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국의 역사/907)] {{{+1 後梁 }}} [목차] == 개요 == [[양(육조)|양나라]]의 황족 소찰은 [[후경]]의 난 직후, 각지의 황족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소역과 대립하였고 살아남기 위해 [[서위]]에게 원군을 요청해 보호를 받는다는 미명하에 실질적인 지배권을 넘겼다. 거기에 소역은 [[북제]]와 긴밀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서위는 이에 대항하고 강남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찰을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그 후 황제가 된 원제 소역과 서위는 대립 끝에 서위의 군대가 강릉에 있던 소역을 공격해 그를 죽이고 소찰을 양나라의 황제에 즉위시켰는데 이것이 후량의 탄생이었다. [[오대십국시대]]의 [[주전충]]이 세운 후량과 구분하기 위하여 '''서량(西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후량이 지배한 영역은 강릉 주변의 일부 지역 뿐이었기에 실제로는 서위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다. 그래서 양나라 정사인 <양서>에는 양나라 황제와 달리 후량의 황제는 본기가 아니라 소정덕, 소기, 소동, 소연명 등 괴뢰 황제와 함께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북제는 스스로 지배하에 들어온 소연명을 돌려보내 양나라를 계승시키고 이를 실효있게 지배했는데 소연명은 소역이 죽은 후 잠시 황제가 되었다. 이후 경제(敬帝)로 즉위했다. 하지만 소연명은 진패선에 의해 퇴위당하고 소역의 아들 소방지가 뒤를 이었지만 사실상 진패선이 대권을 장악하면서 양나라는 반쯤 멸망한 상태였다. 후량은 서위을 대신한 [[북주]], 북주를 대신한 [[수나라|수나라]] 때까지 괴뢰 정권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북주와 수나라는 강남에 지배권을 넓히기 위해 [[진패선]]이 세운 진(陳)이 양나라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정권이며, 그래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후량이야말로 정통성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결국 후량은 남북조 통일 직전에 [[수문제]] [[양견]]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 진나라 동양주 자사 소엄과 오주 자사 소환이 황제를 자칭하며 수나라에 대항했다.[* 소엄은 후량의 선제 소찰의 5남, 소환은 후량의 명제 소규의 3남이었다.] 이번에는 진의 괴뢰 정권이 된 셈이랄까. (얼마못가 진은 망했지만.) 또한 수나라 말기 파릉에서 거병하여 양왕을 칭했던 소선은 소엄의 손자였으며 그는 [[당고조]]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당나라]] 때도 많은 양나라 황족 후손들이 등용되었다. == [[후량]]의 황제 == ||<rowbgcolor=#4BB4B4><rowcolor=#fff>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기간 || 능호 || || - || 양 고조(梁高祖) || 무황제(武皇帝) || [[무제(양)|소연]](蕭衍) || - || - || 수릉(修陵) || || - || 후량 고종(後梁高宗)[* 후량 선제가 추존.] || 소명황제(昭明皇帝) || [[소통(양나라)|소통]](蕭統) || - || - || - || || 1대 || 후량 중종(後梁中宗) || 효선황제(孝宣皇帝) || [[소찰]](蕭詧) || 대정(大定) 555년 ~ 562년 || 555년 ~ 562년 || 평릉(平陵) || || 2대 || 후량 세종(後梁世宗) || 효명황제(孝明皇帝) || [[양명제|소규]](蕭巋) || 천보(天保) 562년 ~ 585년 || 562년 ~ 585 년|| 현릉(顯陵) || || 3대 || 후량 공종(後梁恭宗)[*A [[소선(당나라)|소선]]이 추존.] || 효정황제(孝靖皇帝)[*A [[소선(당나라)|소선]]이 추존.][br],,,<후주(後主)>,,, || [[양후주|소종]](蕭琮) || 광운(廣運) 586년 ~ 587년 || 585년 ~ 587년 || - ||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후량,version=71)] [[분류:남북조시대]][[분류:6세기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