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include(틀:공산주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2px-Fotothek_df_roe-neg_0002793_004_Portrait_Wilhelm_Piecks_im_Publikum_der_Bachfeier.jpg|width=200&align=right]] [목차] [clearfix] == 개요 == Friedrich Wilhelm Reinhold Pieck (1876년 1월 3일 ~ 1960년 9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인 동독의 초대 [[대통령]], [[서기장]].[* 피크는 1949년부터 1960년 사망할 때까지 독일민주공화국의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Pieck von 1949 bis zu seinem Tode 1960 einziger Präsident der DDR.) 출처 : 독일어 위키백과.][* 국민일보 특별 취재팀. (2014). 독일 리포트. [[https://books.google.de/books?id=OlR1AwAAQBAJ&pg=PT390&lpg=PT390&dq=%EB%B9%8C%ED%97%AC%EB%A6%84+%ED%94%BC%ED%81%AC&source=bl&ots=X-y3mzFjdM&sig=Ue3GMRESMuB_iFUY4LtBnBEn5sc&hl=ko&sa=X&ved=0ahUKEwiItObp54nWAhXJL1AKHTDfCvQQ6AEITDAK#v=onepage&q=%EB%B9%8C%ED%97%AC%EB%A6%84%20%ED%94%BC%ED%81%AC&f=false|#]]](1949년 10월 11일 - 1960년 9월 7일) [clearfix] == 생애 == 구벤[* 1945년 이후로는 오데르 강 서쪽은 독일령 구벤, 동쪽은 폴란드령 구빈으로 나누어졌다. 참고로 피크 본인의 고향은 정확하게는 폴란드령 구빈이다.]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목수 생활을 하다가 1894년 목세공인[[노동조합]]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 [[독일 사회민주당]]에도 입당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사회민주당 당원들은 전쟁을 지지하였으나, 피크는 전쟁에 반대하여 군사교도소에 투옥되었다. 석방 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1918년 [[베를린]]으로 복귀하여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국제 공산주의 원조 기구의 창립 단원이 되어 전문 위원회에 근무하였고, 1925년에는 독일 공산주의 원조 기구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당]]이 집권하자 피크는 일단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1935년 [[소련]]으로 간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코민테른 서기장, 1943년 '자유 독일을 위한 국민위원회'(NKFD) 창립인 중 하나가 되었고, 소련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자 함께 귀국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동독 지역 지부와 독일 공산당을 합동시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을 출범시키고 오토 그로테볼과 함께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서기장이 된다. 1949년 동부 독일에 [[독일민주공화국]]이 세워지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발터 울브리히트]]가 서기장 직위를 이어받았다. 사망하는 1960년 9월 7일까지 대통령직에 있었다. 그는 동독의 유일한 '대통령'이었는데, 그의 후임인 [[발터 울브리히트]]는 국가원수의 직위명으로 국가평의회 의장(Vorsitzender des Staatsrats) 직위를 썼다. == 기타 == * 그의 고향인 구벤은 1961년부터 1990년까지 "빌헬름 피크의 도시 구벤(Wilhelm-Pieck-Stadt Guben)"이라는 이름이었다. * 한때 [[함흥시]]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빌헬름 피크 거리(Wilhelm-Pieck-Boulevard)가 있었다. 6.25로 떡실신한 북한의 도시들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함흥이 소련과 동독의 지원을 얻어 재건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류:독일민주공화국 서기장]][[분류:유럽의 독재자]][[분류:1876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괴뢰국 수장]][[분류:독일의 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