파일:신라기.png|width=23]] [[내물 마립간]][br][[파일:고구려 군기.png|width=23]] [[고국양왕]][br][[파일:고구려 군기.png|width=23]] [[광개토대왕]][br] ||<^|1>[[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width=23]] [[닌토쿠 덴노]][br][[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width=23]] [[리추 덴노]][br]--[[파일:nishikinomihata_small.png|width=23]] [[진구 황후]]--[*주의 [[이주갑인상]]에 따른 [[일본서기]]의 창・변작으로 사료되고 있음.] || ||<bgcolor=#c29f6d> '''{{{#000 병력}}}''' ||병력 불명[br],,,광개토대왕의 신라 원군 5만여 명,,, ||병력 불명[br] || ||<bgcolor=#c29f6d> '''{{{#000 결과}}}''' ||<-2> 고구려-신라군의 왜군 격퇴 || ||<bgcolor=#c29f6d> '''{{{#000 영향}}}''' ||<-2> 신라의 대고구려 의존도 심화[*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권.]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왜 전쟁''',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또는 '''신라의 왜군 격퇴''' 사건은 4세기 중엽 - 5세기 초에 연쇄적・다발적으로 일어난 [[야마토|고대 일본]]의 한반도 침공을 이른다. 외세와의 교류가 드물었던 일본에서는 이 당시의 사건이 고쿠후 문화(国風文化)[* 국풍 문화. 당나라가 쇠퇴하자 일본이 견당사의 파견을 중지하고 일본 내부의 독자적 발전에 집중하기 시작한 10세기-12세기 경의 문화를 의미한다.] 시기부터 [[임진왜란]], [[일본 제국|제국주의기]]에 이르기까지 [[야마토 민족]]의 민족주의적 구심점으로 작용[* 「八幡愚童訓」『日本大百科全書』小学館。]하였기에, 《[[일본서기]]》의 내용을 반영한 '삼한정벌([ruby(三韓征伐, ruby=さんかんせいばつ)])' 등의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https://ja.wikipedia.org/wiki/%E4%B8%89%E9%9F%93%E5%BE%81%E4%BC%90|위키백과 일본어판의 기술]]). 다만, 일본에서 '삼한정벌'을 이야기할 때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왜군의 침공을 이야기하면서도 중간중간 《일본서기》에만 존재하는 '신화적 내용'을 가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차검증되지 않은 픽션으로 사료가 오염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삼한]]'이라 하면 [[마한]], [[변한]], [[진한]]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남부를 모두 일컫지만, 실제로 당시 일본이 간접적으로 협력 관계에 있던 [[백제]]를 침공했다고 보기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으며, 이 밖의 다른 지역을 복속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이에 현대 일본 학자들 가운데서는 '삼한정벌' 대신 '신라 정벌' 또는 '신라 토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신라의 정벌에도 실패했다(...)]. 신라-왜 전쟁은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기에, [[임나일본부설]], 한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의 분포 논쟁,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해석 논쟁, 일본으로의 질자(質子;볼모) 논란이나 [[칠지도]] 논란 등 '''다른 많은 고대사 논쟁과 얽히고 설킨 관계에 있다'''. 심지어는 이것이 한일관계 악연의 근원이라는 해석도 간혹 존재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서는 미디어 리터러시, 즉 여러가지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내용 == 삼국 시대 중기 이후의 역사는 많은 사료가 소실되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일본서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사료 이외에 [[고고학]], [[금석학]] 유물을 조사하여 4세기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를 유추했다. 이와 관련된 증거로는 대표적으로 《[[광개토대왕릉비]]》, 《[[호우총|호우명 그릇]]》 등이 있다. 그래도 관련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4세기 후반에(내물 마랍간 재위기) 왜의 잦은 침공이 있었으며[* 삼국사기,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릉비 등.], 이 왜는 백제와의 공동전선을 폈고, 힘에 부친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하면서 까지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등]. [[광개토대왕릉비]] 의 내용은 당시 왜의 신라 공격 상황과 고구려의 구원병력 5만의 출동 및 신라 이사금으로 하여금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조공케 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 영락 10년 경자년(서기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경주)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 금관가야 지역의 성이다.]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관군이) 신라성, □성을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城)……[* 이 부분 71자는 글자 훼손 때문에 판독 불명.…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의 왜(倭)-백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한 내용일 것으로 추정.]……. ▨▨▨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과거 신라의 매금(이사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원문 :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삼국사기]] 에는 해당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서기 363년 내물 마립간(이사금)이 토함산에서 왜군을 격파한 기록이나 393년에 왜군이 금성을 닷새간 포위한 기록등이 나오지만 같은 내물 마립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400년(혹은 399년) 고구려군대가 지원을 한 전쟁에 대한 기록은 없다 [* 393년의 침공에 관한 기록은 1~2년 정도의 오차가 있는 점을 제외하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얼추 맞는다. 물론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도왔가는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해당 기록은 훼손 및 표기의 해석에 따라 여러 주장을 낳았고 그 중 하나가 [[임나일본부설]]이다]. ==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신라 측의 공격]]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보통 [[신라]]가 [[왜구]]들한테 시달렸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측 [[역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도 꽤나 많이 나오는 편이다. 물론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는 일본측의 기록들은 한국측 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확인이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일본측 사서들에서 꾸준히 확인되는 신라의 일본 침공 기록들을 무턱대고 부정만 할 수는 없으므로 아직까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편찬된 역사서이고 [[김부식]]이 유학자의 입장에서 썼으므로 신라의 기록이 있었더라도 이를 무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견훤]]이 [[경애왕]]을 죽였던 '서라벌 침공' 당시 견훤이 이끌던 [[후백제]]군이 [[경주시|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다수 손실되었는데 이 때에 신라측이 보관하던 사서들도 상당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일본측 사서들에서 나오는 신라의 왜 침공 기록들이 전부 다 사실이라면 신라와 왜는 서로간의 무수한 침공을 주고받는 치열한 전쟁을 무려 수백년 동안 계속 이어온 셈이 된다. 더 자세한 내용들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 관련문서 == * [[한일관계]] * [[일본 우익사관]] * [[진구황후]] [각주] [[분류:신라]][[분류:통일신라]][[분류:아시아의 전쟁]][[분류:한국사/전투]][[분류:일본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