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진주시 출신 인물]][[분류:1887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 성명 ||박재룡(朴在龍) || || 생몰 ||[[1887년]] [[12월 5일]] ~ [[1955년]] [[3월 19일]] || ||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 내동면 삼계리 || || 사망지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재룡은 1887년 12월 5일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유림 중심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4월 2일 함양군 지곡면 정치리에서 한문 교사인 [[권도용]]을 만나 항일 문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권도용은 이에 응해 6월 20일까지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 ‘조선독립충고문(朝鮮獨立忠告文)’, ‘조선독립가’, ‘조선독립경포서(朝鮮獨立警布書)’, ‘조선독립책선문(朝鮮獨立責善文)’ 등의 문서를 만들어 박재룡에게 전달했다. 박재룡은 이 문서들을 각각 230부씩 인쇄하는 한편 권도용·강대익(姜大翼)·김형권(金亨權) 등과 함께 경남 유림대회를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결정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계획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9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상고하였으나 11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진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5년 3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재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