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관련 인물(NPB)]] [[파일:external/hanshintigers.jp/24.jpg]] || 이름 || 히야마 신지로 (桧山進次郎)[* 이 이름은 귀화 전부터 [[통명]]으로 쓰던 이름이기도 하다.][* 귀화 전 한국명은 황진환(黄進煥).] || || 생년월일 || [[1969년]] [[7월 1일]] || || 국적 || [[일본]] || || 출신지 || [[교토부|교토 부]] [[교토시|교토 시]] [[우쿄구|우쿄 구]] ||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입단 1년차엔 [[내야수]]로 등록되어 있었으나, 초창기부터 선수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외야수]]를 맡았다. 주로 맡은 위치는 [[우익수]].] || || 투타 || [[우투좌타]] || || 학력 || 헤이안 고교 - [[토요대학]] || || 프로입단 || 1991년 드래프트 4위 ||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1992~2013) || [목차] == 개요 == [[한신 타이거스]] 소속의 前 야구선수. 등번호는 24번. 한국에선 재일 한국인 3세로 유명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일본]]으로 귀화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 무려 22년간 뛰며 [[외야수]], 전문 [[대타]]로 활약하였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한신 타이거스]]의 암흑기에 활약한 [[프랜차이즈 선수|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카네모토 토모아키]]와 함께 한신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타 시절엔 팀 선배 [[야기 히로시]][* 90년대 초반 한신의 주전 [[3루수]]를 맡았다. 이후 후배 선수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지만 전문 [[대타]]로 변신해 맹활약하며 2004년까지 한신에서 뛰었다.]의 뒤를 잇는 '''"대타의 신(代打の神様)'''으로 불리었으며, '''유구의 젊은 호랑이(悠久の若虎)''' 등의 애칭으로 불리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 프로 데뷔 이전 == [[교토부|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 고교를 거쳐 [[토요대학]]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 1987년 [[봉황대기]]에 재일동포 팀으로 출전한 바 있고, 대학 시절엔 '''통산 76시합 출장, 타율 .318[* 261타수 83안타], 13홈런 45타점'''을 기록하고 동도대학 리그 [[베스트나인]]에 3회 뽑혔다. 이후 1991년 드래프트 4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다. == 현역 시절 == 입단 후 3년간은 1, 2군을 오고가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으나, 1995년 주전 우익수였던 [[카메야마 츠토무]]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그 틈을 타 1군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고, 선배 [[야기 히로시]], [[세키카와 코이치]][* 한신에서 [[외야수]], [[포수]]로 뛰었으며, 1998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해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의 한국인 3총사와 함께 1999년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05년 새로 창단한 [[라쿠텐 이글스]]로 이적하여 3년간 뛴 후 은퇴했다.] 비어있는 [[우익수]]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며 1군 시합에 계속해서 출장했다. 이듬해인 1996년에는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만족함과 동시에 주로 5번타자 - [[좌익수]]로 출장해 22홈런을 쳤고, 그 다음 해인 1997년에는 4번타자 - [[우익수]]로 출장하며 개인 최다인 23홈런 82타점을 기록하며 [[신죠 츠요시]]와 함께 한신 타선의 중심타자로써 뛰었다. 그러나 20+ 홈런을 기록하는 장타력에도 불구하고 2할대 초중반의 타율에 100개가 넘는 삼진을 기록하는 등, 함께 중심타선에 배치되었던 [[신조 츠요시]]와 함께 [[공갈포|호쾌한 선풍기질]]을 즐기면서 당시 암흑기의 전성기를 누리던 한신의 안습한 득점력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1998년, 이해 시즌 우수신인상을 획득한 [[츠보이 토모치카]]에게 밀려 [[우익수]] 자리를 빼앗겼고, 이듬해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취임한 1999년엔 성적 부진으로 [[토니 타라스코]] 등에게 밀려 주전 자리를 빼앗기고 [[대타]] 요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2년간 절치부심하여 대타로 활약한 결과[* 근데 정작 이때도 타율은 2할대 초중반이었다(...)] 2001년에 [[토니 타라스코]]의 퇴단과 동시에 다시 주전 타자로 복귀했으며, 무리하게 [[장타]]를 노리지 않는 타격으로 개인 최초의 3할 타율을 달성함과 동시에 28경기 연속안타 기록도 달성하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후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2년에도 5번타자 - [[우익수]]로써 활약했으나 시즌 말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한신의 성적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시즌 종료 후엔 장타력으로 기대받던 우타자 유망주 [[하마나카 오사무]]의 대두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4번타자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FA]]로 한신에 오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껴 주전 자리 구상에 대해 프런트에 질문했으나 확답이 없자 [[FA]]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타 구단의 오퍼도 없었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간곡하게 잔류를 요청했기에 결국 한신에 잔류하게 된다. 잔류 이후 첫 해인 2003년에는 이해 '''맹호타선(猛虎打線)'''으로 일컬어지는 한신의 강타선의 중심축을 맡아 4번타자 - [[우익수]]로 활약하면서[* 다만 이해에는 [[1루수]]도 잠깐 맡았다.] 이해 한신의 18년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에 대공헌하였다. 또한 이해 시즌 4월 10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통산 1000시합 출장, 4월 18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에선 개인 첫 [[끝내기]] [[홈런]], 7월 2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사상 58명째, 기록으론 62번째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등 개인 기록도 연달아 세웠으며, [[일본시리즈]]에서도 비록 한신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혈투 끝에 패배했지만 히야마 본인은 5차전의 결승 [[적시타]], 6차전의 홈런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며 우수선수상을 획득하는 등 본인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후 2004년에도 개인 최다 기록인 143안타, 2루타 26개, 타율 .306, 84타점(홈런은 18홈런), 장타율 .481[* 정확히는 1994년 기록한 .500이 최고기록이지만 이해는 타석수가 고작 36타석이라 제외.]을 기록하며 활약했으나, 2005년에 개인 통산 1000안타, 150홈런을 기록했지만 기량의 하락이 보이면서 후반부에 타격력이 올랐긴 했지만 전년도보다 대폭 하락한 시즌 성적과 함께 주전에서 밀려났고, 이후로는 주로 [[대타]]로 출장하게 되었다. 이후 대타로 주로 출장하기 시작한 2006~2007년엔 1할대 타율의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2007년 이후 스윙을 짧게 바꾸는 등 전문 대타요원으로써 변신을 시도하였고, 2008년 (비록 규정타석 미만이었지만) 다시 타율 3할을 찍으면서 전문 대타요원 전환에 성공한다. 이해부터 한신 팬들에게 [[야기 히로시]]의 뒤를 잇는 '''"대타의 신(代打の神様)'''으로 정착하게 된다. [youtube(huRrBAxioxY)] 2007년 8월 21일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경기에서 대타 만루 홈런을 터뜨려 팀의 역전 승리에 공헌하는 장면. 이후로도 전문 대타로써 뛰며 팀을 지탱했고, 2010년 5월 18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전에서 구단 타이 기록인 대타 안타 108개를, 6월 4일 대 [[오릭스 버팔로즈]] 전에서 구단 신기록인 대타 안타 109개를 달성하였고, 이듬해인 2011년 5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선 구단 신기록의 대타 홈런 14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2011년 시즌 종료 후 본인의 공식 사이트에서 개최한 행사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2012년에는 부상의 영향으로 22타석 연속 무안타를 찍는 등 성적이 나빠졌다. 2013년엔 대타 타점 구단 신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대타 통산 100타점, 155안타(센트럴리그 통산 2위)를 달성했지만, 1할대 타율로 떨어지는 등 전년도보다 더 부진해졌다. 결국 노쇠화를 더 이상 견딜수 없었는지 2013년 9월 7일,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10월 5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은퇴 경기를 가졌고,[* 다만 이날 시합에선 3타수 무안타로 그치며 8회에 교최되었다.] 시합 종료 후 은퇴 세레머니에서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2차례의 리그 우승을 손에 넣었지만, 일본제일([[일본시리즈]] 우승)은 아직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이 잊어버린 것(일본제일)을 언젠가 반드시 되찾기 위해 돌아오겠습니다. 그 땐 다시, 팬 여러분, 타이거스 구단의 여러분, 함께 싸웁시다. 정말로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23년간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이후에도 [[클라이맥스 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대타로 출장하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선 1차전에서 7회 말 1사 1, 2루 상황에서 대타 출장해 유격수 플라이에 그쳤지만, 이어지는 2차전에서 7-2(5점차)로 뒤진 9회말 2아웃 1루 상황에서 대타로 등장,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마무리 투수 캄 미콜리오를 상대로 추격의 투런 홈런을 쳤다.[* 이 기록은 [[2003년 일본시리즈]]에서 당시 함께 한신에서 뛰던 [[히로사와 카츠미]]의 '''포스트시즌 최고연령 홈런'''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2003년 당시 히로사와는 41세, 2013년의 히야마는 44세)] 하지만 다음 타자 [[아라이 타카히로]]가 삼진으로 아웃당하며 한신은 CS를 탈락했고, 이것이 히야마의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통산성적은 '''1959시합 출장, 4863타수 1263안타, 159홈런 707타점 41도루, 13희생타, 46희생플라이, 541사사구, 1100삼진, 타율 .260'''이다. 은퇴 뒤엔 [[호리프로]]에 입사해 야구 해설자로 활동 중이다. == 응원가 == 입단 초부터 쓰이던 현역 시절의 응원가는 한신 역사상 최고의 응원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2005년에 저작권 문제 등을 이유로 한신 선수들의 응원가가 대거 바뀌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도 바뀌지 않고 남아있던 2개의 응원가 중 하나가 바로 이 히야마의 응원가였을 정도로[* 나머지 하나는 [[포수]] [[야노 아키히로]]의 응원가. 근데 이 야노의 응원가는 2004년 변경되었던 것이라 1년만에 바꾸는 게 무리긴 했다. 사실상 바뀌지 않은 건 히야마의 응원가뿐인 셈.] 매우 오랫동안 쓰인 응원가다. [youtube(hbhXnu72jhI)] || この一打にかけろ 気合いで振り抜けよ[br]이 한방에 걸어라 기합으로 휘둘러라[br]誰もおまえを止められぬ 桧山よ突っ走れ[br]누구도 널 멈출 수 없다 히야마여 달려라 || == 기타 ==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뒤늦게 기량을 만개하고 철인의 이미지를 굳힌것에 반해 히야마는 [[카네모토 토모아키|카네모토]]가 한신에 입단한 2003년 이후를 기점으로 기량이 점점 떨어졌으나, 대타로 다시 기사회생해 [[LG 트윈스|국내 모 구단]]만큼 화끈한 투자를 하는 [[한신 타이거스|한신]]에서 질긴 선수생활을 이어가면서 엄청난 생존본능을 보여주었다. 저서로는 "生え抜き タイガースから教わったこと"('평생을 함께 한(본토박이) 타이거즈로부터 배운 것')가 있다.. 현역시절 [[그것이 알고싶다]]나 [[허구연]]이 출연한 [[EBS]] 다큐멘터리 '불멸의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등 한국 언론과도 상당히 자주 인터뷰를 했다. 위에 서술되어있듯이 재일 한국인 3세(한국명 황진환) 출신으로 2016년 3월 3일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가 2016년 3월 4일 [[일본]]으로 귀화했다. [* 일본 국립 인쇄국에서 발행하는 일본 [[관보]] 본지 제6728호에 고시되었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1KPOTq2Pju7tx5DU5YiDDg|#]]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우쿄구 출신 인물]][[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인물]][[분류:토요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