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불가르 칸]][[분류:크룸 왕조]][[분류:정교도 군주]] 시메온 1세(시메온 대제) Симеон I Велики 생몰년: [[864년]],[[865년]] ~ [[927년]] [목차] == 개요 == [[불가리아 제1제국]]을 893년 ~ 927년까지 통치한 명군주. == 즉위 이전 == === 아버지, [[보리스 1세]]의 기독교로의 개종 === 역사상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불가리아 제1제국|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칭제한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칸]][* 지금의 [[불가리아]]는 [[슬라브|슬라브계]] 국가가 되었지만, 본래 불가리아를 세운 [[불가르]]족은 [[튀르크|투르크계]] [[유목민]]이었고, 불가리아의 군주들은 유목 사회의 전통에 따라 칸을 칭했다.] [[보리스 1세]]의 [[개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보리스는 외교적 고립[* 당시 불가리아는 북쪽의 [[대 모라비아 왕국]]과 남쪽의 [[동로마 제국]]에게 동시에 압박받으며 양면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었다.]에서 벗어나는 것과 종교적 통합[* 불가리아의 [[원주민]]인 트라키아인은 [[트라키아]]가 로마령이었던 시절 [[로마 제국|로마]]의 [[기독교]] 국교화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주민인 슬라브족은 [[슬라브 신화]]의 신들을 믿었으며, 또다른 이주민이자 지배 계급인 불가르족은 [[텡그리 신앙]]을 믿었기에, 당시 불가리아에는 3가지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이라는 2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 기독교 개종의 맹점: [[동로마 제국]] 황제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 ===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는데, [[밀라노 칙령]] 이래 [[로마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세속 군주 가운데 서열 1위였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형식상으로나마 불가리아의 칸에 대한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서로마 말기에 [[로마]]를 약탈한 [[알라리크]]와 [[가이세리크]],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 등 [[게르만족]] 군주들이 군사력으로 [[로마 제국|로마]]를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칭제하지 않고 왕을 칭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결국 이 점을 우려했던 이들에 의해 기독교화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 형, 블라디미르의 양위와 반기독교 정책, 아버지의 쿠데타 === 그 저항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은 바로 보리스의 '''첫째 아들''' [[블라디미르]]였다. 블라디미르는 보리스의 재위 기간 중에는 기독교화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자신에게 양위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보리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장남을 폐위하고 동로마식(?)으로 눈을 뽑아버린(...) 후, [[주교]]였던 삼남을 [[환속]]시켜 즉위하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시메온 1세]]'''였다. == [[893년]] 즉위 이후 == === [[919년]] [[차르]], 황제가 될 때까지 === 블라디미르의 폐위와 [[시메온 1세]]의 즉위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시메온 1세]]에게 한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라는 명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가 했던 것처럼, 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었고, [[913년]]에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의 칭제는 기독교 세계의 성직자 서열 1위였던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은 카롤루스의 칭제보다도 명분이 떨어졌기에, 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황제의 장인으로서 공동 황제가 됨으로써 진짜 로마 황제가 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섭정|섭정단]]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와의 밀약을 맺음으로써 실현되는 듯했으나, 니콜라오스가 쿠데타로 실각[* 총대주교직은 유지했으나 섭정 자격은 상실했다.]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러자 [[시메온 1세]]은 또다시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동로마 해군 제독 출신의 로마노스 레카피노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 되어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 즉위한 뒤에는 더더욱 그 야망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시메온 1세]]는 무력으로 [[로마노스 1세]]를 축출하기 위해 [[이슬람 제국|이슬람 세력]]인 [[파티마 왕조]]를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로마노스가 파티마 왕조의 사신을 회유하면서 실행하지 못했고, 더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시메온 1세]]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것을 포기하고, 로마노스의 제위를 인정하는 대신, 로마노스는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은 묵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메온 1세]]은 비록 진짜 로마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황제 칭호를 인정받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는 목표는 달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919년]]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유일한 불가리아 군주가 되었다. == 업적 == 시메온 1세는 그리스 방면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였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에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황제(차르)의 제관을 씌워주었고, [[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다음의 세 번째 유럽 제국인 [[불가리아 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초기 기독교 이후 최초의 총대주교좌인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창설되어 종교적으로도 큰 위신을 얻었다. 당시 불가리아 제국의 위세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던 키릴과 메토디 형제에 의해 [[키릴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이 키릴 문자를 바탕으로 성립된 교회 슬라브어와 이를 바탕으로 향유된 불가리아 문학은 정교회 슬라브권으로 퍼져나갔다. 이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동유럽권의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불가리아는 러시아 이전의 슬라브 세계의 실질적인 맹주 역할을 하는 국가가 된다. 이렇게 불가리아는 동유럽권의 양대 강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투쟁에서 승리하며,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서부와 북부로 계속해서 팽창해 나가며 [[발칸 반도]]의 대국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