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일본 덴노)] ||||<:><tablealign=right>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Empress_Suiko.jpg]] || ||<:> '''한풍 시호[*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 ||스이코 덴노(推古 天皇, 추고 천황)|| ||<:> '''화풍 시호'''[* [[휘]](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 ||토요미케카시키야히메노미코토(豊御食炊屋姫尊)|| ||<:> '''[[휘]]''' ||누카타베(額田部)|| ||<:> '''[[무덤|능호]]''' ||시나가노야마다능(磯長山田陵)|| ||<:> '''생몰''' ||554년~628년 4월 15일|| ||<:> '''재위''' ||592년~628년 4월 15일|| ||<:> '''황거''' ||토유라노미야(豊浦宮), 오하리다노미야(小墾田宮)||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제33대 [[천황]]. 휘는 누카타베(額田部). 26대 [[케이타이 덴노]]로부터 이어지는 일본 왕조 최초의 여왕(女王)이자 후세에 여제(女帝)로 추존되는 인물이며, 기록상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군주다.[* 외국 기록인 [[삼국지]]와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고대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와 [[토요]]는 일본 국내 기록과 공식적 왕계에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훗날의 [[일본 왕실]]과 혈통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원시적 부족국가의 씨족장에 가깝다고 추정된다.][* 스이코 덴노의 재위기간은 [[신라]]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과 겹친다. 그래서인지 왜국에서 여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평왕이 안 그래도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 딸을 후계자로 삼는 데 참고했다는 설도 있다.(쟁점 한국사 전근대편 p.64) 물론 이 당시 진평왕은 어차피 낮은 [[진골]]신분인 사위 [[김용춘]]이나 딸 덕만 둘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왜국을 마냥 따라했다기보다는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다.] == 행적 == 이복오빠 [[비다츠 덴노]](30대)와 혼인해서 2남 3녀를 낳았으며, 비다츠 덴노의 첫 번째 아내가 죽은 뒤 576년에 황후가 되어, '오오키사키(王后)'라고 불리었다. 32세가 된 585년에 스이코 덴노는 남편 [[비다츠 덴노]]와 사별했다. [[요메이 덴노]]의 사후, 황위 계승 분쟁 즉 '''정미의 난'''이 발발하여 [[스슌 덴노]]가 즉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가노 우마코]]가 그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모두가 소가씨를 두려워하여 누구도 황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가씨는 즉위에 적당한 남성이 없으면 황후가 정치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서 누카타베 태후를 즉위시키기로 하였다.[* 이는 누카타베 태후의 어머니인 소가노 기타시히메가 소가노 우마코의 이복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즉 누카타베 태후의 입장에서 소가노 우마코는 외삼촌이 된다)] 그렇게 소가씨는 아스카의 도유라 궁에서 누카타베 태후를 대왕(오오키미)으로 즉위시켰다. [[일본서기]]의 기록본에 의하면, 스이코 덴노는 즉위하고 다음 해에 [[요메이 덴노]]의 장남인 [[쇼토쿠 태자]]를 [[섭정]]으로 내세워 정치를 모두 다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정치의 주도권은 소가노 우마코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이코 덴노의 시대가 소가 가문의 전성기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대체로 [[쇼토쿠 태자]]와 스이코 덴노의 외삼촌인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정치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603년에 처음으로 관위 12계 제도가 시행되었고, 604년에는 관인들의 복무규정 성격이 강한 '''헌법 17조'''를 반포했다. 또한 607년 중국 [[수나라]]와 통교하여 5세기 말 이래 단절되어 있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하지만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16년(608) 6월 조에 따르면 수([[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가 [[수양제]]가 왜왕(倭王)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강탈이 아니라 약취(掠取) 즉 약탈 + 탈취당했다고 적혀 있다.. 뭐 똑같은 뜻이긴 하지만).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36_0170_0020_0020#self|소야신매자가 당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그러나 이것은 소야신매자가 국서를 일부러 분실했다고 --구라-- 치고 백제의 탓으로 둘러댔을 가능성도 있다. 수 황제가 보낸 편지에는 매우 고압적이고 명령조의 내용이 담겨있어 그대로 전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일:nihonshoki23.png]]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였다. 하지만 603년 이후 614년까지의 11년 동안 두 나라의 외교관계에 대한 기록은 일체 없다. 양국의 교류가 뜸해진 이유로는 당시 쇼토쿠 태자의 관위 12계와 헌법 17조 시행 및 조례(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 607년 [[수나라]]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한다.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수나라]]도 왜에 사신을 파견하자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벌인 사건으로 보인다. 이유야 어쨌든 백제의 외교문서 강탈 사건은 영락없는 [[갑질]]이자 외교적 횡포였기 때문에 614년까지 양국의 외교는 단절되었다가 재개된다. 이후 620년에는 천황기(천황의 기록), 국기(국가의 기록) 등의 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파일:2012013044056108.jpg]] 앞에서 설명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과는 별개로 [[백제]]의 선진문물들은 계속 받아들였는데 ≪[[부상국|부상]]략기’(扶桑略記)≫[* 11세기 무렵에 편찬되었다고 보지만, 14세기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다.]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에 '''"스이코 여왕과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융성해지기 시작해서 호류지, 아스카 지, 이카루가지 등의 건축이 이루어지는 등 [[아스카]]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그녀는 628년 3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먼저 죽은 아들 다케다 황자의 [[무덤]]에 합장되었다가 훗날 가와치의 시나가노야마다 능으로 옮겨졌다. == 가계 == * 아버지 : [[긴메이 덴노]] * 어머니 : 기타시히메(堅塩媛) -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의 딸. * 남편 : 이복 오빠 [[비다츠 덴노]](敏達天皇) * 1황녀: 토미치카이타코(菟道貝蛸) * 1황자: 타케타(竹田) * 2황녀: 쇼오콘덴(小墾田) * 2황자: 오와리(尾張) * 3황녀: 타간(田眼) [각주] [[분류:여성 덴노]] [[분류:일본의 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