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중국의 관광지]][[분류:만리장성]] [include(틀:중국의 세계유산)] ||||<:><table align=center> {{{+2 '''山海關'''}}} || ||||<:>[[파일:external/visitchina.or.kr/2011101416181858.jpg|width=100%]] |||| ||<:><#A6A6A6> 분류 || 고건축급역사기념건축물(古建築及歷史紀念建築物) || ||<:><#A6A6A6> 시대 || [[명나라]] || ||<:><#A6A6A6> 일련번호 || 1—102 || ||<:><#A6A6A6> 소재 || [[허베이 성]] [[친황다오]] 산하이관 구 || ||<:><#A6A6A6> 등재 || [[1961년]] || ||<:><#A6A6A6>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A급[* 2015 년 10월 9일 [[중국5A급여유경구|5A급]]에서 탈락하였다.] || ||<-2>[include(틀:지도, 장소=山海关古城,높이=250px, 너비=100%)]|| {{{+2 산하이관(山海關)}}} > '''천하제일관''' [목차] == 위치 == [[중국]] [[만리장성]]의 [[관문]] 중 하나로 만리장성의 관문 중 최동단이자 시작점에 위치한다.[* 종점인 최서단은 [[간쑤성]]의 [[가욕관]].] [[허베이 성]] 친황다오시(秦皇島市)의 동쪽 산하이관 구(山海關區)에 있다. 수도 [[베이징]]으로부터는 동쪽으로 300km 거리이고, 베이징과 [[하얼빈]]을 잇는 [[징하고속공로|징하고속공로(京哈高速公路)]]와 연결되어 있으며, [[발해#s-2|보하이만]] 북쪽의 옌산(燕山) 남쪽에 위치한다.[[https://goo.gl/maps/KSkE7EDu3CK2|구글 지도 참조]] == 형태 == || [[파일:external/pic.pimg.tw/e03753dc83f356ba6fa57ff0dc930e9d.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mjjq.com/1150107008_1843515406.jpg|width=100%]] || ||<-2><:> [[파일:external/story.ugyo.net/diary_img2.jpg|width=100%]] || 산해관은 주변 둘레가 4km에 이르는 사각 요새다. 벽의 높이는 14m에 이르고 두께가 7m이다. 동쪽과 남쪽 북쪽은 깊고 넓은 해자(垓子)가 파져 있고, 도개교(跳開橋)가 설치되어 있다. 산해관의 중앙에는 종탑이 서 있다. 산해관 4면에는 모두 문이 있는데, 동, 서, 남, 북쪽으로 각기 진동문(鎭東門), 영은문(迎恩門), 망양문(望洋門), 위원문(威遠門)이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황폐화되어 진동문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중 산해관의 외부로 접한 진동문은 그 위치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진동문에 걸린 현판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산해관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파일:attachment/Shanhaiguan-002.jpg]] 산해관 본성 동쪽 4Km에 있는 [[만리장성]]이 [[발해만]](渤海灣)과 접하는 부분은 [[https://goo.gl/maps/kqEWDbiRe6F2|노룡두(老龍頭)]]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노룡두 자체는 북제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바다 위에 뻗은 성루가 인상적이라 그런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비슷한 형태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만리장성을 모티브삼은 [[판다리아]]의 장성인 용의 척추의 남쪽 끝부분. == 역사 == 산해관은 일찍이 [[수나라]], [[당나라]] 시절에는 임유관(臨渝關), [[요나라]]와 [[금나라]] 때는 천민현(遷民縣)·천민진(遷民鎭) 등으로 불렸다. 수나라 때는 현재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다. 임유관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1세기 초 요나라 때이다. [[조선상고사]]에는 [[문제(수)|수문제]] 시절,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이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여 수나라를 대파했다는 전승이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이름이 산해관으로 붙게 된 것은 1381년 [[명나라]]의 [[명장]] [[서달]](徐達)이 관문을 개축하고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다 하여 산해관이라 칭했을 때부터다. 이후 산해관을 관리하는 산해위를 두었으며, [[척계광]](戚繼光)이 요새화를 시작하고 산해관의 동쪽, 남쪽 그리고 북쪽에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면서 산해관을 군사도시로 만들었다. 그래서 산해관은 [[중국]]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의 하나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만리장성]]에서 가장 잘 보전된 관문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파일:external/1832.img.pp.sohu.com.cn/12a68c12dc8g215.jpg]]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 산해관은 더욱 중요해졌는데 [[후금]]을 세운 [[만주족]]이 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산해관을 공략해서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산해관의 특성상 한쪽 면은 바다라 제대로 된 해군이 없으면 돌파가 불가능하며,[* 후금이 [[조선 수군]]을 몹시 탐낸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나머지 한 쪽은 산악 지대에 만리장성과 함께 [[거용관]] 등 역시 난공불락의 주요 관문이 있어서 우회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르도스 초원 쪽으로 우회하는 루트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보급로가 길어져서 북경 공략은 어렵고 약탈이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숭덕제|홍타이지]]는 이 방법을 택해 우회하여 북경 인근을 약탈하는 전법으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물론 전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지는 못했지만, 이것이 명 조정 내에서 [[원숭환]]을 불신하는 원인이 되어 그가 처형당하는 빌미가 된다.] 그래서 [[천명제|누르하치]]는 몇번이나 산해관을 공격했지만 [[포르투갈]]에서 도입한 [[홍이포]]로 무장한 [[원숭환]]에게 번번히 참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파일:attachment/Shanhaiguan-003.jpg]] 결국, [[원숭환]]이 [[모문룡]] 처형 문제로 처형된 후, 산해관 장령(將領)에 있던 [[오삼계]]는 그의 애첩 진원원이 [[이자성]] 측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게다가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까지 듣자 격노한 그는 청의 섭정인 [[아이신기오로 도르곤|도르곤]]과 접촉했다.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스스로 열어주면서 청군은 무혈입관, 산해관 전투에서 청군과 오삼계군은 이자성에 맞서 함께 싸웠다. 이 싸움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이자성의 정치력 약화를 가속화했고 결국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청나라]] 시절에는 심양과 북경 사이에 위치한 산해관은 신구 수도를 잇는 요충지 중의 요충지가 되었다. [[아편전쟁]] 때도 산해관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며,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전투가 벌어졌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30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만든 이후, [[일본군]]은 지속적으로 하북 방면으로 공략해 [[1933년]] [[1월 30일]]에 산해관을 함락했다. 산해관의 함락으로 북경 공략의 길이 열린 셈이었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인 1961년,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 중 하나인 [[가욕관]](嘉峪關)과 [[거용관]](居庸關)과 함께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