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A_portrait_of_Fujiwara_Seika_%E8%97%A4%E5%8E%9F%E6%83%BA%E7%AA%A9%E5%83%8F.jpg]] >'''두뇌가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익히 다룰 줄 아는 사람으로 어느 책이나 모르는 것이 없고 성품은 아주 꿋꿋해서 그들 측에서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 (강항의 [[간양록]]) 藤原惺窩[* 제목에는 후지와라 세이카라고 하였지만 [[후지와라]]는 [[うぢ|우지]]기 때문에 [[の]]를 빼서 부르는 건 격하나 다름없으므로 사실 오류다. 굳이 얘기하자면 후지와라노 세이카라고 해야 맞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그의 우지를 묘지처럼 부르는 것을 보면 어떤 착오가 굳어진 것 같다.] 1561년 ~ 1619년 [[센고쿠 시대]] 후반기에서 [[에도 시대]] 초반기의 [[성리학자]]. 일본 최초의 성리학자라고 할수 있다. 오기마치 덴노 4년(1561년),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시조]]로부터 27세손이고 구게(公家)에서 4등급인 우림가(羽林家)인 레이제이 다메즈미(冷泉爲純)의 셋째 아들로서 하리마노쿠니(播磨國) 미키노코오리(三木郡) 이사카와 장원(지금의 [[효고현]] 미키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교토]]로 가서 쇼토쿠지(相國寺)에 들어가 선승(禪僧)이 되어 [[유교]](儒敎)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유학]]가려고 시도했지만 갑자기 병을 얻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그 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붙잡혀온 조선의 유학자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그때까지 교토의 승려들 사이에서 교양의 일부이기도 했던 유학을 체계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학풍은 성리학을 기조로 하면서도 [[양명학]](陽明學)도 수용하는 등 포용 분야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성리학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기 전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 닌조슈교(仁如集堯) 등의 승려를 통해 주자학을 처음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인이 중국의 고전 문어인 한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고, 애초에 성리학 자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측면이 강한 학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강항을 만나기 전까지 성리학의 해석에 굉장한 집착을 보였다. 1590년에 조선 통신사로 온 [[황윤길]], [[김성일(조선)|김성일]] 등과 교토에서 교류하며 주자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고 159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초청되어 에도에서 [[정관정요]]를 강의했다고 한다. 묘주인(妙壽院)의 승려로 있을 때 강항을 만났고, 그래서 그는 강항을 만나자 유학자로서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내는데 [[간양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강항|신]]에게 우리 나라의 [[과거제도#s-5|과거 보는 절차]] 및 춘추 석전(釋奠)과 [[경연#s-2|경연]], [[조정#s-3|조정]] 등의 절목을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석하여 듣지 못했다' 라고 하였고, 단지 과거, 석전 등의 대개를 알려주었더니, 중은 매양 실심하여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 問臣以我國科擧節次及春秋釋奠經筵朝著等節目 臣答以草茅之人 未及豫聞 但告以科擧釋奠等大槩 惜乎吾不能生大唐 又不得生朝鮮 而生日本此時也] 이런 상황으로만 보더라도 성리학에 대한 그의 집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항의 존재는 세이카에게 거의 구세주 급. 이 때, 강항의 나이 32세였고, 세이카는 38세였다. 그가 유학자가 되면서 승적을 벗고 이름을 슈쿠(肅), 자는 렌부(斂夫), 호를 세이카(惺窩)[* 이 이름도 강항이 그의 서재 편액 내력을 적은 '성재기(惺齋記)'와 '시상와기(時尙窩記)'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로 바꾸었다. 또한 강항과 조선 선비 포로들에게 주자학을 이해할 수 있게 [[육경]]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에 보조하게 하였다. 이들이 저서한 것은 [[주자(철학자)|주자]]의 주석에 따라 일본식의 해석본을 표시한 [[사서오경]] 일본어판이었다. 세이카는 강항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강항을 끌고온 [[다이묘]]를 설득하여 훗날 강항이 조선 귀국 허락을 받아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이카는 강항과 헤어진 뒤에도 홀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이는 일본 주자학에 큰 기틀을 마련한다. 그의 제자 중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년 ~ 1657년)이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이 된 후 [[도쿠가와 이에츠나]]에 이르기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시강이 되었다.[*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자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신호탄이 된 호코지 종명 사건을 뒷받침한 어용문인으로도 유명하다.] [[분류:센고쿠 시대/인물]][[분류:에도 시대의 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