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27년 출생]][[분류:1844년 사망]] ---- ||<-3><tablealign=right><table 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bgcolor=#94153E> {{{#gold '''조선 장조의 증손'''[br]{{{+1 '''회평군[br] 懷平君'''}}}}}} || ||<-2><width=30%><bgcolor=#94153E> '''[[군호|{{{#gold 군호}}}]]''' ||<(> 회평군(懷平君) || ||||<:><bgcolor=#94153E> '''[[시호|{{{#gold 시호}}}]]''' ||<(> 효민(孝愍) || ||||<:><bgcolor=#94153E>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bgcolor=#94153E> '''[[이름|{{{#gold 이름}}}]]''' ||<(> 명(明)[*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회평군 명('''明''', '''日''' + 月)), 둘째는 영평군 경응('''景'''('''日''' + 京)應, 초명은 욱('''昱''', '''日''' + 立)), 셋째는 철종 변('''昪''', '''日''' + 弁)인데 전부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는 이들 형제와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고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으며 남연군의 네 아들들의 이름은 흥녕군 창응('''昌'''('''日 + 曰''')應), 흥완군 정응('''晸'''('''日 + 政''')應), 흥선군 하응('''昰'''('''日''' + 正)應)인데 흥인군 최응('''最'''('''曰''' + 取)應)의 경우는 부수는 갈 왈(曰)로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였다.] || ||||<:><bgcolor=#94153E> '''{{{#gold 초명}}}''' ||<(> 원경(元慶) || ||||<:><bgcolor=#94153E> '''{{{#gold 조부}}}''' ||<(> [[은언군]] || ||||<:><bgcolor=#94153E> '''{{{#gold 생부}}}''' ||<(> [[전계대원군]] || ||||<:><bgcolor=#94153E> '''{{{#gold 생모}}}''' ||<(> [[완양부대부인|완양부대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 || ||<|2><:><bgcolor=#94153E> '''{{{#gold 생몰[br]기간}}}''' ||<:><bgcolor=#94153E> '''[[음력|{{{#gold 음력}}}]]''' ||[[1827년]] [[9월 11일]] ~ [[1844년]] [[9월 6일]] || ||<:><bgcolor=#94153E> '''[[태양력|{{{#gold 양력}}}]]''' ||[[1827년]] [[10월 30일]] ~ [[1844년]] [[10월 17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고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으로, 조선 25대 임금 [[철종(조선)|철종]]의 큰형이다. == 어린 시절 == 1827년([[순조]] 27년) 9월 11일 신시(申時)에[* 오후 3시 ~ 5시 사이다.] [[강화도]]에서 [[은언군]]의 서6남 [[전계대원군|이광(전계대원군)]]과 [[완양부대부인|완양부대부인 최씨]] 사이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이광은 [[가족]]의 역모 및 옥사에 연좌되어[* 이광의 기준 적모(嫡母) 송씨와 형수 신씨([[상계군]]의 아내)의 [[천주교]] 순교사건, 형 [[상계군]] 추대 사건 등.][[강화도]]에 유배 중이었다. 이원경이 태어나고 3년 뒤인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가 요절했다. [[순조]]는 이대로 가다가는 왕실의 대가 끊길 것 같은 위기감을 느껴 이광의 일가를 방면했다. 이후 이광의 가족들은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鄕校洞 慶幸坊)에 정착해 살았다. 1840년([[헌종(조선)|헌종]] 6년) 어머니가, 1841년(헌종 7년) 아버지가 연달아 사망했음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계속 [[영평군 이경응|두]] [[철종(조선)|이복 동생]]들을 잘 보살피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 민진용의 난과 최후 == 그러나 3년상이 끝난 1844년([[헌종(조선)|헌종]] 10년) 8월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몰락한 [[노론]]계 인물 민진용이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하여 역모를 일으키려다 적발된 사건(민진용의 옥사)에 엮인 것이다. 민진용은 [[노론]] 재상이던 대사헌 민응수[*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시중의 손자.]의 4대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 전에 몰락하여 [[중인]]이 되었고, 민진용은 [[무인]]으로 생활했다. 가담자 중 이원덕은 의원으로 [[전계대원군|이광]]의 지인이었고, 박순수는 양아버지 박종훈(朴宗薰)의 음덕으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부사를 역임했다. [[순조]] 말기부터 [[헌종(조선)|헌종]] 초기까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주로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金逌根), 7촌 조카 김홍근(金弘根)이 쌍두마차가 되어 좌지우지하다가 1844년(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났다. 그러자 권력에 틈이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 때를 노려 민진용 일파가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문제는 이원경이 이 역모에서 임금으로 추대될 대상이었던 것.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다들 상당한 중형을 받았는데 주동자는 전부 [[끔살]]에 단순 동조자도 [[귀양]]을 갈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실제로 참여는 안했다 해도 왕으로 선택된 대상이었던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참고로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이 일이 있은 후 민진용 [[항렬]]의 '용(鏞)'을 '호(鎬)'로 바꾼다. 바로 [[고종(대한제국)|고종]] 시절 외척 세력이던 [[명성황후]]와 [[민태호(조선)|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등이 민진용과 같은 항렬이다.] 결국 [[삼사]]와 [[의금부]]에게서 계속 [[탄핵]]을 당하다 같은 해 9월 6일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향년 18세(만 16세). == 이후 == 이원경이 역모로 몰려 죽자 그의 두 동생들, [[영평군(1828)|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갔다.(...) 그러다 1849년(철종 즉위년) 이원범이 [[철종(조선)|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신원, 복권되었으며 1858년(철종 9년) 11월 9일 승지 서승보의 건의에 따라 '회평군(懷平君)'으로 추봉되고 현록대부 및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이복 동생 영평군을 비롯한 다른 왕족들의 군호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지만 회평군의 경우는 먼저 봉작받은 동생 영평군의 '평'을 따고 그 앞에 억울한 죽음을 맞은 것을 애통해하며 위로한다는 뜻으로 '회'를 넣은 것이다.] 시신은 처음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하도면 중흥동 삼각산 서남쪽[* 경기도 [[고양시]] 효자동 일대]에 안장했다가 다시 경기도 [[포천군]] 왕방산으로 이장되었으며, 뒤에 1856년(철종 7년) 4월 8일 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 산11번지[*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 해룡산, [[전계대원군]] 묘 동쪽 100m 지점으로 이장되었다. 묘비문은 1859년(철종 10년) 철종이 직접 짓고, 판서 [[김병학]]이 글씨를 썼다. == 후손 == 원래 회평군이 [[전계대원군]]의 유일한 적장자라 이후 가독(家督)[* 집안을 이어 갈 장자(長子)의 신분.]을 이어야 했으나, [[역모]]에 연루되어 일찍 죽고 뒤를 이을 아들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종(조선)|철종]]이 즉위한 후 생가([[누동궁]])의 후사를, 회평군의 서출 이복동생이자 철종의 둘째 이복형인 [[영평군(1828)|영평군]]이 잇도록 했다. 그런 상황에 회평군의 [[양자(가족)|양자]]를 들이면 [[누동궁]] 서열 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인지 회평군의 친 후손은 물론 족보 상 후손도 없다.[* 다만 [[대한제국]] 멸망 이후로 사후양자를 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가계도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평대군]]의 후손이 입양된 것으로 명목상 회평군의 5대손까지 [[자손]]이 있다.] [[분류:조선의 왕자군]] [[분류:강화군 출신 인물]] [[분류:조선의 사형수]]