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뉴욕 주 출신 인물]] [[분류:1800년 출생]] [[분류:1874년 사망]] [[분류:미국의 변호사]] [[분류:미국 부통령]][[분류:미국 대통령]] [[분류:영국계 미국인]] [[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 [include(틀:역대 미국 대통령)] ---- [include(틀:역대 미합중국 부통령)] ---- ||<-2><tablebordercolor=#0d164a><tablewidth=450><tablealign=right><tablebgcolor=#fff,#191919><tablecolor=#000000,#e5e5e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미국 부통령|{{{#0d1635 미합중국 제12대 부통령}}}]]'''}}}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 #0D164A 20%, #0D164A 80%, #0D1635)" '''[[미국 대통령|{{{#ffc224 미합중국 제13대 대통령}}}]][br]{{{#ffc224 {{{+1 밀러드 필모어}}}[br]Millard Fillmore}}}'''}}}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illard_Fillmore.jpg|width=100%]]}}} || ||<|2><width=100><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800년]] [[1월 7일]] || ||[[미국]] [[뉴욕|뉴욕 주]] 서머힐 || ||<|2> '''사망''' ||[[1874년]] [[3월 8일]] (향년 74세) || ||[[미국]] [[뉴욕 주]] 버펄로 || ||<|4>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12대 [[미국 부통령|부통령]] || ||[[1849년]] [[3월 4일]] ~ [[1850년]] [[7월 9일]] || ||<bgcolor=#f5f5f5,#2d2f34>제13대 [[미국 대통령|대통령]] || ||[[1850년]] [[7월 9일]] ~ [[1853년]] [[3월 4일]] || ||<bgcolor=#0d164a> '''{{{#ffc224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9px-Millard_Fillmore_Signature-2.svg.png|width=150&bgcolor=#fff]] || ||<-2><bgcolor=#fff,#1f2023><color=#373a3c,#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width=100> '''부모''' ||아버지 [[https://en.wikipedia.org/wiki/Nathaniel_Fillmore|Nathaniel Fillmore Jr.]][br]어머니 포비 밀러드 || || '''배우자''' ||아비게일 파워스 (사별)[br]캐롤리나 카마이클 매킨토시 (재혼) || || '''자녀''' ||아들 [[https://en.wikipedia.org/wiki/Millard_Powers_Fillmore|밀러드 파워스 필모어]][br]딸 [[https://en.wikipedia.org/wiki/Mary_Abigail_Fillmore|메리 아비게일 필모어]] || || '''학력''' ||해당사항 없음 || || '''종교''' ||[[개신교]] {{{-2 ([[유니테리언]])}}} || || '''소속 정당''' ||[[휘그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0AB76; font-size: .9em" {{{#ffffff '''휘그당'''}}}}}}]] → [[미국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08080; font-size: .9em" {{{#ffffff '''미국당'''}}}}}}]] ||}}}}}}}}} || ||<tablealign=left><table width=430><tablebordercolor=#0d164a>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llard_Fillmore_by_George_PA_Healy,_1857.jpg|width=100%]]}}} || ||<bgcolor=#0d164a> {{{#ffc224 '''백악관 공식 초상화'''}}} || [목차] [clearfix] == 개요 ==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전임자 [[재커리 테일러]]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1800년생으로 초대 [[조지 워싱턴]] 이래로 이어진 [[18세기]] 태생 계보의 마지막 대통령이다. 후임자 [[프랭클린 피어스]]부터 19세기 출생의 계보가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은 [[제임스 뷰캐넌]]이 마지막 18세기 태생으로서 대통령을 지낸 이후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까지 쭉 19세기 출생자들이 대통령이 된다 == 생애 == [[뉴욕]] 주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옷감 제작 기술을 배워 재단 견습을 했다. 고졸 출신으로 [[1819년]]부터 판사 월터 우드의 밑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결혼 후에는 그에게서 떠나 버팔로 시에서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뉴욕 주 [[민병대]] 여단장으로 복무하였다. [[1828년]] 주의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그 후 [[하원의원]]으로 6년간 재직하다가 [[1844년]] 뉴욕 주지사에 도전했지만 패하였다. 대신 회계감사관이 되어 뉴욕의 금융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고 1848년 [[미국 부통령|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를 내세우면 인구가 많은 [[뉴욕]] 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통령이 되었는데 취임한지 1년여 만에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한다. 그리하여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했는데 [[1850년]]의 타협안과 도망 노예법이 그것이었다. 그는 [[재커리 테일러|테일러]]에 비교해서 [[노예]]제에 관대했다기 보다는 전형적인 도그페이스 북부 정치인으로써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악하기는 하지만 연방정부가 규제할 사항이 아니라는 시점을 견지했다. 그는 부통령 시절 1850년 대타협에 대한 토론을 상원의장으로써 주재했고, 대통령인 테일러에게 만약 표가 50 대 50으로 갈린다면 타협에 찬성할 것이라 통보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되자 1850년 대타협에 서명한다. 그렇지만 이 법은 문제가 있었는데, 도망 노예법 같은 경우 남부의 노예 소유주가 맘대로 남의 주에 들어와 노예를 다시 잡아갈 수 있게끔 한 법이었고 북부는 이에 대항해 이러한 노예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는 법을 만드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이로인해 북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재선을 위한 후보 지명에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그의 외교 정책은 기존과 달리 [[태평양]], 특히 [[아시아]]에 치중되어 있었다. [[매튜 페리(군인)|매슈 페리]] 제독을 [[에도 막부|일본]]에 파견하여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게 대표적이다(다만 일본과의 조약은 후임자인 [[프랭클린 피어스|피어스]] 때 체결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하와이 왕국]]에 관심을 보이자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막아버렸다. [[미국 국회의사당]](캐피톨)을 지금의 모습에 가깝게 증축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돔이 바로 그의 시대에 설계되었고, 이후 십수년의 세월을 걸쳐 완성되었다. 백악관을 떠난지 3년 뒤인 [[1856년]] [[휘그당#s-2]] 내 개혁파들이 [[공화당(미국)|공화당]]으로 떠나버리고 [[미국당]]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표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선거에서도 패한 휘그당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그는 마지막 휘그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 인물됨과 일화 == [[장로회]]인 아버지와 달리 그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언]]이었다고 한다. [[뉴욕주립대 버팔로|버팔로 대학]]을 창립하는데 공헌한 인물이기도 하다. [[1853년]] 첫 아내이자 대통령 시절 [[영부인]] 애비게일이 죽은 후 [[1858년]]에 부유한 과부와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 얻은 집이 꽤나 넓어서 한동안 그 지역 사교계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첫 아내 애비게일은 자신을 가르쳤던 [[교사]]였다고 한다. 사제결혼을 이룬 케이스. 실제로 애비게일이 필모어보다 2살 많다.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 계의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인 셈? [[남북전쟁]] 중에는 링컨을 지지했는데 이른바 '연방대륙군(Union Continentals)'를 조직하여 신병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자금운동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입장을 바꾸어 [[공화당(미국)|공화당]]과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을 비판했고, [[에이브러햄 링컨|링컨]] 재선 때에는 그 상대 후보인 조지 매클레런을 지지했다. [[에이브러햄 링컨|링컨]] [[프랭클린 피어스|전후의]] [[제임스 뷰캐넌|대통령들]]이 그렇듯 전반적으로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해리 트루먼]]은 그를 평하기를, "그는 페리 제독을 서부로 보내 일본을 개항시키는 위대한 일을 했지만 [[남북전쟁]]을 막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사실 [[해리 트루먼|트루먼]]은 [[프랭클린 피어스|피어스]] 항목에서도 보듯이 남북전쟁 직전 혼란기의 대통령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거의 인지도가 없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개항으로 인해 인지도가 있다. 자국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안습한 대통령들 중 한 명. 퇴임 후인 1855년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대학 측에서 그 기념으로 [[라틴어]] [[명예 학위|명예 박사 학위]]를 주려고 하자, '''"저는 [[라틴어|제가 모르는 분야]]의 학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필모어는 가난한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만 간신히 마쳤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일자무식이면서도 명예 박사 학위받고 박사라고 자칭한 [[새뮤얼 케니언 도|독재자]][[니콜라에 차우셰스쿠|놈들]]보다 수 억 배는 더 낫다~~[* 반면에 [[앤드류 잭슨]]은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라틴어]] 명예 박사 학위가 주어지자, 이를 덥석 받고는 라틴어 몇 마디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것으로, 실제로는 "나는 학위를 받았으나 아는 문장이라고는 E pluribus unum(다수로 이루어진 하나, 미국의회의 표어이다), 이뿐이오."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