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akeyuki_so%2C_1931.jpg|width=400]] [목차] == 개요 == {{{#!html <ruby><rb>宗武志</rb><rp>(</rp><rt>そうたけゆき</rt><rp>)</rp></ruby>}}}(종무지) 1908년 2월 16일~1985년 4월 22일. (향년 77세) [[대한제국]]의 [[덕혜옹주]]의 전 남편이다. [[한국사]]의 마지막 [[부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덕혜옹주]]와 결혼할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없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부마로 꼽히지 않는다.[* 진짜 한국사의 마지막 부마는 [[박영효]]가 된다.] [[조선]]·대한제국 이씨 왕조 여성과 결혼한 비(非)한민족 남성으로는 [[의순공주]]와 결혼한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이후 두번째다. [[쓰시마]] 소 가문의 35대 당주이자 영문학자 겸 시인으로서[* 본인의 시집도 있고, [[쓰시마 섬]] 전래 구전 민요를 모은 저서도 있다.] 대학 [[교수]]를 지낸 엘리트 학자이기도 했다. == 생애 == === 결혼 이전 === [[쓰시마 섬|쓰시마]] 번주 소(宗) 씨 가문의 후손으로, [[백작]]이었다.[* 원칙상으로는 [[고쿠다카]] 기준으로는 [[자작]]이었으나 조선과의 외교 등으로 인해 메이지 정부가 1등급 높여주었던 것.] [[임진왜란]] 당시 쓰시마 도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소 요시토시]]가 바로 소 다케유키의 10대조다. 아버지는 소 요리유키(宗和志), 어머니는 구로다 레이코(黑田鏻子)이다. 요리유키는 처가인 구로다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어 '구로다 요리유키'로 성씨를 바꾸었고, 아들 다케유키도 본래 외가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다케유키(黑田武志)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나 소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놓이자, 다케유키는 구로다에서 소로 성씨를 바꾸어 친가인 소 가문을 계승했다.[* 이 점도 다케유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안 좋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소수나마 있다. [[일본]]에서야 성(姓)과 씨(氏)를 구분해 성과 달리 씨는 자기 편의대로 바꿀 수 있었고, 성씨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별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번 가지고 태어난 성씨는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는 것이 철칙인 사회였다. 그러다 보니 소 씨에서 구로다, 다시 소 씨로 성이 바뀐 다케유키에 대해 '제 성씨도 멋대로 갈아치우는 근본도 모르는 [[왜놈]]' 정도로 미운털이 하나 더 박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래도 다케유키 본인 입장에서는 조상이 쓰던 본래 성씨로 다시 돌아왔을 뿐이므로 이러한 비판은 다소 악의적인 것이다.] 친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데이메이 황후]]([[다이쇼 덴노]]의 아내이자 [[쇼와 덴노]]의 어머니)의 오빠인 쿠죠 미치자네(九条道實)가 다케유키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중학교까지는 쓰시마에서 졸업했고, 고등학교와 대학은 [[도쿄]]에서 다녔다. 황족과 [[화족]] 전용 관립 학교인 [[가쿠슈인]][* 패전 후로는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금수저|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들]]이 다닌다고. [[일본]]의 명문 [[사립학교]]들이 대개 그러하듯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갖추고 있으며, [[중고일관교|한 번 입학하면 별도의 수험 없이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고등과와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영어]] 작문과[* [[나가사키]] 현에서 주최한 중학생 영어 웅변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적도 있다.]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나름 엘리트 정도를 넘어 머리는 비상했던 모양.-- [[문학]]을 좋아했는지, 소 씨 당주와 [[백작]] 작위를 계승한 1923년 10월에 자신의 친구들과 문예 동인지를 만들고 그 이듬해에 시와 동시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가쿠슈인]] 고등과 시절에는 평소 존경하던 [[하이쿠]] 시인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문하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었고, 1927년에 하쿠슈가 발행하던 시가 종합 월간지 <근대풍경> 6월호에 다케유키의 자작시 <송림의 밤>이 실리기도 했다. 나중에 다케유키가 쓰시마 섬 구전 민요를 모아 펴냈을 때도 기타하라 하쿠슈가 추천사를 써주었다고 한다.[[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6958|#]]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현재는 2020년까지 내부수리중) 입구에는 소 다케유키가 그린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외로운 섬의 그림이 있었는데, 어떤 승려는 이 그림을 보고 소 다케유키라는 인간을 "'''자기 세계가 강한 고독하고 외골수적인 인간'''"이었을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31|#]] === [[덕혜옹주]]와의 정략 결혼 === [[파일:FB_IMG_1474737167636.jpg|width=450]] 1931년 [[덕혜옹주]]와 사실상 [[정략결혼]] 성격이 짙은 결혼을 했다. [[일본인]]과의 사실상 강제 혼인이기 때문인지, 결혼사진을 보면 전날 울다 잠들어 덕혜옹주의 눈이 부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덕혜옹주의 올케 [[이방자]] 여사가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이 결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1300329205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13&officeId=00032&pageNo=5&printNo=11962&publishType=00020|#]] 때문인지 [[일제강점기]] 당시엔 세간에 소 다케유키가 [[애꾸눈]]에 못생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사실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미남]]에 키도 훤칠하고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다만 [[사시(질병)|사시]]였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도 여기서 비롯된 듯 하다.] 이런 소문이 난 이유는 민족 감정 + [[귀천상혼]]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 다케유키가 귀족 중에서도 급이 떨어지는 [[백작]] 신분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소 가문은 [[다이묘]]로써 2만 석에도 미치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원칙적으로는 더 낮은 [[자작(작위)|자작]]에 봉해져야 했지만, 대대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해왔다는 점이 감안되어 [[백작]]으로 ~~턱걸이~~ 봉해졌다고 한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는 결혼이 확정되고 나서, 결혼식 전에 사실상 얼굴 확인이나 다름없는 맞선을 보았다. === 아내와의 관계 === 하지만 과거 알려져왔던 것과 달리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소 다케유키는 오히려 아내를 신경 써주고 걱정하는 자상한 남편상에 가까웠다고 한다. [[덕혜옹주|아내]]의 상태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한 것은 진심이었는지 [[덕혜옹주|아내]]를 향한 장문의 시를 남긴 적도 있었다.[[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4807707&memberNo=29949587&vType=VERTICAL|#]] 그러나 [[1932년]] [[8월 14일]]에 딸 마사에를 [[출산]]한 이후 [[덕혜옹주]]의 [[정신병]] 증세는 더 심해졌고, 다케유키와 주변인들은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정신병에 대한 이해 부족과 신분상의 이유 등으로 한동안 [[덕혜옹주]]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그저 안마사를 집에 불러 마사지만 받게 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병원을 가도 딱히 해결책이 없었고, "조선에서 온 옹주가 미쳤다"는 사회적 낙인만 찍혔을 확률도 있었겠지만. 여담으로 이에 대해 [[덕혜옹주]]를 주제로 얘기한 [[역사저널 그날]] 116화에서 출연진들은 "당시 [[의학]] 기술 및 시대 상황을 고려해볼 때, 소 다케유키는 할 만큼 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 이혼 === 일제 패망 이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 와중에 1947년 [[신적강하]][*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나머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모두 평민 신분으로 전락한 것.]를 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결혼 20여년이 지난 1955년 [[이혼]]했다.[* 시기는 사실 여러 설이 있는데, [[이방자]] 여사가 회고록에 1955년으로 기록했으므로 이 해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강제 이혼은 아니었고, [[덕혜옹주]]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부부와 합의하여 이혼했다. (일본 위키백과에는 덕혜 옹주의 친가요청으로 인해 이혼했다고 나온다) 소 다케유키는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카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치바현]]으로 이주했다. 장남 타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 딸 정혜의 행방 불명 ===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은 정혜(正惠)로 바를 정(正)과 [[덕혜옹주]]의 은혜 혜(惠)로 지었으며 일본식 발음으로는 마사에였다. 허나 덕혜 옹주가 병이 있다 보니 딸의 [[육아]]는 다케유키 본인이 많이 한 듯 하다. 다케유키가 정혜를 데리고 조선 왕실 행사에 참여하고, 직접 정혜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마사에는 [[가쿠슈인|여자 가쿠슈인]]을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출신인 스즈키 노보루(鈴木昇)와 결혼했다. 결혼 후로도 마사에는 남편의 성씨를 따르지 않았고, 대신 노보루가 처가의 성씨를 따라 '스즈키'에서 '소'로 성을 바꾸었다. 이는 장인 다케유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덕혜옹주]]와 다케유키가 이혼하고 약 1년 후인 1956년, 갓 결혼한 24살의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갑작스레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유서에 의하면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불명.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신뢰할 만한 근거는 없다. 분명한 건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케유키는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끝내 장녀 마사에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케유키의 사후 마사에의 이해 관계인에 의하여 일본 민법 제30조 조항에 따라 마사에의 실종 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그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종 선고가 성립되어[* 아마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이혼 후 재혼하여 낳은 마사에의 이복 동생이 실종 선고를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사망한 시점에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수십년간 실종 상태에 있었던 이복 누나 / 언니를 위해 호적을 한도 끝도 없이 그대로 두기에는 상속 문제도 걸려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만한 법적 해결을 위하여 결단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것이다.] 사망 처리되었다. 마사에(정혜)의 실종 이후 수색대의 노력에도 마사에의 생사를 알 수 없자 부재자의 상태로 노보루와의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 남편이 된 노보루가 2007년 4월 발표한 시집에 의하면, 실종 후 50년 가까이 경과한 시점에서야 사체가 발견되었고, 유품인 수첩으로 신원을 특정하여 마사에의 사망이 실체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 이후 === 1972년에 [[덕혜옹주]]를 만나러 [[한국]]에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했다. '한국사 전(傳)'에서 밝히기로는 당시 [[창덕궁]]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의 비서실장이었던 이공재 씨 앞에 소 다케유키가 찾아와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는데, 이공재 씨는 "'''만나봤댔자 할 얘기도 없고, 꼭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옛날 생각이 나서 오히려 병세가 더 악화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면회를 일절 허용치 않으니 돌아가시오.'''"고 냉정하게 내쳐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신병주]] 교수에 따르면 '''[[덕혜옹주]] 자신이''' 다케유키를 만나기를 거부했다는 얘기도 있다(출처 : 조선평전).] 그 뒤 [[치바현]]에 머무르면서 레이타쿠(麗澤)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 [[쓰시마 섬]]에 있는 역대 쓰시마 다이묘 선친들의 묘지인 반쇼인(滿松院)에 함께 안장되었다.[* 이 묘원 반쇼인은 [[이즈하라]]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힘든 거목이 가득하고 조선 국왕이 하사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 등, 대마도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볼거리라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12?1385743452.jpg]] 말년의 소 다케유키. == 평가 == 소 다케유키의 개인적인 인물됨은 그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어 사실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얼마 없는 사료들을 조합해보면, 적어도 개인적인 인물됨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결혼 전부터 있던 [[덕혜옹주]]의 [[정신병]] 증세가 [[출산]] 후 더 심해졌음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정황은 있다. 상술했듯 [[덕혜옹주]]를 동정했는지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며>라는 장문의 시를 쓰기도 했다. 허나 조선 황족과의 결혼으로 상당한 [[지참금]]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누리다 [[신적강하]] 이후 재산을 몰수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덕혜 옹주의 정신병원 입원 및 이혼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해도 좋은 남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 부분도 위의 정신병 관련 내용과 더불어 참작해볼 여지는 있다. [[신적강하]] 이후에는 집안 하인의 숫자가 수십 명에서 단 1명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사실상 정신병자를 수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병자와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진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당장 [[전두엽 절제술]] 같은 막장스런 방법이 획기적인 치료법이랍시고 떠들어지던 시대에, 완치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아내가 미쳤다고 가정한다면 수발 들다 본인조차 피폐해져 이혼을 고려할 충분한 현실적 사유가 될 판국에, 정신병에 대한 병명조차 생소하던 당시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아내]]를 위해서 그래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꾀한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이다.][* 정신병이 아니라도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도 있고, 병든 자식을 돌보다가 가족 자체가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신적강하]] 이후 바로 이혼한 것도 아니었고 1955년에 가서야 [[덕혜옹주]]와 합의 이혼을 했다[* [[덕혜옹주]]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했기에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여사가 후견인으로서 이혼 합의를 해주었다.]. 물론 이혼하고 얼마 안 가서 재혼한 모습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사실상 10년 가까이 별거 상태였던데다가[* 이 별거도 사이가 나빠서 한 게 아니라 당시의 정신병의 치료 방식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혼 당시 자식이라고는 딸 마사에 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48세였던 소 다케유키가 재혼을 서두른 것은 쓰시마 종가의 당주로서 대를 잇기 위함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강한 [[동북아시아]]에서는 막 부인과 이혼하거나 사별한 남성에게 재혼을 강요하는 일이 아직도 많다. 이런 낡은 관념이 여전히 지배적이던 1950년대인데다, 귀족 집안의 자제이기까지 한 소 다케유키는 그 압박을 더 심하게 받았을 터였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상대적으로 덜한 [[서유럽]] 같으면 전근대부터 [[귀천상혼]]으로 당주직 계승권이 먼 방계로 넘어가는 일도 잦았던 만큼 먼 친척을 후계자로 삼으면 될 일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소 다케유키의 조국인 일본은 21세기 기준으로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남북한과 중화권보다도 더욱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다.] 한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도 남기지 않았으며, 평소에도 입에 일절 올리지 않아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에 대해 뭐라 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증언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만년의 수필에서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였다'''"고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당시 소 다케유키에게는 덕혜 옹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꽤나 공허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내를 안타까워해서 시를 쓰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란걸 알면서도 덕혜 옹주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한번 찾아왔던 것도 생각해보면, 소 다케유키도 마음 한켠에는 덕혜옹주를 안고 사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연을 맺었던 부부였으니까. 만약 정혜가 요절하지 않고 더 나아가 결혼하여 자식을 얻었다면 소 다케유키는 정혜에게 쓰시마 소 가문 당주직을 물려줬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정혜는 여성인 만큼, 남자에게 가문을 계승시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딸 정혜가 아니라 자신의 사위로 들어왔던 스즈키 노보루에게 당주직을 물려줬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 노보루는 이미 장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성씨를 소씨로 바꾼 바 있었다.] 젊은 나이에 얻은 첫 자식에게 당주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을 것이며 상술한 것처럼 소 다케유키 본인이 덕혜옹주를 사랑한 것도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정혜가 죽고 부모인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도 이혼하면서 그러한 사랑도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 대중 매체에서 == 한국 대중 매체물에서는 과거 [[안습]]하게도 부정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6년 MBC에서 8.15 광복 특집극으로 방영했던 <덕혜-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가 대표적인 예시. [[파일:external/53e0a740b32f6b33e72f58f0259a5d688474538e4271bb7d9b76c1626d57ff5d.jpg|width=75%]] 2016년에 나온 영화 [[덕혜옹주(영화)]]에서는 배우 [[김재욱(배우)|김재욱]]이 분했다. 이전보단 묘사가 나아져서 결혼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는 덕혜를 위해 조선식으로 식단을 준비하라고 하고, 옆에 앉아 다정히 말을 건네주는 모습도 나온다. 이후 작중 늙어 재혼한 뒤 자신의 집으로 덕혜를 찾아온 김장한[* 영화는 각색이고, 덕혜옹주를 찾으러 뛰어다닌 실제 인물은 김장한의 형 [[김을한]] 기자였다.]과 몸싸움을 벌이지만, 결국 서로의 처지를 알게 되고 "나는 덕혜를 버리지 않았다. 내 딸 정혜는 내가 덕혜와 이혼한 뒤에 자살했다"며 눈물을 흘린다. [[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일본의 백작]][[분류:1908년 출생]][[분류:1985년 사망]][[분류:쓰시마시(나가사키현) 출신 인물]][[분류:일본의 시인/ㅅ]][[분류:일본 남성 작가]][[분류: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