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파일:Wilhelm Mohnke.jpg]] 연대지도자(대령) 시절의 몽케. 빌헬름 몽케(Wilhelm Mohnke) (1911년 3월 15일 ~ 2001년 8월 6일) [목차]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당시 [[무장친위대]] [[장군]]들 중 하나. 빌헬름 몽케는 무장친위대의 가장 젊은 장성들 중 하나였다. [[SS]]의 규모가 작았던 극초기부터 SS에 몸담았던 초기 인물 중 하나이다. == 입당 및 대전기 == 고등학교를 졸업한 1931년 9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다음 친위대에 입대했다. 1933년 3월 17일에 [[요제프 디트리히]]가 총통 [[히틀러]]를 경호하는 경호대를 편성하자 경호대원으로 선발되면서 친위대 소위로서 임관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이 벌어지자 LSSAH연대의 제 5중대장으로 종군하여 제 1,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1940년의 [[프랑스 침공]]시에는 대대적으로 다짐했는데, 이때 휘하 부대가 영국군 포로 80명을 학살하면서 학살 논란의 첫 단추를 꿰게 된다. 1941년의 발칸반도 전쟁에서는 4월 6일에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다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부상을 입었으며,1943년에는 친위대 중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제 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의 제 26 장갑척탄병 연대장이 되었다. 1944년 6월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공로[* 이시기 휘하 부대가 캐나다군 포로 35명을 학살해 물의를 빚었다.]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LSSAH 기갑사단장으로 재직시이던 12월 16일에 [[아르덴 대공세]]에서는 예하 부대가 [[요아힘 파이퍼|말메디 학살에 연루]]되기도 했다. 이후 친위대 소장으로 진급했으나 1945년 2월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부상을 입으면서 일선에서 물러났고, 베를린 총통관저로 전출되었다. 4월 22일 [[베를린 공방전]]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로부터 총통 관저를 포함한 티어가르텐의 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된 몬케는 9개 대대로 몬케 사단을 편성하여 히틀러의 직접 지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고,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날 [[베를린]]을 탈출하려던 몽케는 소련군에게 붙잡혀 [[NKVD]]로 넘겨져 강도높은 심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 전후 == 이후로도 히틀러 관련자라는 이유로 모스크바 인근 [[굴라그]]로 압송되어 6년간 [[KGB]]의 강도높은 심문을 받았으며, [[1955년]]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총리의 소련 방문으로 [[서독]]과 [[소련]]간의 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같은해 10월 10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서독으로 송환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함부르크]]로 돌아가 화물차 판매 사업을 시작하였고, 몇차례 포로 학살의 책임자로 소환조사를 받았으나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포로 학살의 책임자지만 그 정도는 전시에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이라 판단되어 따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2001년 8월 6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화물차 판매 대리점을 운영하며 딜러로 살았다. [[슈츠슈타펠]]의 장성급 지휘관중에서는 [[마지막 생존자|마지막까지 살아남았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과 나치당의 득세부터 시작해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의 분단, 냉전과 [[독일 재통일]]은 물론 통일후의 혼란으로 인한 기민련의 몰락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집권, '''[[유럽연합]]'''까지 지켜보았다. == 매체에서 == [[몰락(영화)]]에서 [[국민돌격대|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것]]에 항의하는 훌륨한 군인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제 몽케는 전후에도 친위대 전우회를 다니며 열심히 네오나치 활동을 한 열성나치다. [[분류:1911년 출생]] [[분류:2001년 사망]]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슈츠슈타펠/인물]] [[분류:나치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