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센고쿠 시대/인물]][[분류:아이치현 출신 인물]] [include(틀:시즈가타케의 칠본창)] [[파일:히라노_나가야스.jpg|width=350]] [[파일:hirano kamon.png]] 히라노 가의 [[가몬(일본)|가몬]], 원 안의 세 개의 비늘(丸に三つ鱗, 마루니미츠우로코) 平野長泰 (ひらの ながやす) 1559년 ~ 1628년 6월 8일 [목차] == 소개 == [[일본]]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 무장이며 [[오와리 #s-3|오와리]] 국 쓰시마[* 津島, 지금의 [[쓰시마시(아이치)|아이치현 쓰시마시]] 부근] 출신. 통칭은 곤페이(權平). 히라노 가문은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나오카타류(直方流)이자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씨|호조]] 가의 서류(庶流)[* 서가(庶家), 분가(分家), 서자가(庶子家)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분가와는 달리 종가(宗家)에서 갈라져 나와 종가와 같은 성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며, 종가와 주종관계를 맺어 종가의 일문으로 대우받는다. 이러한 서류는 가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서류의 예로는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아시카가(足利)]] 가의 경우 [[키라|키라(吉良)]], [[시바 #s-12|시바(斯波)]], 하타케야마(畠山), [[호소카와|호소카와(細川)]], [[잇시키|잇시키(一色)]], 시부카와(渋川) 가 등과 여기서 또 분가한 가문들이 일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키라 가에서 분가한 이마가와(今川) 가.)] 호조 코레토키(北条惟時)의 후손인 요코이(横井) 가의 후손으로, 14대 무네나가(宗長)대 부터 오와리 국의 [[히라노]]지역을 다스리면서 히라노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가야스의 외조부인 히라노 만큐 뉴도(平野萬久入道)[* 만큐는 법명, 본명은 마사나가(賢長)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음.]대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영지를 빼앗기고 방랑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나가하루를 서양자([[데릴사위 #s-3|데릴사위]])를 목적으로 입양, 히라노 성을 잇게 한다. 20세까지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지만 나가야스가 태어난 시점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오와리를 통일했으므로 아버지 나가하루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아버지와 함께 섬기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급사하면서 나가야스의 주군은 자연스럽게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가 된다.[* 당시 아버지 나가하루가 히데요시 휘하에서 히메지 성의 수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 1583년 오다 가의 후계 문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대립, 시즈가타케 전투로 이어진다. 전투는 하시바 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때의 전공으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으로 불리며 가와치의 3천 석을 받게 된다. 이후 1584년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도 참전하여 [[도요토미 히데츠구|하시바 히데츠구]]의 나카이리(中入り - 별동대를 이끌고 적 후방이나 본거지를 공격하는 일) 부대와 함께했으며 히데츠구가 패주하는 와중에 오히려 적에게 돌격하여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이후 1595년 8월, 2천 석이 가증되어 야마토 국 토이치 군 다와라모토 인근의 5천 석을 하사받았으며, 1597년에는 종 5위하 토토미노카미(遠江守)에 서임되어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1600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종군하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참가, 하타모토로써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휘하에 있었으나 히데타다의 군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는 바람에 공을 세울 수 없었다. 1615년 [[오사카 전투|오사카의 진]]에서는 도요토미 측에 합류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직소했으나, 허가받지 못하고 에도의 수비를 명령받는다. 이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오토기슈[* 주군이나 다이묘의 곁에서 상담 및 말상대를 하는 사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서툴러 상당한 인원의 오토기슈가 있었다고 한다.]로 살다가 [[도쿠가와 이에미츠]]대 까지 장수한다. 1628년 사망. 향년 70세. 자식으로는 아들 나가카츠(長勝)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일 시모즈마 나카토라의 부인이 되는 딸이 한 명 있었다. 후손의 경우 아들 나가카츠 대에 1656년 12월 8일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명으로 나나사와 기요무네(七沢清宗)의 아들을 양자를 들이면서 혈통은 끊기게 되지만, 히라노 가문은 이후로도 하타모토로 존속되다 1868년부터 1871년까지 3년간 다이묘로써 근무하고, 이후 1884년 화족령이 시행되면서 남작 작위를 받는다. == 그 외 == 다이묘가 아닌 하타모토로써 삶을 마감했다. 같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인물들로 비교해보자면 나가야스가 5천 석을 하사받은 1595년 [[가토 요시아키]]가 이요 국 6만 석, 1585년에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셋츠 국 1만 석, 5개월 후에 아와지 국 3만 석의 영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본래의 17만 석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 등을 받아 51만 석,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아키 국 히로시마와 빈고 국 도모초 49만 8천 석, 카타기리 카츠모토도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이세 국 6천 석과 야마토 국 다쓰타의 2만 4천 석으로 총 3만석과 이바라키 성의 성주가 되었고 카스야 다케노리도 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카코가와 성 1만 2천석의 다이묘가 된 전적이 있다. 이는 후손들도 마찬가지라 막말까지 하타모토로 지내오다 10대 나가히로(長裕)가 1868년 7월 14일 유신립번으로 다와라모토 번주가 된다. 하지만 번으로 승격된 후 3년만인 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으로 짧은 다이묘 경력을 끝마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