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궁궐)] [include(틀:고려의 왕립 사찰)] [목차] == 개요 == 興王寺 [[고려]]시대에 [[개성특급시|개경]] 근처에 있던 거대 [[절(불교)|사찰]]. '''고려 최대의 사찰'''로 추정되며, 정치적인 집합소로 이용되어 왕실과 관련된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현재는 폐찰이 되었으며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흥왕사지를 둘러싼 성터가 남아있다. [[보제사|광통보제사]]와 함께 고려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아쉽게도 [[개성특급시|개성]]이 [[북한]] 영토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측에선 발굴이나 세밀한 측량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현 흥왕사지에는 석탑의 옥개석과 갑석이 무너진 채 남아있다. == 역사 == === 창건 === 고려 [[문종(조선)|문종]] 10년(1056년)부터 12년간 공사한 끝에 창건하였다.[* 1055년부터 13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위치는 고려 개경 개성부 덕수현이었다.[* 현재는 북한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이다.] 당시는 [[최충]]으로 대표되는 [[유교|유학]]이 막 고려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던 시점으로, 최초의 [[사립학교]]인 12학도가 설립되던 시기였으며고려시대의 유학자들 중에서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선과 달리 고려 이전에는 [[삼교]]의 조화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불교의 교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최유선]]을 위시한 신하들이 흥왕사 건설을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훈요십조에서도 "신라처럼 아무 데나 절 함부로 지어서 지기(地氣)를 흐트러뜨리지 마라"라고 무턱대고 절을 짓는 행위를 왕건이 제재시킨 내용이 있기는 한데, 고려 후대왕들이 훈요십조의 내용을 안 지킨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그러나 불교는 고려의 국교이기도 하고, 문종의 뜻이 강력해서 공사를 강행하였다. 문종 21년(1067년)에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 낙성식을 겸하는 연등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어, 이 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 소실과 복원 === [[여몽전쟁]]의 시기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전국토는 전화에 휩싸였다. 이때 수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는데[* [[신라]]의 왕실사찰이자 고려시대에도 남아있던 [[경주시]]의 [[황룡사]]도 이 때 없어졌다.] 흥왕사도 불타서 없어졌다. 그러나 흥왕사가 왕실의 원찰이므로 원 간섭기 무렵에 권위 진작 차원에서 재건했다. 하지만 [[원나라]]의 과도한 [[공납]] 요구에 허리가 휘는 판이었으므로 문종 시절 규모에는 훨씬 못 미쳤다. === 몰락 === 고려가 망하면서 흥왕사도 결국 좋았던 시절에 막을 내렸다. 흥왕사는 [[조선]] 초까지는 존속한 듯 보이는데 어느 순간 부터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 [[흥왕사의 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흥왕사의 변)] [[1363년]]에 [[김용(고려)|김용]]이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 자세한 내용은 [[흥왕사의 변|해당 문서]] 참조 바람. == 고려 왕실과의 관계 ==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숙종(고려)|숙종]]의 3남으로서 [[승려]]가 된 [[징엄]]. 의천과 징엄의 묘지는 모두 흥왕사 터에서 발견되었다. 송나라에 가서 천태종을 배워 고려에 도입하고 교선통합에 나섰던 인물이기도 한 의천이 흥왕사의 초대 주지였다는 점은 문종이 흥왕사 건립을 밀어붙인 이유를 시사해 주는데, 고려 중기 불교계의 주류이자 현종 이래로 왕실과 사돈을 맺은 [[경원 이씨]][* 인주 이씨라고도 함.오늘날의 인천 이씨.] 가문과 커넥션이 있었던 [[법상종]]에 맞서 왕자 출신의 승려 의천과 천태종을 내세워서 고려 왕실이 직접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도 흥왕사 건립의 한 동인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어쨌든 흥왕사는 그렇게 고려 왕실의 원찰로 번성하였다. == 규모 == >흥왕사(興王寺)는 국성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을 나가 2리 가량 가면 시냇물에 닿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 ---- >『[[고려도경]]』中 기록에 의하면 규모가 2800여 칸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의 왕궁 수준이다. 면적은 너비 800 m, 길이 400 m로 32만㎡에 이르렀는데, 이는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이다.[* 100% 복원된 경복궁 면적이 34만㎡이다.] 자금성의 면적이 72만㎡인데, [[자금성]]과 비교해도 거의 반절 정도 되는 크기로 정말 엄청난 크기이다. 다만 면적 관련한 자료는 북한 평양방송의 발표라서 신뢰성이 좀 의문시된다. 그러나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대륙의 기상]]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의 시각에서 쓴 [[고려도경]]에도 `극히 크다`라는 표현이 있다. 심지어는 [[1070년]]에 사찰을 둘러싼 [[성(건축)|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길이가 약 4 km 남짓이며 동서남북 성문 터 4곳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절이 창건된 뒤 열린 [[팔관회]]는 고려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 가람 == [[가람]]배치는 2탑 2금당식으로, 상당히 특별한 양식이다. == 흥왕사 13층 금탑 == ||[[파일:032010_1032_1.jpg|PD-shape]]|| ||고려시대 불화중 하나로 황금탑의 모양을 짐작할수 있다.|| 흥왕사 경내에는 가람을 이루는 탑 2기 외에도 [[은]] 427근으로 안을, [[금(원소)|금]] 144근으로 겉을 장식한 매우 화려한 13층 금탑이 있었다고 한다. [[무신정권]] 시절에 [[최이]]가 금탑과 꽃병을 만들어 흥왕사에 헌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때 만들어 진것으로 보인다. 이 금탑을 여러 번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리 크지는 않았던 듯하다. 고려 후기의 학자 목은 [[이색(고려)|이색]]은 [[마니산]] 기행 도중 흥왕사 금탑을 보고 [[http://m.blog.daum.net/gihac/407?categoryId=629161|시를 한 수 짓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 침입시기에 [[몽골군]]이 개경을 점령하여 싸그리 불태우면서 흥왕사도 함께 불타 없어졌으나 금탑은 이후에도 기록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건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충렬왕]] 시절, [[원나라]]에서 시집온 [[제국대장공주]]가 흥왕사에 갔다가 금탑을 보고 필이 꽃혀서 금탑을 강탈해 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탑을 녹여 다른 곳에 사용하려는 의도였던 모양인데, 갑자기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이라고는 했는데 흥왕사 금탑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홧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대왕이 만든 금탑을 후손으로써 지켜야 했는데 그러자니 성깔 지랄맞은 제국대장공주나 그 뒤에 있는 원나라와 또 맞서야 하니까.]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자 [[제국대장공주]]는 일관(日官)[* 별로 점을 치는 관직.]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오윤부는 금탑을 도로 흥왕사에 돌려주게 했고, 그 뒤로 충렬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후대이 인물인 [[이색(고려)|이색]]이 금탑을 보고 시를 남기기도 한것으로 보아 [[여말선초]] 까지는 남아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야사에 따르면 흥왕사의 보물인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탐냈다고 한다. 심지어 [[영락제]]까지도 "금탑을 가져올 수 없을까?" 라고 했단다. 결국 명의 요구가 귀찮았던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은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 손에 들려 보내줬다고 한다. 야사답게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 조선열전 및 명실록에서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해보아도 영락제가 금탑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명사나 명실록에서 興王寺로 검색을 하면 아무런 기사도 안 뜬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해봐도 태종 이방원 시기에는 관련 기사가 전혀 없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가 가져가지 않았다 해도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조선]]시대 유생들의 [[회암사]]나 [[분황사]] 등 사찰 반달,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대한민국에서 국보로 지정되기도 전에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생각해보자. 명나라 황제야 야사라고 쳐도 그 전 원나라 황족도 탐을 낼 정도의 보물인데 [[조선]]시대 유생들, 임진왜란 [[왜군]]들, 청나라 군인들, 개화기 서구인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 도굴꾼들이 환장을 안 할까? 그 수많은 역사의 난리를 겪고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다. [[백제금동대향로|어쩌면..]] 어쨌거나 금탑의 행방은 묘연하다. 만일 남아있다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국보]]가 될 자격이 충분한 귀중한 문화재였을 텐데 애석하다. == 교장과 초조대장경 == [[대각국사]] [[의천]]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교장#s-4|교장]]을 간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교장은 훗날 완성된 [[팔만대장경]]의 [[프로토타입]]이나 마찬가지로 [[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은 지금까지도 불서 목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 또한 동양 최대의 분량이었던 [[초조대장경]]의 경판이 바로 이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여몽전쟁]] 때 사찰이 타면서 같이 전소되었다. == 기타 == * [[경기도]] [[여주시]]에 흥왕사라는 동명의 절이 있다. 한자는 다른데, 개성의 흥왕사는 '흥王사'지만 여주 흥왕사는 '흥旺사'이다. * 흥왕사는 사찰의 창건자인 문종 인효대왕의 원찰이기도 했다. 그래서 문종의 어진이 흥왕사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 고려사 공민왕 세가엔 흥왕사의 재궁이 등장한다. 이를 보아 [[안화사]]처럼 사찰 내에 별궁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3년에 흥왕사 대시원(大施院)이 등장한다. 당시 [[명의태후]]가 이 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 '홍원사광제승통총서묘지명'에선 흥왕사 감덕원(感德院)이 등장한다. == 같이보기 == * [[교장#s-4|교장]] * [[보제사]] * [[안화사]] * [[의천]] * [[절(불교)/한국]] * [[징엄]] * [[초조대장경]] * [[팔관회]] * [[현화사]] * [[황룡사]] *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분류:한국의 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