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강원도지사)] [include(틀:통일국민당 총재)]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14121618293761.jpg|width=150]] 朴永祿 [[1922년]] [[3월 25일]] ~ [[2019년]] [[5월 22일]] (향년 97세)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1922년 [[강원도]] [[고성군(강원도)|고성군]]에서 태어났다.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가까웠다. 1960년 초대 민선 [[강원도지사]]에 선출되어 일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63년)|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원주시]]-원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강원도 선거구의 유일한 야당 당선자가 되었다. 1970년 [[독일]] [[베를린]]을 방문하여서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박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재팬'''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며 그가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인터넷 등지에선 이 일화가 영웅담처럼 소개되지만 공공재산을 훼손하면 안된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용호(1920)|김용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0월 유신]] 선포 이후 치러진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강원도 원주시-원성군-[[횡성군]]-[[홍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용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민당 정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74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자 진행된 당직 개편에서 정치훈련원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부터 [[정일형]] 등 김대중과 가까운 사람들과는 당내에서 화요회라는 계보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1978년 신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역시 민주공화당 김용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출마하려다가 포기하고 김영삼을 지지하였고, 이듬해에 이루어진 당직 개편에서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1980년]] [[5.17 내란]] 이후 모처에 끌려가서 폭행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풀렸지만 이듬해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이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3연속 출마([[평화민주당]], [[민주당(1955년)|민주당]], 무당파국민연합)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신군부에 의한 재산 몰수 등 여러 이유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각주] [[분류:제6대 국회의원]][[분류:제7대 국회의원]][[분류:제9대 국회의원]][[분류:제10대 국회의원]][[분류:민주당(1963년) 국회의원]][[분류:민중당(1965년) 국회의원]][[분류:신민당(1967년) 국회의원]][[분류:1922년 출생]][[분류:고성군(강원) 출신 인물]][[분류:2019년 사망]][[분류:통일국민당 총재]][[분류:강원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