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남평 문씨]][[분류:합천군 출신 인물]][[분류:1861년 출생]][[분류:1926년 사망]][[분류:건국포장]] || 성명 ||<(> 문용(文鏞) || || 초명 ||<(> 문창석(文昌錫) || || 자 / 호 ||<(> 사헌(士憲) / 겸산(謙山) || || 본관 ||<(> [[남평 문씨]][* 판도판서공파-오동 문중 26세손] || || 생몰 ||<(> [[1861년]] [[8월 27일]] ~ [[1926년]] [[3월 15일]][* 음력 2월 2일] || || [[출생지]] ||<(> 경상도 삼가현 대평면[br](현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인근의 역평리·회양리와 함께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 || 추서 ||<(> 건국포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문용은 1861년 8월 27일 경상도 삼가현 대평면(현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서 문재화(文在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자식 없이 [[요절]]한 큰아버지 문재욱(文在郁)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후 [[인천 이씨]] 이규석(李奎錫)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1명을 두었다. 일찍이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c_A1833_1_0016487|허유]](許愈)와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 [[김창숙]]·[[곽종석]]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영남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405|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문용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을 겪던 중 1926년 3월 15일 별세하였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겸산문집(謙山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