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00><:>{{{#white {{{+3 스마랑 (인도네시아)}}}}}}|| ||<-3><:> [include(틀:지도, 장소=인도네시아 스마랑)] || [[인도네시아어]]: Kota Semarang, Semarang [[네덜란드어]]: Samarang(역사적 표기), Semarang [[자바어]]: Kutha Semarang [[영어]]: Semarang [[중국어]]: 三寶壟[* [[정화(명나라)|정화]]의 아명인 馬三寶에서 유래했다.] [목차] == 개요 ==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중부자바주]]의 주도로 시 인구 1,815,729명(2018년 기준), 도시권 약 730만 명(2018년 기준)이 거주하는 인도네시아의 대도시이다. 도시 인구 기준으로는 인도네시아에서 여덟 번째[* [[자카르타]]의 위성도시 [[데폭]], [[탕으랑]], [[브카시]] 셋 모두에 단순 인구로는 밀린다.], 자바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지만, 도시권(스마랑 남쪽의 스마랑현, 서쪽의 큰달Kendal현, 동쪽의 드막Demak현과 그로보간Grobogan현, 그리고 스마랑현이 감싸는 살라티가시Kota Salatiga를 포함)으로 보면 스마랑 도시권은 자카르타 도시권, 수라바야 도시권, 반둥 도시권에 이어 인도네시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특히 [[메단]]은 도시 인구는 스마랑보다 많지만 도시권 인구로는 밀린다. 이곳 방식으로 만드는 인도네시아식[* [[필리핀]]에서도 춘권을 '룸피아'로 부르는데 어원은 모두 [[민어(언어)|민남어]] '룬피아'(潤餅仔 lūn-piáⁿ-á)이다.] [[춘권]]인 '룸피아'(Lumpia)라는 음식이 특히 유명하여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스마랑식 룸피아[* 스마랑식보다 담백하고 덜 단 [[수라바야]]식 룸피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스마랑식이 더 인기 있다.]를 맛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스마랑은 '룸피아의 도시'(Kota Lumpia)라는 별명을 얻었다. == 역사 == 15세기 초 [[정화(명나라)|정화]]의 원정에서 정화 함대의 분함대가 현재의 스마랑 인근에 도착한 기록이 있으며 이 지역은 그 이전에도 자바 중부의 항구로서 기능하였지만, 현재와 같은 대도시는 아니었다. 스마랑이 본격적으로 항구로서 개발된 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의 [[인도네시아/역사#s-7.2.2|드막 술탄국]] 시대로, 스마랑과 인근이 현(kabupaten)의 지위를 획득한 시점은 공식적으로 1547년 5월 2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스마랑은 [[인도네시아/역사#s-7.2.3|마타람 술탄국]]의 항구로 번영하였는데, 1678년 1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마타람 [[아망쿠랏 2세]]의 채무 지불 과정에서 스마랑과 인근의 영토를 마타람으로부터 조차해 갔다. 1705년, [[자바 전쟁#s-2|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04–1708) 과정에서 마타람의 [[파쿠부워노 1세]](푸그르 공Pangeran Puger)는 자신의 편에서 싸운 대가로 동인도 회사에 스마랑을 영구히 양도하였다. 이 시점부터 스마랑은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동인도 회사령]]에 편입된다. 이슬람 시대와 식민 시대에는 자바 중북부의 물류 요충지이자 주요 무역항으로서 개발되어 자바 중동부의 농산물이 스마랑을 거쳐 동인도 타 지역 및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를 감안하여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자바에 [[철도]]와 도로 등 근대적 물류 시설을 도입할 때 스마랑은 최우선 순위에 놓였다. 1867년 8월 10일 자바 최초로 개통된 철도 노선은 스마랑과 탕궁(Tanggung)을 잇는 25km의 노선이었다. 20세기 초에는 [[공업]]도시로도 개발됨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특히 [[노동조합]], [[노동운동]]이 발달하였으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주요 거점으로서 '적색 도시'(Kota Merah)로 불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이 자바를 점령하고 통치하던 1944년 2월, 일본군 장교 등이 이곳에 설치한 '위안소'로 네덜란드계 여성 35명을 강제 연행하여 감금하고 강간하거나 성매매를 시킨 사건이 있었다(스마랑 강간 사건 또는 스마랑 위안소 사건). 이 사건으로 전후인 1948년의 바타비아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일본군 장교 7명과 군속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역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를 추인하였다. 1994년의 네덜란드 정부 후속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 하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의 위안소에서 일하던 200–300명의 네덜란드계 여성 가운데 최소한 65명은 확실한 성매매 강요의 피해자였다고 한다. [[분류:인도네시아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